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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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生浦倭城

1 개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하였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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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한반도를 제압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장기전에 대비해 일본 본토와 바로 이어지는 한반도 남동해안에 많은 성을 지었는데 서생포왜성도 그 중 하나로 회야강 하구와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일본에서도 축성의 명수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가 1593년 세웠고 구로다 나가마사도 이 성에 주둔했다. 한반도의 왜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편이고 보존상태가 시궁창스런 한반도의 다른 여러 왜성들[1]과 달리 비교적 원형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편이며[2] 대도시 울산, 부산에서 가까워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왜성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오히려 일본 본토에 있는 성들보다도 16세기 전국시대 양식의 일본 성곽을 잘 보존해 가치가 높은데, 특히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의 존재로 일본 학계에서도 꽤 주목한다. 보급로 보호를 위해 산허리를 따라 지은 장벽인 노보리이시가키는 오늘날 일본에도 마쓰야마 성 등 소수의 성에만 남아 있는 희귀한 성곽 유적이다. 에도 막부 수립 이후 일본의 수많은 성들이 군사용 시설에서 높으신 분들의 거주용 시설로 변모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별 쓸모가 없던 노보리이시가키를 우수수 철거했다. 게다가 막부 정권의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신정부의 '폐성령' 선포 및 태평양 전쟁도 수많은 일본 성들의 훼철 · 파괴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따라서 군사용 시설로서 전국시대의 노보리이시가키는 그 희소성이 매우 큰데, 이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서생포왜성. 보존 상태 및 규모에 있어서도 일본의 노보리이시가키보다 훨씬 나은지라 일본 학자들과 일반 여행객들도 서생포왜성을 왕왕 방문해 오며, 그 수가 꽤 많은 듯... 이들을 위한 일본어 가능 해설사도 현지에 상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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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이 서생포왜성의 노보리이시가키)

왜란이 끝난 뒤에는 성이 견고하다 해서 조선 수군의 대진(大鎭)으로 썼지만, 군략적으로 왜성은 조선군 성채와 많이 달라서 상당수 조선군에 맞게 개조도 했다.

한때 사적 제54호로 지정했지만 당시 우리 문화재도 아닌 일본놈들이 남긴 왜성 따위를 왜 보존하냐는 여론이 높았고 결국 1997년 해지시켰다.

3 교통

진하해수욕장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 있으며 동해남부선 남창역이나 간절곶도 가깝다.

4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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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성은 우리 문화재도 아니라는 인식이 커서 보존하자는 인식 자체가 최근까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왜성은 군략적으로도 별 가치가 없었기에 많이 헐어서 재활용했다.
  2. 당연히 천수각을 비롯한 건물들은 없다. 원형 그대로의 천수각은 일본 전국에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실정. 그 밖에 잔해 일부만 남았으나 순천왜성이 그럭저럭 잘 보존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