비오 9세

라틴어 : Beatus Pius PP. IX
이탈리아어 : Beato Papa Pio IX
스페인어 : Beato Papa Pío IX
영어 : Blessed Pope Pius IX
독일어 : Papst Pius IX.
프랑스어 : Pape Pie IX

교황명비오 9세 (Pius IX)
세속명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출생지교황령 세니갈리아
사망지이탈리아 로마
생몰년도1792년 5월 13일 ~ 1878년 2월 7일 (85세)
재위기간1846년 6월 16일 ~ 1878년 2월 7일 (31년 236일)
시복2000년 9월 3일, 요한 바오로 2세
축일2월 7일[1]
역대 교황
254대 그레고리오 16세255대 비오 9세256대 레오 13세
비오 9세의 문장

1 전반적인 생애

세니갈리아 출신으로, 성 베드로를 제외한 역대 교황 중에서 최장기로 재임하였으며(31년 7개월 23일) 1천년 이상 존속한 교황령을 지배한 마지막 교황이기도 하다. 그가 오랫동안 교황좌에 있었다는 건, 그만큼 다른 교황들에 비해 여러 시련에 맞닥뜨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와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으며, 이 때문에 반동적인 교황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이후로 교회가 한동안 보수반동적인 자세를 견지하게끔 한 교황이기도 하였다.


2 재위기간

2.1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초기에는 자유주의자로 간주되어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보수 반동적인 정책 및 반이탈리아 정책으로 민심을 잃었다. 민심은 물론 열강들도 교황령이 대의제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권하였으나, 교황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압력이 가중되면서 결국 이러한 개혁을 추진하기는 하였으나, 민족주의와 대의제적 열망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리고 강력한 이탈리아 통일운동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의 거의 대부분의 세속 영토를 박탈할 것이었다. 1848년 혁명기에는 로마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교황은 도피하였다가 오스트리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귀환해야 했다. 이후 교황의 반동정책은 더욱 강고해지고 분명해졌다.

1858년 반유대주의가 강한 가운데, 교황령인 볼로냐 시에 살던 유대교 가문인 모르타라 가에서 일하던 가톨릭 신자 하녀가 모르타라 가의 아이인 에두아르도에게 몰래 세례성사를 주었다는 진술을 하였고, 이에 교황청 경찰은 아이를 가족에게서 떼어내어 교황에게 데려왔다.[2] 교황은 아이를 돌려달라는 가족 및 각국의 탄원[3]을 외면한 채 "세례를 받은 아이를 유대교도 가정에 맡길 수 없다"고 하였고, 교황궁에서 길러 사제로 키웠다.

이는 유럽미국 등지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이후 주세페 코헨이라는 아이에게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자 더 많은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는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반 가톨릭 여론을 조성하였다. 다만 유럽 내에서는 가톨릭 신자들과 반유대인 편견도 많아 비난 여론이 약화되었고, 미국에서는 아직 남북전쟁 이전이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내진 노예 아동들의 매매가 지속되어서 내 코가 석자 정부가 이 사건을 비난하기 어려웠다. 대대적 비난은 프로이센이나 영국 등 비 가톨릭 국가들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정작 당사자인 에두아르도 모르타라 신부는 후일 "부모님은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며 눈물로 호소하고 회유했으나, 내가 초자연적 은총의 힘을 목격했다는 사실 외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실낱같은 욕망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회고하였다.


2.2 교황령의 상실

모르타라 사건에서 교황청 경찰력이 발동되었듯, 교황은 당시까지 교황령에서 세속적 권한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통일 전쟁이 발발, 교황령이 상실되기에 이른다. 자세한 건 바티칸 포로 문서 참고.


2.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공산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표출하던 교황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 이들을 비난한 바 있었고, 주교들에게 '오류 목록'을 보내 이러한 사조를 단속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는 교회내의 자유주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성향은 1869년 개최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교황은 여기서 신학적 면에서의 교황의 무류성을 선언하고자 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추기경 뒤팡류나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될링거, 영국의 가톨릭 귀족이자 학자이던 액턴 경 등의 반대를 불렀으나 교황은 이를 강행했다. 알프스 이북 출신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이남의 주교들은 교황권 옹호 여론이 강했기에(울트라몬타니즘), 결국 다수가 참석했던 이들에 의해 교황무류성이 교리로 인정받았고, 교황은 이를 이용해 성모무염시태를 선언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권위와 더불어 교황의 권력을 신장시켰다. 그밖에도 공의회에서 교황과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진보사조에 대한 단죄 또한 이루어졌다. 이렇게 진행되던 공의회는 이탈리아군의 로마 점령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론에 반발한 독일 등의 알프스 이북의 개혁적 성향의 가톨릭 세력이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구 가톨릭교회이다.(…)


2.4 일본 26위 성인의 시성


1597년일본 천주교 박해[4]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순교자들을 비오 9세가 시성했다. 20세기 이후에는 성공회에서도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3 개인적인 면모

역대 교황 가운데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교황으로, 주변의 추기경들은 사진찍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지만,[5] 비오 9세는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사적으로는 검소한 사람으로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을 많이 귀여워했는데, 납치했던 유대인 아이 에두아르도도 귀여워하며 친히 키웠다. 에두아르도는 교황의 애정을 받으면서 성장해 사제가 되었다.(물론 이것이 아동 납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성모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몸이 허약하여 어릴 때부터 성모신심이 강했다고 한다.
통일 이후 바티칸의 수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는 교황의 모습은 독실하고 보수적인 신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선종

30년 넘게 재위하면서 이탈리아와 대립각을 세우던 비오 9세는 1878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파문을 해제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달 후인 1878년 2월 7일, 묵주기도 도중 심장마비로 85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유언은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부디 거룩하게 잘 지켜주십시오"였다.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가 3년 뒤인 1881년 7월 13일에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는데, 비오 9세에 반대하던 과격파 폭도들이 이장 행렬에서 교황의 관을 탈취해 테베레 강에 던지려고 했다가 사태를 알고 출동한 민병대에 의해 진정되어 사후의 수난을 모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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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에 있는 비오 9세의 무덤

교황청에서는 비오 9세에 대한 시복 절차에 들어갔지만 그와 악연이 깊었던 이탈리아 정부가 교황 선종 이후 1백년 넘도록 시복을 집요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1985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자의 전 단계인 가경자로 선포했으며, 프랑스의 한 수녀가 치유된 것이 비오 9세의 전구에 의한 기적으로 인정됨에 따라 2000년 9월 3일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시복되었다.
  1. 복자이며 교황이었기 때문에, 교회법에 따라 공적인 축일은 로마 교구에서만 지낼 수 있다.
  2. 사실 그 당시 교황령의 법으로 비 기독교 신자(= 유대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양육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유괴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런데 한 가지 웃긴 것은, 가톨릭 신자가 유대교 집안에서 하녀나 하인으로 일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3. 사건 이듬해인 1859년에 이탈리아 내 유대계 대표자들이 교황과 면담을 가졌는데, 비오 9세는 이들에게 '세계가 뭐라고 생각하든지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급증하는 천주교 신자에 당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켰다.
  5. 쥬세페 페치(Giuseppe Pecci) 추기경(교황 레오 13세의 형)은 사진 찍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것 만큼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는데 굳이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