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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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光
1019-1086

유안세[1]: 수만 개의 한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가 무엇입니까? 일생 살아가면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한 글자를 골라 주십시오.

사마광: 그것은 (정성 성)이네.
유안세: 誠이란 무엇입니까?
사마광: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그 첫걸음(從不妄語始)이지.

중국 북송 대의 유학자, 정치가 및 역사가. 자치통감의 편저자로 유명하다. 자는 군실 (君實). 시호는 문정으로 온국공으로 봉해져 사마온공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먼 조상 사마부(사마랑, 사마의의 동생)는 하내군 온현 출신이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이어 한림학사, 어사중승이 되어 정계의 요직을 거치던 차에 송신종이 즉위해 왕안석을 중용하여 일련의 개혁정책을 담은 신법을 시행하려 했다. 당초에는 개혁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온건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신법이 관료들의 기득권까지 개혁해 정계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추밀원을 중심으로 신법 반대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어 결국 왕안석의 최대 정적으로 입지를 굳혔다.

신법을 추진하려는 송신종의 의향이 강경했기에 결국 개봉을 떠나 낙양에 은거하며 자치통감 편찬에 노력해 1084년 마침내 완성했다. 정치적인 견해는 달랐으나 학자로서의 입지를 송신종 또한 매우 존중했기에 자치통감 편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송신종이 붕어하고 송철종이 즉위해 황태후 고씨가 섭정하게 되자 정계에 복귀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신법 타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재상이 된지 불과 8개월만에 병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생의 맞수인 왕안석과 같은 해에 죽었다. 나이는 왕안석이 두살 어리다. 신법 철폐정책을 신법 추진 이상으로 급격하게 밀고 나갔기 때문에 소식 등 함께 신법을 반대하는 견해였던 동료들과도 크게 마찰을 빚었다. 특히 노역을 금납화하는 모역법(면역법)에 대해서였다. 소식이 직선적이긴 했지만 사마광 역시 고집불통이라 소식(소동파)는 궐(정사당)을 나가면서 "사마우(司馬牛: 사마 황소고집)[2]! 사마우"라며 절규했다고 한다.

이후 고태후가 죽자(1093년) 송철종은 신법당을 도로 복귀시켰으며, 그에 따라 원우 연간(철종 연간)에 득세했던 원우당(구법당)은 크게 몰락한다. 사마광 역시 황제가 친히 내린 비문을 부수고 후손들이 삭탈유배를 떠나는 치욕을 겪는다. 부관참시까지 거론되었으나 이것만큼은 면했다. 하지만 송철종이 또 급서하면서(1100년) 동생 송휘종이 즉위하고 향태후는 다시 구법당을 복권시켰다. 이와 같이, 왕안석(신법당)과 사마광(구법당) 사후에 계속 빚어진 신법당과 구법당의 진흙탕 싸움은 북송 멸망때까지 계속되어 국력 약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대에 이미 매우 덕망높은 인물로 알려졌으며, 보수 유학자들로부터는 공명정대한 인물로 대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측에서는 반동적인 정치가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다만 재상으로 있던 기간이 겨우 8개월이었기 때문에 신법을 대신할 정책을 구상하다가 끝내 실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왕안석의 신법을 매우 반대했지만 실제로 왕안석과 사마광 개인 대 개인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 편지를 보면 "내가 그대의 벗으로서 하는 말"이라고 적혀 있으며 매우 허심탄회하게 왕안석의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나라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대의 목적은 좋았고, 나와 그대의 목적은 같지만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밝혔다. 즉, 이들 둘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왕안석 역시 사마광이 사심 없는 인물임은 인정했기 때문에 답장에 사마광의 비판을 하나하나 논박하면서 "사사로운 면에서는 나 역시 그대를 벗으로 생각하나, 국사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각자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오"라고 적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점이 워낙 조정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사마광도 왕안석을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정에서 더욱 강력하게 왕안석의 개혁안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의 기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어릴 때 친구들과 놀다가 한 친구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정원에 세워둔 인공 돌산 아래 물항아리에 빠졌다. 모두 멘붕해서 울고불고 왔다갔다 방황하는 등 우왕좌왕했지만 사마광은 침착하게 짱돌을 찾아들고 물항아리 아래를 깨뜨려 구멍을 내서 물을 빼고 친구를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5 살 때 누이와 호두를 먹고 있었는데 호두 까기가 쉽지 않았다. 호두를 까지 못한 누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종이 호두를 뜨거운 물에 불려 까주었다. 얼마 후에 돌아온 누이는 사마광에게 어떻게 호두를 깠냐고 물었고 사마광은 자기가 호두를 여종이 했던 방법으로 깠다고 거짓말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사마광의 아버지는 사마광을 불러 거짓말한 죄를 엄히 혼내고 성실과 정직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 때부터 사마광은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목 맨 위에 있는 유안세와의 대화도 이걸 보여주는 예. 7 살 때는 좌씨춘추 강의를 듣고 집에 와서 들었던 내용을 정확하게 강의했다고 할 정도로 수재였다.

선조가 사마의의 동생이자 삼국지의 인물 중 안평왕 사마부로 무려 93세까지 살아서 장수를 누렸다. 현대인들의 잘못된 이해로 인해 자치통감에서 그가 위정통론을 주장했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치통감은 연도만 조위-서진의 연도를 사용할 뿐 어느 정통론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이른바 '무통설'. 그가 사마씨의 후손이란걸 감안하면 여러모로 공정한 해석인 셈이다.

조선에선 엄청나게 받들어졌는데, 정조 때 경연에서 "왕안석이랑 사마광이랑 비교해서 인품은 물라도 능력은 왕안석이 결코 사마광보다 못하진 않았다." 라고 했더니 신하들이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오래 정치를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라고 했는데 유학자들이 본래 새 일 벌리기를 꺼려하는걸 생각하면 신법에 반대했던 사마광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劉安世. 북송의 문신. 사마광의 제자이다.
  2. 혹 여기서 사마우는 공자의 제자중 한명인 사마우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