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孫瑞
(129년 ~ 195년)
1 소개
후한 말의 관료. 자는 군영(君榮) 또는 군책(君策).
부풍군 평릉현 사람으로 대대로 학문을 하는 집안으로 어려서 가업을 이어 널리 사물에 통달해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벼슬해서 높은 직위를 역임했다. 192년 4월에 상서복야를 지내면서 사도 왕윤, 사례교위 황완, 사례교위 양찬, 동탁의 부하 여포와 공모해 동탁을 주살했으며, 국삼로[1]가 되면서 정사 동탁전의 주석인 헌제기에서는 대사농, 후한서에는 광록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매번 삼공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늘 후보에 올라 태위 주충, 황보숭, 사도 순우가, 조온, 사공 양표, 장희 등이 공이 될 때 모두 사손서에게 양보하려고 했으며, 삼보의 난으로 이각, 곽사 등이 정권을 잡을 때 왕윤이 동탁을 토벌한 공로를 전부 자신에게 돌리면서 사손서는 공이 있어도 열후에 봉해지지 않아 화를 피하면서 사마광은 이 일에 대해 지혜롭다고 평가했다.
이각, 곽사 등이 서로 내분을 일으키면서 헌제가 그들을 피해 달아났다가 이각, 곽사가 화해해 다시 추격했는데, 홍농의 조양에서 따라붙자 양봉과 백파적 등이 맞섰지만 패했다. 이 때 상서령을 지내던 사손서는 이각, 곽사가 이끄는 군사들이 공경 백관들을 죽이고 궁인들을 약탈할 때 죽임을 당했다.
2 창작물에서
국내에 번역되는 판본 중에는(정확히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 직위가 복야사, 이름이 손서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성씨에 들어가는 선비 사자를 변호사할때 직책을 나타내는 사자로 착각한 오류로 여겨진다. 복야할때 야자는 사실 '射'자로 이때는 야자로 읽는다. 또한 상서복야의 준말로 조정의 실무를 보던 상서대 차관으로 품계가 1000석인 탓에 상서령과 모든게 같으니 현재에 대입하면 부상서령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상서령이 없으면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창천항로에서 동탁이 죽은 후에 왕윤이 사주한 무리들이 여포를 죽일 시각을 왕윤에게 보고하면서 왕윤이 옥에 갇힌 채옹을 경수형에 처하는데, 채옹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을 기록할 수 있도록 부탁했지만 살려두면 우리들을 비방한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사손서는 이런 왕윤을 보고 예전에 환관 장양을 탄핵했던 청렴한 기골의 사람이 아니라 후세에 남을 자신의 이름에 연연해 이를 위해서라면 역사의 그늘에 봉인시키려는 모사꾼에 지나지 않는다며 실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