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리스트

독일 국방군 원수
육군
(H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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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크문트 빌헬름 발터 폰 리스트
(Siegmund Wilhelm Walther von List, 1880.5.14 ~ 1971.8.17)

독일군 국방군 재직기간 1940.7.19 ~ 1942.9.9

2 생애

바이에른 왕국의 오버킬베르크에서 태어난 리스트는 1889년에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해 1900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1904년에 대대부관, 1908년에 중위로 바이에른 육군대학으로 진학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대위로 승진해 바이에른 참모본부에 배치되었다.

3 1차 세계대전

제 1차 세계대전 개전시 바이에른 제 2군단 참모로 종군한 리스트는 도중에 병으로 쓰러져 요양 후 1917년에 회복하여 바이에른 예비 제 8 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1918년에 소령으로 승진한 그는 종전시 바이에른 군사청 소속이었다.

1920년에는 의용군 소속으로 좌익급좌파가 뮌헨에서 세운 레테 공화국과 싸웠다. 1923년 9월에 제 19 보병대대장, 1924년에 중령진급 후 제 7 군관구 교육부장으로 취임해 이후 약 10년간 독일군의 교육업무를 담당했다. 1930년에 소장으로 승진한 리스트는 드레스덴 군사학교장으로 있다가 1932년에 다시 중장으로 승진해 1933년에 제 4 보병사단장이 되었다.

4 제2차 세계대전

1938년에 빈의 제 5 집단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스트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오스트리아군을 독일군으로 편입하는 업무를 맡았다. 1939년 4월에 상급대장으로 승진한 리스트는 9월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 14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전에 종군했다. 폴란드 점령의 댓가로 9월 30일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그는 이듬해 프랑스 침공에서 제12군을 이끌고 마지노선 돌파에 성공해 원수가 되었다. 1941년 4월의 발칸 작전에서 제 12군 사령관으로 독일군의 지휘를 담당한 리스트는 4월 17일에 유고슬라비아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21일에는 그리스를 항복시키고는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동맹군이던 이탈리아군의 사관을 배제하고 항복조인식을 치르려다 무솔리니의 항의를 받고는 독일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인 알프레드 요들이 독일에서 날아와 이탈리아 사관을 배석시켜 조인식을 치렀다. 발칸 작전 종료 후, 남동군 사령관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점령지의 정책을 담당한 리스트는 도중에 병환으로 쓰러져 1941년 10월에 사령관에서 물러나 요양하다가 1942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 점령하에 있던 노르웨이의 방어체계를 감찰했다.

5 동부전선

1942년 7월 1일에 동부전선 남부에 있던 A군 집단사령관으로 임명된 리스트는 작전수행을 놓고 히틀러와 대립하다가 9월 10일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독일의 패전까지 아무런 직함을 받지 못했던 리스트는 히틀러 암살계획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 후 히틀러가 많은 장군들에게 보낸 경고장이 도달하지 않았다.

6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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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리스트(왼쪽)와 발터 쿤체(Walter Kuntze)(오른쪽)가 연합국의 인질이 되었을 동안 감옥의 마당에서 산책하는 장면

1945년에 독일의 항복으로 미군의 포로가 된 리스트는 1948년에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포로의 학살혐의로 기소되었는데 발칸반도를 점령할 당시 그의 수하에 있던 독일군이 그리스 및 유고슬라비아의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자로 재판이 진행되어 종신형의 판결을 선고받았다. 투옥중이던 리스트는 1951년에 병을 이유로 가석방을 요청했지만 기각당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중병에 걸린 것이 확인되어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은거생활을 하던 리스트는 19년 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서 사망했다.

7 평가

리스트는 12군 사령관이자 발칸 전역의 책임자였으며 독일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1주일만에 유고를 무너뜨리고 작전 개시 1달만에 그리스까지 밀고 내려가 영국군을 축출한다. 1942년 7월에 청색작전을 위하여 남부 집단군이 두개로 나뉘는데 리스트는 A 집단군을 맡았고, 코카서스 방면을 책임지게 된다. 그리고 이 청색 작전은 실패로 끝나며 결과적으로 독일은 6군을 잃고, 원수가 항복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청색 작전에서 A 집단군과 리스트에게 주어진 임무가 과중했고, 지원도 여의치 않았지만 히틀러는 분노에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다고 리스트가 못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이, 비록 중간에 막히기는 했지만 A 집단군은 2달만에 650km 가량을 전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늘어진 보급선과 연료 부족이 리스트의 탓은 아니었고 또한, 파울루스스탈린그라드에 틀어박혀 꼼짝도 못한 건 히틀러의 책임도 있었다. 게다가 붉은 군대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나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수도 독일군보다 더 많았고, 숙청으로 인해 망가졌던 본연의 위력을 되찾아가던 강군이었다. 당시 군 최고 핵심 인사이자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카이텔, 할더, 요들 등이 리스트를 옹호했지만 오히려 다들 목이 날아갈 뻔 했으며 결국 리스트는 면직되었고, 다시는 복귀하지 못 했다. 이 선택은 히틀러의 오판인데 리스트는 경력과 능력을 인정 받아 어느 정도 신망이 있던 사람이었다. 리스트의 후임인 클라이스트는 돌격 지향의 기갑지휘관으로 유명했지만, 리스트가 해임된지 5개월 뒤에 파울루스가 소련에게 항복하면서 6군이 소멸되었고 클라이스트는 무리한 진격 대신 후퇴를 선택했다.

리스트 개인의 정치적 성향은 문제가 많았다. 친 나치 인사였고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당시 나치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 폴란드에서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고, 발칸 반도에서는 대대적인 파르티잔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종신형을 받았다. 그런데 5년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출소했으니, 결국 죄값을 다 안 치른 셈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