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스마리네

kriegsmarine1.jpg
kwarflag.jpg
kriegsmarine-panzerschiffe.jpg
f9d121b2b19ea78469330dde9a725f5f.jpg

Kriegsmarine

1 개요

1935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 해군의 정식 명칭. 국어로 번역하면 전쟁(Krieg)해군(Marine)이라는 뜻이다. Krieg 뒤의 s는 합성명사에 붙이는 접미사.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한 독일 제국 황제해군(Kaiserliche Marine)을 계승한 전간기의 독일 국가해군(Reichsmarine)을 계승했다. 육군(Heer) 및 공군(Luftwaffe)과 함께 독일 국방군을 구성[1]했다.

2 구성

국방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OKW) 예하의 해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Marine;OKM)가 최선임 기관이었고, 이곳의 총수는 전쟁해군최고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Kriegsmarine)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Z계획이 제대로 구현되기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하는 바람에 해군력이 약소했으므로, 함대 단위의 체계[2]를 갖추지 못했다. 예하 부대 단위로 해역사령부(Marineoberkommando), 전단, 전대가 있었다.

해역사령부는 크릭스마리네의 최상급 전투 단위로, 담당하는 구역 역시 가장 넓었다. 사령관에는 상급대장이나 대장 계급의 제독이 맡았다.

주 해상작전은 전단 단위로 치뤄졌는데, 전단장((Flottenchef)이 여러 함정을 혼성 편제하여 그때그때 임무에 맞게 조직했다 해체하는 임시 조직인 경우가 많았다. 해군판 임무형 지휘체계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행정 조직에 더 가까운, 함종별로 묶인 전투전대들이 해역 사령부 예하에 배속되었는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어뢰정, 초계정 등 함종별로 묶어 관리하다가 작전시 차출되어 전단을 구성하는 식이었다.

해군 항공대공군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 장군의 욕망 때문에 사실상 보유하지 못했다.[3] 주요 항공기와 승무원, 정비원 등을 루프트바페에서 파견받는 형식으로 운영했는데, 해군에서 전군한 이들 위주로 파견대를 조직했다. 가장 많이 파견된 기체는 순양함 이상에 함재기로 실리는 정찰기인 Ar-196이었고, 지상 발진하여 유보트 등에게 호송선단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장거리 정찰기 Fw-200 등도 파견되었다.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에 탑재될 Bf-109 전투기 등도 공군 파견대로 조직되었으나, 사실상 건조가 중단된 이후는 지상에서 통상적인 공군 전투기 부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포는 육군과 해군이 분할해 맡았는데,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 프랑스 해안의 해안포 부대는 다수가 해군 산하였다.[4] 이들은 해안포 운용 뿐 아니라 해안 지역의 상륙에 대비한 지상전 및 경계 임무도 수행했으며, 해상 감시 레이더인 제타크트(Seetakt)도 운용했다. 고사포군단급 이상에만 배치해 그 이하는 공군 파견대에 의존한 육군과 달리, 주요 해군 기지는 자체 방공망을 갖추고 있어 공군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적지 않은 숫자의 해군 육전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부 상륙작전에서는 함 승조원을 차출해 투입했으나 점차 상설 육전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 크릭스마리네의 육전대는 2차대전 개전 당일인 1939년 9월 1일, 베스터플라테(Westerplatte) 전투 당시 구형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함에서 차출 편성된 해안 상륙 부대(Marinestoßtruppkompanie)를 단치히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시켰다. 또한 나르비크 전투에서도 육군 산악사단과 함께 최일선에서 상륙작전을 수행[5]한 이래 노르웨이 전역 내내 적지 않은 수가 지상전을 치렀으며,[6] 채널 제도 점령 때도 해군 육전대가 동원됐다. 1944년 9월엔 '동쪽 전나무 작전(Operation Tanne Ost)'이라는 이름으로 한 때 동맹국이었던 핀란드의 전략 요충지인 고틀랜드 섬 상륙 작전을 치렀으나 이는 실패했다. 1944년 6월 이후 공군 야전사단과 공수부대가 대폭 증강된 공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상실한 함정과 해군 기지 등의 잔류 인원과 지원 부대 축소 등을 통해 확보한 인력으로 해군사단(Marinedivision)을 편성해 육군의 지상전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어 1945년 1월에는 6개 사단 40개 연대 규모까지 커졌다. 상당수는 아예 육군으로 사단이 통째로 해군사단이란 이름만 남긴 채 전군되거나[7] 차출된 인원이 육군으로 전군되어 국민척탄병사단들에 배치되었다.

그 외에, 함정의 설계와 건조 등을 감독하는 페이퍼 쉽 제조부대인 조함단(Marineamt)이 OKM의 직할로 존재했다.

3 역대 최고사령관

사진이름원어명계급재직기간
에리히 요한 알베르트 레더Erich Johann Albert Raeder원수1928년 09월 24일 - 1943년 01월 30일
카를 되니츠Karl Dönitz원수1943년 01월 30일 - 1945년 05월 01일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Hans-Georg von Friedeburg상급대장1945년 5월 1일 - 1945년 5월 23일[8]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Walter Wilhelm Julius Warzecha상급대장1945년 5월 23일 - 1945년 7월 22일

4 역사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이후 독일군의 무장은 상당히 제한되었는데, 독일 해군은 오직 15,000명의 병력, 10,000톤 미만의 구식 전함 6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어뢰정 12척만 허용되었으며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소유 금지당했다.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는 대양해군은 고사하고 지역해군 노릇조차 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제약에 제한된 기준을 지키면서도 꿋꿋하게 새 전함을 진수해 냈는데 이것이 바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9] 그러나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따라 1935년 6월 18일 독일-영국 해군 조약을 통해 독일은 영국 해군의 수상함의 35%, 잠수함의 45%에 달하는 전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전함의 최대 배수량도 35000톤으로 증가하였다.[10] 또한 독일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위반하고 타국을 속이기 까지 해서 새 전함을 진수했는데 바로 비스마르크급 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 특히 영국 해군과 비교해서 크나큰 열세였다. 알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육군이나 육전대가 대규모로 지속적인 공격을 펼치려면 재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11]이에 따라 1939년 1월 독일은 새로운 해군 증강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Z계획이다. Z 계획에 완료되면 독일은 항공모함 4척, 전함 10척, 순함전함 12척 등 대 함대를 보유할 예정 이었으나...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결국 Z 계획은 휴지 조각이 돼 버리고 말았다.[12]

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군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독일군의 해상 수송이란 목표를 훌륭히 달성한 것이다.[13] 그러나 노르웨이 전역의 제해권 장악을 위해 벌어진 여러 차례의 해전 , 그 중 특히 제 2차 나르빅 해전에서 독일 해군의 악몽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워스파이트를 위시한 영국 왕립 해군은 독일 해군을 작살내 버렸고 결국 노르웨이 전역에서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이 격침당하거나 손실되었다. 이는 바다사자 작전 진행에 큰 차질을 가져왔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 작전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1941년 5월, 독일 해군의 최강, 최대의 수상함인 비스마르크가 비스마르크 추격전 끝에 격침당해버려 독일 해군은 더더욱 전면전을 기피하게 된다.

그러나 개전 초기 죄다 털려버린 수상함대와는 달리, 유보트를 필두로 한 잠수함대는 영국, 소련[14] 등으로 가는 수송선들을 대거 격침시키면서 연합군, 특히 영국의 보급과 경제 사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상함대는 1942년말 벌어진 바렌츠 해 해전에서 완전 망신을 당하고 전력의 다수를 상실했다. 이에 격분한 히틀러는 독일 해군의 대형함의 해체를 지시했고 이에 반발하여 에리히 레더 제독이 사임하였고, 후임인 카를 되니츠 제독의 설득 끝에 대형함 완전 해체 명령은 취소되었으나,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의 건조 중지를 명한다. 그러나 이때 살아남은 대형함인 샤른호르스트 티르피츠는 연합군의 북극 항로 견제를 위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해안에 배치 되었다가 샤른호르스트는 1943년 12월 26일 KGV 3번함 듀크 오브 요크에 의해 격침당했고, 티르피츠는 1944년 11월 12일 영국군의 공격레이드끝에 톨보이에 직격을 맞고 격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말부터 유보트에 의한 전술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는데, 이는 미국의 참전, 호위 항공모함의 개발로 인한 수송선들이 항공엄호를 받을 수 있게된 점, 기존의 폭뢰에 비해 명중률이 대폭 상승한 헤지호그 폭뢰의 개발 및 실전배치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군의 암호인 에니그마가 털려버린 것으로 이를 통해 연합군은 유보트의 모든 작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독일 해군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결국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을때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상륙을 혀용했으며 재해권 또한 빼앗겨 벼렸다. 전쟁말인 1945년 4월 에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은 자침을 해버렸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형함인 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 프린츠 오이겐은 전후 미국에게 넘어가 1946년 7월 비키니섬 핵실험에 사용되었다.

5 전력

5.1 함정

제2차 세계대전기의 크릭스마리네 함선
구축함구축함 1934, 구축함 1934A, 구축함 1936, 구축함 1936A "나르비크", 구축함 1936A (모프), 구축함 1936B, 구축함 1936C, 구축함 1938A/Ac, 구축함 1938B, 구축함 1942, 구축함 1942C, 구축함 1944, 구축함 1945
잠수함1급, 2급, 7급, 9급, 10급, 14급, 16급, 21급, 23급
경순양함엠덴급, 쾨니히스베르크급, 라이프치히급, M급
중순양함엔트워프 참고1, 참고2, 아드미랄 히퍼급, 도이칠란트급, D급, P급
경/개장/정규 항공모함자이들리츠, 그라프 체펠린, 클라이너(항공모함), 야드급(그나이제나우), 엘브급 항공모함, 에우로파, 데 그라스, 포츠담
항공순양함A II급, A III급, A IV급, A IIa급, E IV급, E V급
순양전함O급
전함도이칠란트급, 샤른호르스트급, 비스마르크급, H급
대형 어뢰정어뢰정 1923, 어뢰정 1924, 어뢰정 1935, 어뢰정 1937, 어뢰정 1939(엘빙급), 어뢰정 1940, 어뢰정 1941, 어뢰정 1944
취소선: 계획되었으나, 취소된 함선

{{틀:해상병기 둘러보기}}

6 주요 인물

6.1 고위 지휘관 및 행정가

  • 에리히 레더(1876.4.24 ~ 1960.11.6)
  • 카를 되니츠(1891.9.16 ~ 1980.12.24)
  •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1895.7.15 ~ 1945.5.23)
  •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1891.5.23 ~ 1956.8.3)
  • 알프레트 잘바에히터(1883.1.10 ~ 1945.12.6)
  • 빌헬름 마르샬(1886.9.30 ~ 1976.3.20)
  • 헤르만 보헴(1884.1.18 ~ 1972.4.11)
  • 빌헬름 카나리스(1887.1.1 ~ 1945.4.9)
  • 프리드리히 루게(1894.12.24 ~ 1985.7.3)
  • 발터 헤네케(1898.5.23 ~ 1984.1.1)
  • 테오도르 크란케(1893.3.30 ~ 1973.6.18)

6.2 함대 사령관

  • 롤프 칼스(1885.5.29 ~ 1945.4.24)
  • 오토 쉬니빈트(1887.12.14 ~ 1964.3.26)
  • 귄터 뤼첸스(1889.5.25 ~ 1941.5.27)
  • 오스카 쿠메츠(1891.7.21 ~ 1980.12.17)
  • 헬무트 브링크만(1895.3.12 ~ 1983.9.26)
  • 에리히 베이(1898.3.23 ~ 1943.12.26)
  • 프리드리히 본테(1896.10.19 ~ 1940.4.10)
  • 루돌프 페터젠(1905.5.15 ~ 1983.1.2)

6.3 수상함 함장

  • 한스 랑스도르프(1894.3.20 ~ 1939.12.20)
  • 에른스트 린데만(1894.3.28 ~ 1941.5.27)

6.4 U-보트 지휘관

  • 알브레히트 브란디(1914.6.20 ~ 1966.1.6)
  • 볼프강 류트(1913.10.15 ~ 1945.5.14)
  • 귄터 프린(1908.1.16 ~ 1941.3.7)
  • 오토 크레치머(1912.5.1 ~ 1998.8.5)
  • 헤르베르트 볼파르트(1915.6.5 ~ 1982.8.13)
  • 에리히 토프(1914.7.2 ~ 2005.12.26)
  • 하인츠 빌헬름 에크(1916.3.27 ~ 1945.11.30)
  • 한스 디트리히 폰 티센하우젠 남작(1913.2.22 ~ 2000.8.17)
  • 귄터 헤슬러(1909.6.14 ~ 1968.4.4)
  • 하랄트 겔하우스(1915.7.24 ~ 1997.12.2)

6.5 그 외

  •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1905.3.15 ~ 1944.8.10)
  • 볼프강 히르쉬펠트(1916.5.20 ~ 2005.4.24)
  • 오스카

7 평가

결론을 말하자면 크릭스마리네는 1차 대전의 영향으로 정규함대 다운 함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집권이후 재무장에 편승해서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력확충을 꾸몄지만, 영국과의 전쟁이 너무 빠르게 시작된 탓에 제대로 된 해상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력은 잠수함대 뿐이었다. 하지만 에니그마와 늑대때 전술을 통해 잠수함만으로 영국을 아사 직전까지 몰아넣는데 성공하였지만, 에니그마가 해독(그나마 독일군 조직 중 해군이 암호전에서 가장 오래 버텼다.)되고, 미국의 참전으로 갖은 무기와 수송선이 지원되기 시작하면서 잠수함대는 얻어터지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되니츠에게 약속하였던 U보트 300척 건조 약속조차 제대로 이행되지는 못했다. 이 300척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됐으면 미국이 영국으로 건너오는것 조차도 애먹었을 것이다.

수상함대의 경우에는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아카기를 참고해서 만든 그라프 체펠린 급이 있었지만, 루프트바페와의 알력으로 인해 기껏 진수된 항공모함은 목재 창고로만 쓰이다가 종전 후 이를 전리품으로 삼은 소련 해군의 사격표적이 돼서 파괴되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를 이용한 라인강 연습작전 등 영국 해군의 주력함 1척을 수상전에서 격침시킨 전적이 있으며물론 그 다음에 역으로 털렸지만,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틸피츠 등은 북해에 머무르면서 영국과 미국의 신경을 계속 살살 긁어놓게 만들어서 북해를 통해 독일 본토에 직접 상륙을 가할까 라고 고민하던 영, 미 연합군에게 다른방향을 고르게 하는 위엄을 선보이기도 하였다.[15]

최근 나치 친위대와 별 차이 없다는 식으로 재평가되는 독일 국방군 중, 여전히 가장 평이 좋은 군대이기도 하다. 제3제국해군선옥론 전반적으로 세계대전 중 해상에서의 전투는 종결 후 상호간에 적함 승조원도 구조하는 등 인도적인 모습을 보인 편이었고, 이는 각종 국제 조약들 및 관습법과 함께 뱃사람 특유의 국적을 뛰어넘는 유대감이 현장의 해군 장병들에도 작용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해군이 육공군에 비해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를 크게 줄이기도 했다.[16] 물론 전혀 잘못이 없는것은 아니어서 국제법을 위반하고 중립국 선박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켰었고 이로 인해서 사령관이었던 되니츠 제독이 유죄판결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는 했다. 크릭스마리네는 압도적인 우위하에 전쟁을 치른 육군과 공군에 비해 열세에서 시작했지만 이후로도 연합 해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가진 적이 없으며, 이런 가운데 연합국에게 큰 피해를 안겨주며 패전 때까지 항전했던 이미지 덕에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와 더불어, 독일 해군으로부터 잠수함 관련 노하우를 전달받으며 친분을 쌓은 점과, 크릭스마리네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미 해군의 영향으로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한국 해군 잠수함 승조원들 위주로 정보가 민간에 전달된 점으로 인해, 우호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 태평양 남서해역군 사령관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검사단의 질의에 대해 되니츠 제독의 전시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응답했는데, 이러한 자세가 미 해군에서 한국의 잠수함 요원들에게로, 다시 전사(戰史)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8 관련 항목

  1.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국방군은 육군만이 아니라 육해공군을 아우르는, 우리의 국군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이를 혼동하여, 많은 이들이 "독일군은 국방군(육군), 해군, 공군, SS로 구성됐다."같은 식의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다. SS는 행정적으로 국방군 예하는 아니었으나, OKW에서 무장SS 부대에 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있었다.
  2. 유일하게 함대 명칭을 썼던 곳은 발틱 함대 뿐이었다.
  3. 정찰기, 뇌격기, 소해전용 항공기, 수상기 등을 모은 5개의 연안비행대(Küstenfliegergruppen)를 보유하긴 했으나, 군수지원을 공군에서 받아야 했는데 협조가 원활하지 않았다.
  4.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진행된 해안은 육군의 해안포 부대가 관할했었다.
  5. 이후 나르비크 항내의 해전으로 상실한 구축함의 생존 승조원들도 합류했다.
  6. 노르웨이 전역 등으로 해군은 육군 산악부대와 꽤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노르웨이에서 나르비크 전투 이후 대거 육전부대로 투입된 해군 장병들은 육군 산악사단으로부터 그 전투력을 인정받아, 이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상징인 에델바이스 배지를 모자에 다는 것을 허용받기도 했다. 독일 육군 산악병과가 현 대한민국 육군특공여단에 해당하는 전투력 및 역할을 가졌던 걸 생각하면 꽤 대단한 일이다. 이후에도 산악사단은 그 높은 전투력으로 인해 상륙전시 선봉으로 많이 투입됐는데, 이 때 해군과 함께 구르면서(?) 관계가 긴밀해진 편이기도 하다.
  7. 제1/2 해군사단의 경우 초기에 해군소장이던 사단장이 후기엔 육군대령이 보직되었다.
  8. 임기 중 음독 자살했다.
  9. 도이칠란트급 장갑순양함은은 11인치 3연장 포탑 2기를 장착함으로 배수량 대비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했으나, 대응방어는 꿈도 못 꾼다는 단점이 있었다.
  10. 그러나 1939년 4월, 유럽에 긴장감이 맴돌면서 독일은 일방적으로 이 조약을 폐지했다.
  11. 실제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도 해군이 빈약해 바다사자 작전을 펼칠 수 없어 독일 해군은 손빨고 구경이나 하였고 대신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수행하였다.
  12. 때문에 많은 독일의 전함들이 페이퍼 플랜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H급 전함이 있다.
  13. 하지만 노르웨이 수비군의 항전으로 중순양함 블뤼허가 격침 당하는 등 손실도 있었다.
  14. 수송선들은 렌드리스를 위해 북극해를 통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15. 물론 이건 라인강 연습작전등 수상함대가 엄청난 실책들을 저질러서 히틀러의 미움을 사서 순양함 이상의 대형함들이 해체될 뻔한 걸 되니츠 제독이 필사적으로 사정해서 얻어낸 성과다. 직접적인 전적은 없지만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에 직접 상륙군이 처들어오는걸 막아낸 건 나름의 성과라고 볼 수 있겠다.
  16. 전후 크릭스마리네에서 전쟁 범죄로 총살된 이는 단 세 명이었다. 국제법을 무시하고 격침시킨 민간 상선의 표류중인 선원들을 학살한 IXD형 U-852의 함장 하인츠 빌헬름 에크 항해소령과 부장 아우구스트 호프만 항해대위, 그리고 군의관 발터 바이스페닉 의무중위가 그들이다. 이 외에 서부 해역 사령관 겸 비스마르크 지원 작전의 총지휘관을 지낸 해군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바에히터 제독 또한 전쟁 범죄자로 모스크바에 끌려가 처형되었으나, 잘바에히터 제독의 경우 무리한 처벌이었음이 인정되어 1994년에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