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륜

서진의 역대 황제
2대 혜황제 사마충비정통 조왕 사마륜(복위) 2대 혜황제 사마충
시호없음
연호건시(建始, 301년)
작위낭야왕(琅邪王) → 조왕(趙王)
사마(司馬)
륜(倫)
자이(子彝)
생몰기간? ~ 301년 3월 9일
재위기간301년

1 개요

서진의 황족. 자는 자이(子彝). 사마의의 9남(막내 아들)으로 인 백부인 소생이며, 사마소의 이복동생이다. 처음에 낭야왕(琅邪王)으로 봉해지고 뒤에 조왕(趙王)으로 개봉(改封)된다.

233년 이후 ~ 240년대 사이 출생하였을 것이다. 즉 사망 당시의 나이는 적어도 50대 중후반, 많으면 60대가 된다.

요약하면 가남풍은 죽였지만 황제를 탐내다가 잠깐 즉위 후 역관광. 사실상 팔왕의 난을 본격적으로 열어제낀 인물이다.

굳이 재위를 따지면 301년 음력 1월 9일 ~ 음력 3월 6일. 2개월도 못되게 재위했다.

그나마도 손수라는 모사꾼 부하에게 휘둘린 인물. 잘 보면 이게 사마륜 항목인지 손수 항목인지 모를 지경이다.

2 생애

265년에 사마염이 즉위하여 서진을 개창하자 삼촌으로 낭야왕이 되었다가 277년에 조왕이 되어 독업성수사가 되어 업군을 지키는 일을 감독했다.

296년에 서쪽에서 저족과 강족이 일어나자 사마륜의 총신인 손수와 옹주자사 혜계가 군사적인 문제로 다투면서 구양견이 사마륜의 죄악을 표문에 올렸다. 그러자 조정에서 사마륜이 관우 지역을 소란스럽게 한다고 여겨 소환되어 거기장군이 되었다.

이때 바로 위 이복형(8남) 사마융이 빈자리가 된 정서대장군에 대신 임명되어 도독옹량이주제군사가 되었다. 이에 해계, 해결 등이 손수를 죽여 저족강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한다라고 청했고, 장화가 이를 보고하면서 시행여부를 묻자 사마융이 이를 허락했다. 사실상 손수의 목숨은 죽은 목숨이 되었지만, 신염이 저족과 강족이 스스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손수의 죄가 아니라고 설득해 손수를 죽이는 것을 거뒀다.

이렇게 손수가 위기를 면하자 그의 계책에 따라 곽씨, 가씨 등과 깊이 교제했으며, 혜제(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의 신임을 받게 되자 녹상서사와 상서령의 직책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장화, 배외 등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손수와 함께 그들을 원망했다.

300년에 우장군을 지내면서 병권을 잡고 가남풍의 무고로 태자 사마휼이 폐위될 때 우위독 사마, 상장독 허초, 전중중랑 사의 등이 사마휼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마륜의 힘을 빌리려고 했는데, 손수의 의견에 따라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사마휼이 살해되자 군사를 동원해 가남풍을 몰아냈다. 상서 화욱을 시켜 가남풍을 금용성에 유폐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스스로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 상국, 시중이 되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병권을 장악했다.

4월 9일에 조서를 고쳐 상서 유홍을 파견해 금설주[1]를 가지고 가남풍을 금용성에서 죽게 했으며, 이 때 제왕 사마경 등의 황족과 손을 잡았다. 또한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던 장화, 배외, 해계, 해결 등을 주살했다.

사마륜은 용렬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손수의 통제를 받았고, 부족한 인망을 얻기 위해 명성과 덕망이 있는 자들을 뽑았으며, 5월 9일에 행태손태부가 되었다.

이때 회남왕 사마윤이 몰래 자신을 토벌하려는 것을 알고 꺼려 가을 8월에 명예직인 태위로 임명해 실권인 지방력과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사마윤이 알고 칭병하며 조서를 거부하자 이를 계기로 역모로 몰아 죽이려다가 결국 사마윤의 군사의 공격을 받게 된다. 사마윤에게 낙양 상국부를 포위당하면서 여러 번 싸웠지만 패하자 궁노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주서사마 휴비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며, 여음왕 사마건의 설득에 넘어간 친위대의 사마복호 복윤이 혜제의 조서로 속여 사마윤을 살해하고 그 군사를 격파하자 살아남았다. 팔왕의 난 최초이자 유일의 방어전 성공 사례(...). 왜 좋은 황족은 죽는 것인가[2]

사마윤의 동생인 오왕 사마안을 죽이려고 했지만 광록대부 부지가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치라고 간언하자 죽이지 않는 대신 작위를 깎아 빈도현왕으로 삼았으며, 손수가 혜제(사마충)에게 구석을 더해줄 것을 논의하자 사마륜은 구석을 받았다.

301년 정월에 산기상시인 의양왕 사마위, 상서령 만분 등을 시켜 선양할 준비를 마련했다가 9일에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건시(建始)라고 고쳤으며, 혜제를 폐위해 금용성에 살게 했다가 10일에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높이면서 금용성을 영창궁으로 고쳤다. 황태손을 폐위해 복양왕으로 삼고 아들 사마과를 태자로 삼으면서 다른 아들이나 친척들을 왕으로 임명했으며, 그 밖의 부하들도 관직을 승진시켰다.

17일에 손수와 사이가 나빴던 위장군 장림사마과에게 손수가 권력을 전횡하니 그를 죽여야 한다는 편지를 아들 사마과에게 보내서 사마과가 이를 사마륜에게 보여줬는데, 사마륜이 다시 손수에게 보여주어 장림과 그 삼족을 죽게 만들었다. 즉위 한 지 7일만에 이런 막장이라니

3월에 제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등과 연합해 공격하자 패했으며, 결국 혜제 사마충이 2개월 만에 황제로 복귀했다. 3월 7일에 금용성에 유폐되었다가 9일에 양왕 사마융이 사마륜 부자는 역적이라 죽여야 한다는 표문을 올리자 13일에 아들들과 함께 주살되었다. 그래서 묘호고 시호고 없다.
  1. 황금 가루를 에 탄 독주이다.
  2. 그래서 사마윤은 팔왕의 난의 팔왕에도 들지도 못한다.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