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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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센추리 클럽 가입자[1]

이름윌리엄 앰브로즈 라이트
(William Ambrose Wright CBE)
생년월일1924년 2월 6일
사망년월일1994년 9월 3일
국적잉글랜드
출신지아이언브리지
포지션하프백, 센터백
신체조건173cm / 73kg
등번호6, 4[2], 5[3]
소속팀울버햄튼 원더러스 FC (1939–1959)
국가대표105경기 / 3골 (1946~1959)
감독아스날 FC (1962–1966)
1957 Ballond'or
수상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2위
빌리 라이트
3위
레몽 코파
아스날 FC 역대 감독
조지 스윈딘
(1959~1962)
빌리 라이트
(1962~1966)
버티 미
(1966~1976)

1 생애

1.1 어린 시절

빌리 라이트는 처음 축구를 할 때 센터 포워드로 시작하였다.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학교에서는 두각을 나타냈고, 축구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울버햄튼에서 구단의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다. 결국 14살의 어린 나이에 라이트는 울버햄튼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처음 그 당시 감독이었던 프랭크 버클리는 라이트의 실력이 최고 수준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1.2 클럽

라이트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울버햄튼 1군팀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상대는 노츠 카운티. 전쟁 기간에 나이가 어린지라 전선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1943년 이후에는 후방에서 체력 훈련 교관으로 복무했다.

1946년에 전쟁이 끝나고 첫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 라이트는 라이트 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다음 시즌이 끝났을 때, 전임 주장인 스탄 쿨리스의 은퇴 이후 울버햄튼의 주장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 완장은 라이트가 은퇴할 때까지 그의 왼쪽 팔에 있었다. 1949년에는 팀을 이끌고 FA컵 결승에 나아가 레스터 시티를 3대 1로 꺾고 첫 우승 트로피를 드는데 성공했다. 1952년에는 기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는 잉글랜드의 주장으로서 그리고 리그 최고의 수비수가 빌리 라이트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라이트는 이즈음에 센터 하프로 포지션을 옮겼다. 이때부터 빌리 라이트의 은퇴 즈음이 울버햄튼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 당시 울버햄튼의 통산 3회의 1부 리그 우승 기록 등 여러 우승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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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컵을 든 빌리 라이트

1.3 국가대표

7년간의 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면서 많은 선수들과 같이 라이트도 이 때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하게 되었다. 라이트는 1948년 처음으로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에도 임명되었고,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기세 좋게 브라질로 건너갔던 잉글랜드는 미국에게 일격을 당하는 등 굴욕의 연속이었고, 결국 예선 통과도 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게다가 빌리 라이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위상은 날로 떨어지기만 했는데, 심지어는 푸슈카시 페렌츠의 드래그 백에 속으며 골을 허용, 웸블리 참사의 한 켠을 장식하기도 하고, 설욕을 위해 건너간 부다페스트에서는 아예 7대 1로 깨박살이 나기도 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 떨어진 종가의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1954년 월드컵에 출전하였고, 그래도 예선 통과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8강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 그리고 잉글랜드는 망했습니다. 우루과이에게 4대 2로 패배한 것.[4]

1958년 월드컵에서는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잉글랜드를 이끌고 스웨덴에 갔다. 브라질소련 등의 강호들과 조별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소련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이번에도 예선 탈락을 피하지 못했다.

국제 대회에서의 대표팀의 끝없는 추락과 다르게 한줄기 빛이 된 소식이 있었다. 1959년 빌리 라이트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우게 되었는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로 A매치 출전 횟수 100회를 달성한 것. 그렇게 105회의 출전을 끝으로 A매치 경력을 끝냈다.

1.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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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감독 시절의 모습.

은퇴 후 라이트는 아스날에서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맞아들어서인지 1965-66시즌에 14위로 시즌을 마쳤고, 아스날에서 경질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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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페렌츠 푸스카스와 함께.

그 이후에는 텔레비전에서 해설을 맡았고, 1989년 이후에는 파산에 직면한 친정팀 울버햄튼의 임원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1994년, 빌리 라이트는 위암으로 사망하였다.[5]

2 플레이 스타일&평가

키는 173센티미터로 작았지만 강력한 태클과 승부욕으로 더 큰 선수들을 제압했다. 또한 게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서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데 강력함을 보였다. 리더십도 뛰어나서 대표팀과 클럽에서 주장으로 활약했는데, 105경기 중 90경기를 주장으로 출전하였는데 이는 바비 무어(무어는 108경기 출전)와 더불어 잉글랜드 주장 중 역대 최다 주장 출장 기록이다.

특히 그는 몸 관리에 뛰어나서 경기에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가장 빨리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던 비결도 그가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잉글랜드 대표팀의 모든 소집에서 3차례 밖에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클럽에서도 13년간 31차례 정도밖에 빠지지 않았을 정도로 엄청난 철강왕급 내구성을 자랑했다.

3 수상[6]

3.1 클럽

3.2 개인

  • FWA 선정 올해의 선수 1회: 1952
  • 발롱도흐 2위: 1957
  • 울버햄튼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1. 그리고 이 사진은 현재 울버햄튼 홈구장에 동상으로 남아있다
  2. 1954년 월드컵
  3. 1958년 월드컵
  4. 그나마 1954년 월드컵 이후 빌리 라이트의 소속팀 울버햄튼이 푸스카스의 소속팀 부다페스트 혼베드를 꺾은 것이 위안
  5. 일부 다른 기사에서는 빌리 라이트의 사인을 췌장암이라고도 한다
  6. 빌리 라이트는 울버햄튼 원 클럽 맨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