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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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대 이전까지 사용된 건축물.

원래 의미는 "도시"에 가까운 표현이다.[1] 조선시대의 한성(漢城)은 성벽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벽을 포함해서 그 안에 있는 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원 화성(華城)도 마찬가지. 이런 성들의 성벽은 방어용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구획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한국어에서는 포괄적으로 각종 야생동물이나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지어둔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일컫는다. 옛날에는 '잣'이라고 하였다. 몇몇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 인류가 만든 최초의 제대로 된 요새라고 보면 된다.

영어로는 캐슬(Castle)이라 하는데, 동양의 성(城)과 서양의 캐슬(Castle)은 그 의미가 좀 다르다. 서양의 Castle은 '성'보다는 '성관(城館)'이라고 번역하는것이 원 의미에 더 가까우며 사실 서양에서도 동양식의 벽만 있는 성은 그냥 Wall이나 Fort등으로 부른다.(예: Great Wall of China) 독일어의 성을 의미하는 -burg(부르크)는 중유럽의 여러 지명에도 남아있다. 예를들어 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성이라는 뜻. 독일어에서 Castle을 의미하는 단어는 슐로스(Schloss)로 구분한다. 순우리말로는 잣, 재, 작(신라어), 홀, 구루, 책구루(고구려어), 기, 긔(백제어)이라고 불렀다.[2]참조링크 너네 긔보다 우리 긔가 높긔. 우리긔가 너네 긔보다 더 긔엽긔 닥치긔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 공통적으로 17세기 까지만 해도 나라를 불문하고 대도시, 권력의 상징이였다. 한채 지으려면 재료가 많이 들고 인부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자연스레 많아지므로, 성벽의 건축이 웬만한 대형 건물 한 두채 짓는것보다 더 까다롭다. 자연스레 시골 읍내보다는 권력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나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짓는것이 더 바람직 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주로 성의 역할은 높고 튼튼한 성벽을 통해 적이 도시로 진입할수 있는 경로를 최소화 시킴으로서 적들의 공격 루트를 한정시키는 억제 효과가 있었고, 또 방어하는 측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전투시 안정적인 엄폐물을 확보하게 해줄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었다.

다만, 아시아 지역의 경우 권력자와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성만 있는것이 아니라, 주요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순수한 요새형 성도 있다. 중국만리장성이 대표적. 이런 요새형 성이 따로 있는 것이 바로 아시아권에서 성관을 따로 생각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요새형 성엔 거주용 성관을 지어놓지도 지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럽쪽에서는 성벽을 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가물 정도로 보는 의미가 강하며, 따라서 순수 요새형 성이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성은 권력자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과시할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고, 유럽의 영주들이나 국왕 등 권력자란 권력자들은 될수 있는 한 자신의 성을 최대한 크고 아름답게 지으려고 하였다.

높은 벽을 쌓아 침입을 방지한다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그 형태와 목적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만리장성이나 천리장성 같이 국경 등에 긴 담을 쌓아 올리는 장성이 있고,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 도시 외곽을 벽으로 둘러 싸는 도시성곽, 유럽과 일본에 존재하는 권력자 거주용 성관, 크라크 데 슈발리에 같은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견제하거나 방어할 용도로 지은 요새용 성 등. 같은 나라, 지역 내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성의 형태는 제각기 다르다.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성은 주거용 저택으로서의 가치가 있어서 거래가 되긴 한다. 하지만 겨울에는 무진장 추운데다가, 편의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살기에는 불편하고, 관리인원이 많이 필요해 유지비 폭탄을 맞는데다[3] 시골에 있어서 교통까지 불편한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생각만큼 고가에 거래되지는 않는다. 보통 돈 많은 사람들이 별장용으로 하나 구입하는 정도. 대개는 150만 유로 정도에서 시작해 드물게 정말 비싼건 5천만 유로정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영국 랭커셔에 있는 해자까지 딸린 이 근사해 보이는 성은 고작 375000 파운드(약 6억 5천만원)에 매물이 나와있었다.성매매 # 강남아파트 전세값이면 당신만의 성이 한채! 그럼 뭘해? 유지비 때문에 아무도 안 사는데 이건 좀 과하게 많이 싼 편이지만, 보통 저정도 성이라도 수백만 유로를 넘어가지는 않는 편. 레이디 가가스코틀랜드에 자신의 소유로 된 성이 하나 있다. 다만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국보급 성이라면 이런 식으로 쉽게 거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는 따로 권력자용 거주 공간을 성처럼 쌓아 올리기보다는 대도시 내에 궁궐을 짓고 담으로 구분짓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4] 사람이 모이고 교역하기 쉬운 대도시는 전체를 둘러싸는 성곽으로 방어하고, 길목에 전투용 요새성을 따로 두어 거점방어에 이용한 것. 따라서 차단/요격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대도시들은 꽤나 손쉽게 적의 손에 넘어갔다. 농경지 약탈은 어차피 막기 힘들고, 인명 보호에는 도성보다 피난용 요새가 나았다. 혼란기 중국이나 서양은 조금 사정이 달라서, 옛 대도시들은 도시 외곽의 방어성이 필수적이었다. 큰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기보다 도시 단위로 공격받는 일이 잦은 경우 도시성 자체의 방어 능력이 중시되었던 것. 중세 유럽, 전국시대 일본 등 짧은 전쟁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곳에서는 도시의 방어보다는 권력자 거주구를 중점 보호하는 형태의 성이 나타난다. 이쪽은 직업군인 간 전투로, 일반민 마을을 약탈하기보다는 권력자 목을 따고 구역 일대를 손에 넣는 형식의 전투가 주로 이어졌기 때문. 근세 제국주의 시기에는 군대를 파병하고 그 지역에서 군사력 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요새들이 세계 각지에 건설되었다. 도시를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전투병만을 가득 집어넣은 형태의 성으로, 대포의 사각을 없애기 위해 별 모양으로 건설되는 등 여러가지 새로운 형태의 방어시설이 나타난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 성을 짓는 목적도 달라지고, 따라서 그 형태도 달라진 것이다.

이외에 동양에서는 성이 지어지는 위치에 따라 산성, 평지성, 평산성을 구분한다.

산성은 말 그대로 산에 지은 성을 말하며, 드물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지은 성도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벽을 빙 둘러 지어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뫼식(머리띠식)과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이 있다.

산이나 구릉에 짓는다는 특성상 성의 규모는 대부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삼국시대 국경선 지역에 설치된 산성들은 산성이라기보다는 거의 돈대 수준에 가까운 작은 산성도 보인다. 높은 지형에 위치하기에 방어하기가 유리하며, 산을 끼고 지은 성이기 때문에 공성병기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어 복잡한 방호시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형상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 치명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이와는 별개로 전국시대 일본은 다이묘들이 오랜 전란으로 인해 산성에 도피용 산성을 따로 만들기도 했고 아예 산성에 주로 거주하는 경우까지 생겼는데, 이런 일본의 산성들은 평지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큰데다가 복잡한 방호시설들이 지어져 더더욱 난공불락을 자랑했다. 하지만 교통의 불편은 여전한 문제인지라, 성 방호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점점 평지성, 평산성에 주력 자리를 내주게 된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산성 유물 중에는 건축당시 산성의 성벽 높이가 거의 보루수준인 곳도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당수가 허물어져서 그때의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전방의 국경지대가 아닌 이상다른 후방의 성들을 유지하는 것에는 소홀해지기 쉬웠고 도시와의 접근성도 낮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지면 관리가 이루어지기 힘든 탓이었다.


평지성은 평야 지역에 건설되는 성을 말한다. 평야지역의 특성상 지형적으로 방어하기가 산성보다 불리해 높은 성벽과 복잡한 방어시설들을 만들어 성의 방어력을 극대화시키고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산성이나 산성과의 공존이 일반적이었으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건축 기술력의 향상으로 수성기술이 점차 발전하게 되면서 산성보다 일반화된다.

그러나 방어력 증강을 위한 투자에 비해서는 방어력이 크게 늘지 않으며, 적의 대형 공성병기가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이 완전히 평야인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평야중에서도 고지대를 취하거나, 적어도 성벽 내부에 약간이라도 고지대를 포함시켜서 내성을 만들어놓는 일이 흔하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성벽이 뚫리더라도 일부 지역은 살아남아서 농성전을 계속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지성이 읍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지어졌는데 외성만 있고 외부와 이어지는 정문이 많이 나있는데다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서 방어력이 약했다. 읍성은 정규군을 막아내기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관의 위엄을 높이고 행정 구역 표시, 도적 및 왜구를 막아내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적이 처들어오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에서 농성하는 것이 원칙이이었다. 타국의 성들과 비교했을때 성벽과 성관의 규모가 단촐해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애초에 읍성에 그런 구조물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측면에서 허술했던 읍성은 임진왜란때 이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성전에 이골이 난 일본군에게 매우 쉽게 함락되었다. 기존에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정규군이 주력 방어선인 산성을 돌파해버리자 왜군의 진로에 놓인 읍성들은 빠른 속도로 점령되었다. 반면 대 여진 전선이었던 함경도는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던지라 경성읍성같이 웅장하고 큰 성들이 존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읍성도 기존보다 잘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외적으로 읍성임에도 잘 지어져 여러 방어시설과 내성/외성 구분이 잘 지어진 진주성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2차 진주성 전투에선 함락당했지만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진군을 저지함으로써 뛰어난 방어력을 보였다.

중국의 성은 평지성이 방어의 기본이다보니 성벽을 매우 높게 짓고 다중문 방식의 성문을 채택해 평지성이지만 높은 방어력을 보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성문이 기본적으로 작은데다가 한두개밖에 없고 '산노마루', '니노마루', '혼마루'라고 불리는 3중 성벽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며 침입해온 적군들을 언제나 사방에서 공격할수 있도록 내부구조도 미로같이 만들어놓아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매우 높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다만 그 대가로 교통성이나 거주편의성 등 평시에서의 성의 많은 기능을 포기했다.


평산성은 산지와 평지를 아울러 성벽으로 이어지는 성을 말한다. 평지성과 산성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과거 고려/조선 시대의 개성/서울의 성곽이나 고구려 평양성, 백제 사비성, 동래읍성, 수원화성이 이런 평산성에 속한다.

다만 이러려면 지형의 조건이 평지 옆에 험준한 산이 붙어있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딱 맞아야 하므로 평산성은 짓고 싶을때 마음대로 지을수 없어 그 수가 적다. 그리고 제대로 짓지 않으면 평지성도 아니고 산성도 아닌것이 양자의 약점을 고루 가진 망작이 되기 딱 좋다.


성의 재료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다.[5]

  • 목책성(木柵城) : 목책, 책성, 성책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 형태의 성이다. 상대적으로 싼 값으로 쉽고 빠르게 세울 수 있지만 내구성은 낮으며, 특히 재질의 특성상 불에 약하다. 상위호환형으로 목책도니성(木柵途泥城)이 있는데, 이것은 한옥의 벽을 만드는 것처럼 나무로 골조를 만든 뒤, 흙을 덧씌워 토벽을 만드는 것으로 일반 목책보다는 품이 더 들지만 다른 성에 비해 훨씬 싼 값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으면서도 일반 목책보다 튼튼하다. 목책도니성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보루 건설시 많이 사용했으며, 이외에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전라도 해안지대에 많이 건설되었다. 임진왜란때 왜군도 많이 사용했으며, 이에 유성룡은 <설책지법>에서 여말선초기의 목책도니성과 왜군의 임시진지를 기초로 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목책도니성을 제시한 바 있다. 전축성, 석성이 일반화된 뒤에도 싸고 빠르게 짓는 게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많이 사용되었다.
  • 목성(木城) : 느릅나무, 버드나무, 탱자나무 등 빨리 자라거나 가시가 있는 나무들을 최대한 일렬로 빽빽하게 심어 서로 엉켜 자라게 해 천연 방어벽으로 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사례로는 북방의 , 의 압력 때문에 자유로운 성곽 건설이 힘들었던 남송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 토성(土城) : 흙을 쌓아 만든 성. 토루(土壘)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 황하 유역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지형 자체가 널리고 널린 게 고운 진흙인데다 흙에 칼슘성분이 풍부해 토성임에도 매우 단단했기 때문이다. 목책과 같이 설치하여 방어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대에는 흙을 정교하고 일정한 두께로 깐 뒤 다지기를 반복해 만드는 판축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이 방법은 튼튼하지만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어 적당히 쌓아올려 만드는 성토법, 완만한 형태의 지형을 급경사로 깎아서 토성의 효과를 내는 삭토법, 돌로 일부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토성을 쌓거나 아예 처음부터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이 있다.
  • 석성(石城) : 석축성(石築城)이라고도 한다. 이름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성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한 우리나라에서 특히 발달한 성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쌓은 편축성(片築城)과 성의 내외벽면만 돌로 쌓고 사이에 흙을 채워넣은 협축성도 석성에 들어간다.
  • 전축성(塼築城) : 전돌(벽돌)을 사용해 쌓은 성. 벽돌을 만들기 좋은 고운 흙이 풍부한 중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벽돌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엄밀히 말해 순수한 전축성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돌과 흙을 벽돌과 같이 사용한 혼축성(混築城)이 대부분이다. 물론 벽돌성은 규격이 일정하여 보기도 좋고 섬세한 구조물의 건설이 가능하며, 접착력이 강해 포를 맞아도 피탄된 부분만 부서지는 장점이 있어 여러 차례 도입이 시도되었고, 국내에서도 드물지만 순수한 전축성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토질적인 이유로 좋은 벽돌 만들기가 어려웠고, 기후적으로도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과 잘 붙지 못해 내구성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좋은 석재가 풍부하고 가공기솔이 잘 발달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전축성이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국 건축 항목도 참조.)

유럽의 경우 대략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봉건사회 지배자의 무장된 주거지로서 점차 견고한 것으로 발달했으며, 세 가지의 역할을 지닌 건조물이었다. 즉 영주의 주거, 성이 구축된 지역의 방어시설로서의 한 요소, 비상시 백성들의 피난처 등의 역할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기의 성은 성터 주위에 해자를 파고 그 파낸 흙을 쌓아올려 원추형의 분지를 구축하고 그 정상에 목조로 탑상의 건물인 킵을 세우거나 아니면 대지에 접속시켜 목책이나 해자를 둘러치는 간단한 것이었다. 이 형식은 11세기 무렵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1세기에는 킵을 석조로 한 예도 나타났고, 동시에 견고한 성벽을 둘러쌓는 형식도 발달하였다.

성벽은 요소요소가 탑으로 강화되고, 그들 정상부에는 오목하면서 불록한 흉벽 또는 성가퀴가 설치되는 외에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회랑식 주랑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마시쿨리라고 불리는 투석구가 마련되었다. 그러한 성벽에 싸인 성곽 속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건물은 킵이며 그것은 공방전에서 최후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서유럽에서 보이는 초기의 킵은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며, 거기에는 우물 그레이 홀과 영주의 가족들과 하인들이 거주하는 방, 창고 기타 장기간 농성에 필요한 모든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벽은 매우 두껍고 모서리에는 커다란 우탑이 붙어, 높이는 2층 내지 4층으로 되어 있다. 입구는 통상 2층에 설치되어 걸쳤다 떼었다 하는 사다리로 출입한다.

또 킵 내부에는 예배당이 설치되었는데 이런 방형평면의 킵은 여러 방을 배치하기에는 편리하나 반면 파괴망치에 의한 공격에는 약했다. 한쪽 벽면에 대한 공격을 다른 벽면으로부터 측면 반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점을 제거하기 위하여 킵의 평면을 원형이나 다각형으로 하게 된 것은 제3회 십자군이 원정에서 돌아온 후의 일이며, 거기에는 분명히 서유럽에 끼친 동방의 영향이 인정된다.

원형과 다각형의 예로는 프랑스의 세자르 · 에탐프 · 프로방, 영국의 코니스보로 등이 있다. 한편 지중해 동쪽에는 11∼12세기를 통하여 비잔틴의 전통이 계속되어 1099년 예루살렘 함락 후는 십자군에 의하여 그러한 동방의 축성술을 살려 안티오키아에서 아카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견고한 성이 여러개 구축되었다. 12세기의 사오누, 마르가트, 그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의 성채가 그 예다.

수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에 의하여 동방의 축성술을 알게 된 서유럽의 기사들의 체험은 12세기 말엽부터 본국의 축성술에 반영되었다. 북프랑스의 가야르성은 장대한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이러한 형의 성채건축은 13세기를 통하여 더욱더 개량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917년에 파괴된 쿠시성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대지에 세운 걸작이며 그 킵은 지름 31.5 m의 원통형으로 벽의 두께가 기부에서 약 7.5 m나 되었다. 독일에는 바위산 위에 세운 팔켄베르크성이 있으며, 영국의 예로는 런던 탑 ·윈저성 ·에든버러성 등을 들 수 있다.

중세기 말에서 15∼16세기에 걸쳐 화기의 사용이 급속히 발달하게 되자 종래의 방어시설로는 효과가 없게 되어 그때까지 성이 지니고 있던 주거와 요새를 겸했던 두 가지 기능이 분리되어 성은 순전히 군사상의 요새와 거관으로서의 저택으로 나누어졌다. 르네상스 시대 루아르강 유역에 세워진 일군의 성관들은 그러한 중세의 축성술을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거관이다.

성이 존재하면서 사람들은 또 그 성을 함락시킬 궁리를 하였으며,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공성 무기다. 하지만 또 공성 무기가 있으니 사람들은 다시 공성 무기로부터 성을 방어할 방비책을 궁리하였고 그래서 또 나온것이 성벽 앞에 해자를 파놓는 등 갖가지 수성장비/시설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개발사와 전쟁 기술의 개발사가 밀접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

그러나 화약무기, 즉 대포가 발전하면서 높은 성벽은 맞추기 쉬운 타겟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단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성벽으로 꼽히는 콘스탄티노플 3중성벽이 투르크족 거대 대포에 의한 포격으로 함락된 사건을 패러다임 전환 시점으로 꼽는다. 물론 성이 바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보방 요새나 수원화성의 경우에는 포격을 방어하는 축성술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장거리 고화력병기가 발달하면서 점차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성은 총기류가 난무하는 현대전의 양상속에서 군사작전시 간간히 써먹는 주요 거점 및 임시 기지 정도로 사용 되는게 전부. 그리고 '방어적 구조물'인 성의 역할은 드럼 요새같은 콘크리트 요새를 거쳐서 참호벙커가 대신하고 있다. 그래도 이후로도 웅장한 성은 권위의 상징으로 살아 남았고, 오늘날에는 문화재이며 관광 자원인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부르주아'라는 단어의 어원은 '성 내부에 사는 사람'이다. 성도 건축물이니만큼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가는데다가,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성 내부에서 거주하게 되면 당연히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거두곤 했는데, 이게 일반 서민들이 부담하기에는 좀 컸다는 것. 결국 유지 비용을 내기 힘든 일반 백성들은 성 밖에서 살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 내부에는 상공업 종사자, 귀족 같은 소위 '돈 좀 만지는 사람'만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 = 능력 있는 사람 =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물론 유럽이나 일본같은 경우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의 조카마치 거주자들의 경우도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나 중국같이 중앙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힌 경우는 봉건 사회와 달리 성의 의미가 권력자의 보호기구가 아닌 행정의 하위 단위인지라 웬만한 경우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 안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이 발생했을 때 전자의 경우 전투원들 위주로 성 안에서 농성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 비전투원들도 입성해 함께 농성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전자의 경향을 많이 볼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란 에세이에서 이러한 차이를 흥미로운 관점으로 보고 있다.

각종 중세 기반 판타지 게임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장소다. 일단 이런 게임상의 성들은 유럽쪽 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항상 나라의 중요 인물이 거주하고 있으며, 또 거주 인구가 많은, 즉 대도시라서 물건 수리, 주점, 훈련소 등등의 각종 서비스 업체들이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 몇몇 MMORPG에서는 아예 성을 자신의 클랜 or 길드 or 기타 등등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공성전 시스템을 집어넣었다.

여담이지만 화약병기가 보편화되면서 성의 개념이 몰락하기 시작했는데 화약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진 마법이 판치는 판타지물에서는 여전히 성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갑옷입은 기사 만큼이나 로망이 되어버려서인듯. 그보다는 마법에 의해 화력이 발달한 만큼, 마법에 의한 성의 방어 기술 역시 발달해서 일지도 모른다.

2 나무 위키에 등재돼있는 성

2.1 대한민국

2.2 중국

2.3 일본

2.4 독일

2.5 러시아

2.6 시리아

2.7 가상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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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날 성의 이미지로 이미지가 박제된 한국의 성과는 달리, 지금도 중국어로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도시라는 의미다(중국어로 도시를 '城市'라고 한다).
  2. 그래서 한국 각지의 옛 고유어 지명을 보면 '재(또는 자, 고자 등)', '홀(미추홀, 매홀 등)', '기(또는 지, 노사지, 두잉지' 등)' 등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이 모두 삼국 시대에 성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3. 제러미 아이언스는 성 유지비가 너무 많이 나가서 돈이 필요해 시나리오를 깐깐하게 안 보고 블록버스터형 액션영화에 참여했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4. 사실 현대에도 상류층들은 대도시에 초고층 아파트를 짓고 살며 외곽이나 외딴 산동네에 빈민촌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관습의 영향이란 말이 있다.
  5. 참조자료 : <한국의 성곽>, 손영식 저, 비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