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의 18제후왕 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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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項羽)
(秦)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그는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1 개요

BC 206년, 당시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던 (楚)나라의 항우가 취한 일련의 분봉(分封) 조치. 통일 제국이었던 진이 멸망한 이후, 항우의 주도 아래 다시 중국을 찢어놓아 과거 전국시대와 같은 판세로 돌려놓은 행위로, 흡사 메테르니히 체제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초한대전에서 항우가 패망한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배경

(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패자가 된 (周)나라는, 그러나 BC 11세기의 무렵의 고대국가인 탓에 행정적인 한계로 직접적인 지배 통치 시스템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 주나라가 패권을 차지했다지만 중국은 대단히 넓었고 형만(荊蠻), 융적(戎狄)으로 불리우던 여타 이민족들의 세력은 상당했다.[1] 이에 주나라는 각종 제후들과 혈연관계를 맺어 관계를 유지했고, 제후들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봉지로 나아가 이민족을 물리치고 개발하여 세력을 일구었다. 이러한 봉건제(封建制)로 인해 당초 대단히 좁은 의미였던 중국은 보다 확장되는 범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제후들과 주나라의 혈연 관계는 대단히 약해졌고, 동주(東周) 시대에 이르러 주 왕실의 힘과 귄위도 떨어져 제후들을 감시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어 독립적인 행보를 이어간 제후들은 세력 확장과 서로간의 분쟁을 벌였으니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배경이었다.

그런데 BC 350년 진 효공(孝公)때 법가(法家) 사상가인 재상 상앙(商鞅)이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41개의 현으로 정리하면서 군현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 군현제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황제의 명령을 받은 관리들이 임지로 떠나 중앙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에 비해 황제의 의중을 정치에 좀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여섯 개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는 이사(李斯)의 계책을 받아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멸망한 전국시대 국가들의 유신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진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진나라는 지나친 법가정책과 잦은 토목공사, 대외원정으로 인해 이들의 반발심만 키워주게 되었다. 결국 진승·오광의 난으로 이러한 반발은 모두 표면화 되었고, 이내 (趙)·(燕)·초(楚)·(魏)·(齊)나라는 그 유신들의 손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결국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명장 장한(章邯) 마저 거록대전에서 부장 왕리가 항우에게 패배함에 따라 항복하게 되었고, 이 시점에서 진나라의 멸망은 확정된 셈이었다. 당초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패공(沛公) 유방이 먼저 입성했으나, 거록대전의 승리로 거의 모든 중국의 제후들을 복종시킨 항우는 신안대학살 이후 홍문연에서 힘으로 유방을 굴복시키고 입성하여 함양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불태워 진나라의 잔재를 쓸어버렸다.

이후 항우는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이고, "의제는 바지사장이니아무것도 공이 없으니, 내가 땅을 나누어주겠다"고 선포하고는, 군현제로 정비되었던 통일 진나라의 영토를 다시 분열시켜 제후들에게 나누어주는 분봉 조치를 취하였다.

3 제후 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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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나라 영역
    • 한왕(漢王) 유방(劉邦): 파(巴)·촉(蜀)·한중(漢中), 서울은 남정(南鄭)
    • 옹왕(雍王) 장한(章邯): 함양 이서, 서울은 폐구(지금의 싱핑 시 소재)
    •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함양 동쪽에서 황하 사이, 서울은 약양
    • 적왕(翟王) 동예(董翳): 상군(上郡) 전역, 서울은 고노(지금의 옌안 시 소재)

패공 유방은 거병하여 항량(項梁)을 따랐고, 이후 항우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며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항량 사후 군대를 이끌고 서진하여 가장 먼저 함양에 입성하는 공을 세웠다. 유방은 지금의 사천성 지방인 파와 촉, 그리고 한중(漢中)[2]을 영토로 가지게 되었고, 한중에서 왕호를 따와 한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방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억울한 조치였는데, 당초 초 회왕은 "관중에 가장 입성하는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기에, 항우와 사마앙(司馬卬) 같은 경쟁자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에 입성하고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은 유방은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보여준 관대한 조치로 인해 진나라 사람들에게도 가장 인망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항우와 범증(范增)은 유방을 대단히 견제하였기에 그에게 관중이라는 좋은 지역을 주지 않고, 대신 당시만 해도 천하의 벽지로 여겨졌던 파촉에 처박아 버린 것이다.[3] 굳이 파촉을 준 다른 이유는 관중이란 말이 전국시대 옛 육국을 제외한 진나라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고, 파촉은 이 범주에는 들어갔기 때문이다. 항우: 파촉도 관중이니까 나 약속 안 깼다 유방: 그 관중이 이 관중이냐 그나마 파촉의 입구 격인 한중을 따낸 것도 장량을 통해 항우의 숙부인 항백을 움직였기 때문… 덤으로 항우는 유방의 10만 군사 중 3만 명만 파촉으로 따라갈 수 있게 조치하였다. 그나마도 파촉에 봉해지자 유방의 부하 가운데 도망치는 사람이 많았다.[4]

나머지 셋은 진나라의 항복한 장수 출신으로, 관중(關中) 지역을 세 땅으로 나누어 받게 되었다. 장한은 항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사마흔은 본래 항량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동예는 장한을 설득해 항복하게 했기 때문에 항우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이 세 제후국을 일컬어 삼진(三秦)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신안대학살 당시 진나라 군이 살해당했는데 자기들만 살아남아 진나라 사람들에게 인식이 좋지가 못했다. 또한 이들은 항우가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서 세워놓은 첨병(尖兵)이기도 했다.

  • 조나라 영역
    • 대왕(代王) 조헐(趙歇)
    •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서울은 지금의 하북성 형태시(邢台市) 서남 부근인 양국(襄國)

조헐은 본래 조나라 왕이었으나 대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장이는 본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사(名士)였고, 항우를 도와 관중에 입성하는 공을 세워 상산왕이 되었다.

  • 연나라 영역
    • 요동왕(遼東王) 한광(韓廣)
    • 연왕(燕王) 장도(臧荼): 서울은 계(薊)

연나라 왕이었던 한광은 이 조치로 인해 동북 구석의 요동으로 밀려날 신세가 되었다. 장도는 거록대전에 참여하여 초군을 돕고, 이후 관중까지 진입하는 동안 항우와 함께한 공으로 연왕이 되었다.

  • 제나라 영역
    • 교동왕(膠東王) 전시(田市)
    • 제왕(齊王) 전도(田都): 서울은 임치(臨淄)
    •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5]: 서울은 박양(博陽)

제나라 왕이었던 전시는 이 조치로 인해 교동왕이 되었다. 전도와 전안은 거록대전과 이후 관중 입성까지 항우를 도왔으며, 전안은 제북(濟北)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 위나라 영역
    •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 하동(河東) 일대, 서울은 평양(平陽, 초기 전국시대 한나라의 도읍). 전국시대 후기 위나라의 도읍인 대량과 그 동쪽 지역은 서초에 뜯겼다.
    •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서울은 조가(朝歌)

위표는 위나라 지역의 20여 성을 장악하여 항우에게 위왕으로 임명되었다가 항우가 관중으로 진입할 당시 약삭빠르게 함께 해서 서위왕이 될 수 있었다. 사마앙은 하내(河內)를 평정한 공을 인정받았다.

  • 한나라 영역
    • 한왕(韓王) 한성(韓成): 서울은 양책(陽翟)
    •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서울은 낙양(洛陽)

한나라의 왕이었던 한성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신양은 본래 장이의 부하였는데, 하남군(河南郡)에 있을 때 초나라 군을 하상(河上)에서 맞이했다 하여 공을 인정받았다. 다만 원래 본거지인 하구에서는 떨어뜨려놨다.

  • 초나라 영역
    •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지금의 안휘성 경내의 회하(淮河) 이남과 공강(贛江) 유역 이동 및 강서성 대부분, 서울은 육(六)
    •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서울은 주(邾)
    • 임강왕(臨江王) 공오(共傲): 서울은 강릉(江陵)
    •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 9개의 군을 봉지로 삼았는데, 이설이 있지만 사수군(泗水郡)·탕군(碭郡)·설군(薛郡)·동해군(東海郡)·임회군(臨淮郡)·팽성(彭城)·광릉군(廣陵郡)·회계군(會稽郡)·장군(鄣郡) 등으로 여겨진다. 서울은 팽성

영포의 공은 으뜸이었으며, 오예는 백월(百越)의 병사들을 이끌고 항우를 도왔고 관중에 입성할 때도 함께였다. 공오는 남군(南郡)을 공격할때 공을 세웠기에 이러한 점들이 인정되어 왕이 되었다.

그 밖에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남피(南皮) 주변의 3개 현을 봉읍으로 받았고, 파군(鄱君)의 장수 매현(梅鋗)은 10만 호의 제후가 되었다.

4 고찰

사실 항우의 제후왕 분봉은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하고 있다. 소위 '하나의 중국'을 추종하는 이념에서 항우가 이 때 봉건제로 돌아간 것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으나, 당시 상황에서 진의 군현제는 이미 심각하게 붕괴했으므로 '실패한 정책'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진나라를 멸망시킨 신생 초나라는 군현제를 유지할 의지는 둘째쳐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전란으로 전 중원 각지에 신생 육국을 비롯한 군소 세력이 이미 자리잡은 상황이었으며, 항우가 아무리 군신의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신생 초나라의 국력은 타국을 모두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이 상황에서 초나라가 모든 걸 먹는다는 군현제 실행은 18로 제후왕 분봉 이상의 갈등을 불러올 것이다. 이후 천하를 통일한 한 제국에서도 중앙의 경제력이 크게 성장한 한무제 시대에 가서야 봉건제의 잔재를 털어낼 수 있었다.

또한 장량의 젓가락 설교에서 보다시피, 당시 영웅들 밑에 모인 부하들은 다들 자신이 '왕'이나 '제후' 자리 쯤은 먹을 것을 기대하고 그들을 따라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중앙의 경제적 능력이 미약한 당시로서는 땅을 떼어줘서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것만이 부하들의 보상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논공행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봉건제로의 복귀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의지는 둘째쳐도 항우에게 이를 거스를 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항우를 따라온 제후 연합군의 각 장수들과 본국의 대립이었다. 본국에서 이들에게 조나라를 구원하게 한 목적은 진나라의 예봉을 꺾고 진나라와 자국의 병립을 꾀하는 것이지 진나라의 멸망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구원군의 장수들은 항우와 같이 입관하고 진나라를 멸하면서 그에 수반되는 '분봉'을 꿈꾸었다. 제나라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해서, 제나라의 구원군 대장 전도는 사실 조나라를 구원할 생각이 아예 없던 재상 전영(田榮)의 뜻에 반기를 들고 조나라를 구원하러 나간 것이었다.

당시 상황상 결국 분봉은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올리게 될 여지만 남겨놓았던 것. 오히려 혼란의 씨앗만 잉태한 셈이었다.

5 문제점

천하의 질서를 다시 잡기 위해서 항우가 분봉을 고려해야 할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 재건에 성공한 여섯 나라: 진나라가 육국의 종묘사직을 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이들이 여섯 제후국을 다시 세워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도 각 지역 유지들의 명분 쌓기였다. 제나라에서 근본을 모르는 자칭 왕족 전담이 죽은 후, 정통성 있는 제나라 마지막 왕 건의 동생 전가가 제나라 본국에서 옹립되었으나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전담 일족이 전가를 무찔러 내쫓은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공적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고 본국에서 이탈해 항우를 따라온 장수들: 다시 말하지만 당시 군벌들은 자신이 공적을 세우면 왕후(王侯)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진 제국의 붕괴로 전 중국의 경제와 중앙통제가 완전히 박살난 현실에서 봉국을 떼주는 것 말고 따로 상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
  • 나라까지는 아니지만 뿌리를 박는데는 성공한 군벌들: 이런 세력들은 어느 정도 달래서 회유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전도·전안은 항우의 입관에 협력했고, 팽월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 항우와는 별도의 경로로 입관을 시도한 제후들: 여기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항우가 그토록 꺼렸던 유방. 그 외에도 사마앙·공오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 마지막으로는 항우의 직속 부하들이 있겠는데, 이들 중에 왕으로 봉해진 것은 경포뿐이었다.

항우는 이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항우가 내린 결론은 사실 어느 정도는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이 있었고, 또한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것이었다. 항우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면서, 동시에 과거 정통 육국의 후예에 대해서는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본거지에서 쫓아내고 한지로 몰아내며 영토를 깎아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정통성이 없고 자신에게 공적도 세우지 않은 군소 군벌들은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이는 방향성이 불분명한 결론이었다. 확실하게 명분론에 따라서 옛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며, 실리론에 따라서 항우의 부하들이 전국의 지배를 하겠다고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각지에 토착 군벌 세력이 자리잡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모두가 다 항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분봉 조치 자체의 영향을 본다면, 분봉 조치는 결과적으로 엉망이었다.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의 비난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항우가 제후들을 분봉한 기준은 순전히 자신과 친하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더 챙겨주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기도 하고, 항우 자신도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챙겨주는 과정에서 정통성 있는 육국의 제후들은 영토가 반토막나는 등의 피해를 입었고,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하 장수들이 감복해서 항우에게 충성을 바칠 정도로 정도로 통 크게 쏴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 이는 처음에는 잠재적인 불만을, 나중에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삼진을 설치했지만 삼진의 군주들은 진나라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는 대상이었으며, 항우가 진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의 사직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젠 진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육국과 같은 '망국'으로 여기게 되었다.
  • 어쨌건 정통성은 있었던 옛 육국의 왕들을 한구석에 처박고 그 자리에 신하들을 왕으로 세워 기존세력과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 장이는 상산왕이 되고 장이의 부하였던 신양도 왕이 되었는데, 조나라의 대장군이자 장이와 비슷한 명망을 가지고 있던 진여는 터무니없는 대우를 받아 크게 분노했다.
  • 팽월(彭越)은 나름대로 세력이 있었지만, 항우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논공행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팽월이 이로 인해 불만을 가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오예의 지휘 아래 싸운 백월 역시 철저하게 백안시당했다.
  • 제나라의 일개 장수였던 전도는 제나라 왕이 되고 본래 왕이었던 전시는 교동왕으로 쫒겨났는데, 전시를 앞에 세우고 제나라의 실세 노릇을 하던 전영은 엄청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6 결과

결국 제나라의 전영이 "혼돈! 파괴! 망가!"를 외치며 각지에 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항우를 편들어서 제나라에서 왕 자리를 인정받은 전도와 전안은 사실 항우 편에 선 이유부터가 전담 일족을 반대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고, 전영과 원래부터 사이가 나쁜 항우는 이들을 후원하여 전영을 견제하려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담 일족의 힘은 항우가 예상한 것을 넘는 것이었다. 전영은 먼저 제나라 왕으로 임명된 전도를 두들겨 쫓아버리고[6]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겁을 먹어 달아난 전시까지 살해한 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었다.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 제북왕 전안까지 살해해버린 뒤, 항우에 대해 불만이 누구보다 많은 팽월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헬게이트를 열도록 사주했는데, 초한대전 당시 팽월이 항우를 엄청나게 괴롭힌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또한 장이는 왕이 되었는데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해 불만이 큰 진여도 전영의 지원을 받아 장이를 날려버렸고, 장이는 이 때문에 유방에게 합류하며 항우가 세운 천하는 개판 오분 전의 상황이 되었다. 항우는 전영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진하여 전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제나라 전역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7].

한편 파촉에 처박아놓았던 유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를 외치며 관중을 향해 진군했고, 관중의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진나라의 영역을 쉽게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8] 한신 등을 앞세운 유방은 그대로 동진하여 초나라의 핵심지역인 팽성까지 장악해버렸다.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촉에 처박아 놓고 유방을 감시하기 위해 삼진을 설치했지만, 정작 유방이 동진할 당시 항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항우는 이후 팽성대전에서 한나라 군대를 대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기반을 확실하게 굳혀놓은 한군은 한두 번의 패배로 괴멸되지 않았다.[9] 결과적으로 항우의 분봉은 천하의 대란을 단 1년도 막지 못했다.

초한대전 중 역이기의 제안을 논파한 장량으로 인해 봉건제와 군현제도 사이에서 길을 찾은 유방은, 대전 이후 군·국제도 하에서 위협적인 이성왕들을 숙청하여 개국 초기의 위협을 분쇄하고 군현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남은 동성왕들의 위협은 한경제 시절 오초칠국의 난에서 분쇄되었고, 한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제안을 바탕으로 추은의 영(推恩-令)을 내려 제후들의 세력에 결정적인 최후의 타격을 날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인해 전한(西漢)은 마침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문경지치로 얻은 경제적 능력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서방의 로마와 맞먹는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군현제도는 이후 2000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중국을 지탱하는 거대한 하나의 축으로 남게 되었다.
  1. 목야대전에서 주나라에 붙었던 촉(蜀)·강(羌)도 이민족이었다.
  2. 후대 촉한의 영토와 거의 동일하다. 유비의 작호인 한중왕(漢中王)은 명백하게 이때 유방의 칭호였던 한왕을 흉내낸 것이다.
  3. 상술한 것처럼 원래 파와 촉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아예 중국이 아니라 이민족의 땅으로 취급되었고, 전국시대 중기에 진(秦)나라에 양국이 정복된 뒤에야 겨우 중국의 판도에 편입된 것이다. 즉, 당시는 아직 중화 문명권인지도 애매한 지역이었다(그나마 진나라 치세에 개발이 잘 되어서 생산력은 상당히 풍부했다).
  4. 당연하지만 유방의 동료들은 원래 패(沛) 땅 출신이다. 그걸 중국 정반대쪽 끝에 처박아놨으니(...).
  5.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
  6. 전도는 부임도 못하고 초나라로 도망쳐버렸다.
  7. 항우의 지나친 학살이 큰 원인이었다.
  8. 최선의 대안은 항우 자신이 진나라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자영을 죽이지 않거나 진나라 왕족 중 누군가에게 약간의 땅을 다스리게 해서 진나라를 허수아비 상태라도 존속시켰다면 (명분이 희석되었을 유방에게) 진나라 영역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9. 진나라는 괜히 전국시대를 끝낸 국가가 아니며 당시 인구와 경제 면에서 최강을 자랑하였는데 그게 전부 유방의 손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