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

1 石城

말 그대로 로 쌓은 .

1.1 한국의 지명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石城面)과 논산시 성동면(城東面)에 존재한 행정구역.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석성군(石城郡)이었다.

2 石星

(1537 ~ 1599)
명나라의 인물. 자는 공신(拱宸). 호는 동천(東泉).

1559년에 진사가 되어 이과급사중으로 발탁되었으며, 1567년에 융경제에게 주색만 즐긴다면서 대신들이 제멋대로 군다고 상소했지만 융경제가 분노해 60대를 맞고 평민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부인 정씨는 석성이 사경을 헤멘 것으로 인해 기둥에 부딪혀 죽었으며, 1573년에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사면되고 등용되었다.

이후 급사중, 대리사승, 남태부경 등을 역임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장거정과 사이가 나빠 그의 죄를 폭로하고 사직했으며, 장거정이 죽고 몇년이 지난 1587년(만력15년)에 명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공부상서가 되었고, 태자소보가 추가되었다. 1591년(만력19년)에 호부상서, 병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면서 조선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석성은 조선을 구원할 것을 주장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짜고 침략당했다는 소문까지 돌자 최세신, 임세록 등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면서 조선에 원군을 보냈는데, 석성은 일본과의 화의를 진행하기 위해 심유경이 일본의 정세를 잘 안다고 여겨 유격장군의 칭호를 주어 보내면서 화의를 진행시켰다.

심유경의 거짓말에 속아 일본과 화의한 것으로 여겼지만 1597년 2월에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공하면서 만력제가 분노했으며, 석성은 전쟁에서 많은 희생과 군비를 축내고 일본과의 협상에서 대국의 체면을 깎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1599년에 병사했다.

결국은 사람 하나 잘못본 탓에 생각도 못하게 조선과 명 양국에 크나큰 민폐를 끼치고 자기자신까지 불행해진 인물... 화의라는게 전투보다 더 어려운 일인데 이를 너무 쉽게 여겨 심유경의 농간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는데 책임을 피해 갈수가 없다.

석성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할 것을 주장한 이유는 석성의 후처가 조선의 역관인 홍순언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홍순언이 젊은 시절에 통주를 지나다가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아버지가 경사의 관리였지만 부모님을 병으로 모두 잃어 가난한 신세가 되자 유곽에 팔려왔다. 홍순언이 300냥을 주어 그 여자에게 부모의 장례를 치루게 했는데, 그 여자는 석성의 후처가 되었다. 홍순언이 이후 종계변무를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자 석성의 후처가 홍순언을 알아보고 이 때의 일을 석성에게 이야기했는데, 석성이 이를 듣고 종계변무의 문제를 해결해주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잡기에 해당하는 국당배어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애초에 이 문서에서는 대놓고 나오니 알 수 있지만, 종계변무가 진행되던 시기에 석성은 장거정 때문에 낙향한 상태였다. 저 일화가 사실인지도 알 수 없으나,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낙향한 인물이 종계변무에 얼마나 어떻게 관여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저런 일화 없어도, 명나라 입장에서 임진왜란 파병은 충분히 할만한 행동이었다. 당장, 일본의 주장이 정명가도였다. 전장을 조선에서 치르는 것이 100번 이득이다.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이 설을 차용해 조선에 호의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장남 석담은 석성이 감옥에 간 후 조선에 망명했다. 조선에 대한 석성의 도움이 지대했던 만큼, 석담을 수양군에 봉하고 살게 했다. 현재 해주 석씨가 바로 석성의 후손으로 이후 조선에서 괜찮게 나갔다. 조국에게는 어쨌건 그의 행동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됐다. 차남 석천도 1597년에 성주로 내려와서 성주석씨의 원류가 되었다. 사실 임진왜란 파병이 아니었어도 명 상태가 안좋긴 했으니 명 멸망의 원인을 그에게 찾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