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경

1 중국 서진의 인물, 사마유의 아들, 제왕(齊王)

司馬冏
(?~302)

서진의 황족으로 제헌왕(齊獻王) 사마유의 아들이자 무제 사마염의 조카. 는 경치(景治)이다. 시호는 무민(武閔) 모두 더하여 제무민왕(齊武閔王)이다.

사마유의 나이로 따져보면 사마유가 스물이 되는 268년 전후에 출생한 것인데 사마유가 죽은 당시에는 15세 전후로 대단히 어린 나이가 된다. 사망 당시도 마흔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삶을 요약하면 어려서부터 재능은 출중했으나 집권 이후 개판이 되어 팔왕의 난의 다섯 번째(정확히는 여섯 번째) 훙서자가 되었다.

아버지 사마유가 갑자기 사망하자 전의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백부 사마염에게 무고하여 전의들이 피살되기도 했다. 3남이나 적자 노릇을 한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왕을 계승했는데 원강 연간(291~299)에 참기상시가 되어 좌장군, 익군교위를 겸했다.

300년 조왕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폐위시키고 그 일족을 멸했다. 그 다음에는 가남풍의 정권의 중추였던 장화 등을 비롯해 그들의 일족도 같이 멸했다. 그런데 사마륜이 301년 정월 혜제 사마충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사촌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사마륜을 죽였다.

혜제를 복위시킨 공으로 보정이 되어 대권을 손에 넣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던 데다가 큰 공을 세워 인망이 높았는데... 앞서 숙부였던 평원왕 사마간이 사마륜 꼴 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 적중했다. 권력을 잡자 토목 공사를 일삼고 사치에 빠져 정치를 개판으로 하다가 큰 반발을 샀고, 결국 이를 노리던 사마영 무리에 의해 공격받아 피살당하고 동시에 멸족되었다.

2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 사마의의 5남, 청혜정후

司馬京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자좌(子佐). 사마의의 5남(혹은 4남이나 6남)으로 복귀비 소생이다.

사마경이 진나라의 건국 시기인 265년에 연왕에 추증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서진 건국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대략 220년대 중후반에서 231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제무민왕 사마경의 작은 할아버지뻘이 된다.

위나라조방(애제)의 시대에 공자로서 작위를 하사받았지만 14살에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사성교위로 추증되고 작위는 청혜정후(清惠亭侯)로 봉해졌다. 어린 나이에 사망해 아들이 없었기에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기가 그의 후사를 계승했다.

진왕 사마소의 아들들이 대부분 요절한 경우가 많았던 반면에 아버지 사마의의 아들들은 대부분 요절하지 않았는데, 사마의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요절해서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자신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지만 요절한 이유 때문에 정작 자신보다는 후사로 계승한 사마기에 대한 내용이 더 많다.(...)

3 서진의 황족, 성양회왕

司馬景
(? ~ 270)

자는 경도(景度). 사마염의 아들.

사마조가 어려서 총명했지만 일찍 죽어 사마소왕원희가 사마조를 불쌍히 여겼으며, 왕원희가 사마조의 후사를 세우려 했고 그 뜻을 마음에 두어 생각하는 정과 회포로 사마경이 사마조의 후사를 계승해 269년에 성양왕이 되었다.

그러나 270년에 사망해 사마조와 똑같이 일찍 죽었고 사마하가 성양왕이 되기 이전까지는 성양왕이 된 황족들은 모두 장성하기 전에 사망했으며, 나이를 알 수 없기에 생년은 알 수 없지만 왕에 임명된 시기를 고려하면 269년 또는 269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관습에는 조상의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피휘가 있는데, 사마경은 일찍 죽어서 피휘를 따르지 않는지 사마부의 아들인 사마경도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