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

문묘 배향 18현
김굉필김인후김장생김집박세채설총
성혼송시열송준길안향이언적이이
이황정몽주정여창조광조조헌최치원

1 개요

동춘당 송준길 (同春堂 宋浚吉) 1606~1672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현재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출신. 송촌동 동춘당 공원에 그의 생가(정확히는 별당,보물 209호로 지정)가 보존되어 있다.

기호 학파의 거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이라 불리는 거유(巨儒). 이러한 정치 역정은 아래 항목에서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여담으로, 실록을 보면 정치활동 전성기를 알 수 있는데, 인조 때는 10건에 불과한 반면 효종 때는 169건, 현종 때는 427건(개수 실록은 477건)에 달한다.

동춘당은, 우암과 달리 정치적으로 온유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경북 상주의 흥암 서원은 동춘당을 봉향하고 있으며 상소 중 남인 측을 변호한 상소도 있을 정도.

인현왕후는 동춘당의 외손녀이다. 또한 그는 민회빈 강씨의 진이종숙(아버지의 이종사촌)이다.

2 정계 입문과 김자점 탄핵, 그리고 끝없는 사직 상소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에 최명길이 상소하여 우암과 동춘당을 동시에 추천하였던 점을 볼 때 은진 송씨의 역사적 인물로 송시열만을 손에 꼽는 것은 단견이다. 사실 동춘당과는 달리 우암은 트러블 메이커라서 더 잘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은 같은 은진 송씨로 친가쪽 촌수로는 13촌 숙질관계 였지만 외가쪽 촌수로는 6촌 재종형제 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암은 동춘당을 13숙으로 안 부르고 춘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죽은 직후 소현의 장남을 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인조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면서 동시에 송준길 또한 불러들였다. 역시 우암과 마찬가지로 둘 다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후 송시열은 인조대의 간신 김자점영의정에 오르자 거기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송준길 역시 1649년(효종 즉위년)에 김자점을 탄핵하고 낙향하였다. 동년 8월26일에 효종이 장령에 임명해도 거부하더니 집의에 다시 임명하자 9월 13일에 단독으로 김자점 탄핵 상소를 다시 올렸다.

이 때 당시 대사헌 김남중이 '김자점과 어울린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전부 조정에서 내치면 일이 번거롭고 조정에 분란을 일으킨다'하여 송준길의 상소에 반대하는 뜻을 보이자 대사간 김경여는 '대사헌의 뜻이 핑계에 불과하고 구차하다'하며 송준길을 출사하게 하라고 간했다. 결국 효종은 대사간의 말을 좇았다.

동년 9월13일에 지평 이수인이 '송준길의 뜻은 올바르나 너무 기세가 예리합니다.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을 제일의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지성으로 간절하게 하고 재삼 반복하여 임금의 마음이 온화해지게 하고 정의(情意)가 미덥게 한 연후에야 아는 것을 모두 말해야 합니다.'라고 송준길에 대해 비판하자 사헌부 지평 김시진이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과 (잘못된) 일을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아닙니다. 이미 대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이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아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옳겠습니까.'라며 김시진을 공박하여 효종이 이수인의 관직을 바꾸었다.[1]

동년 10월 4일에 사계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당시 공조 참판)과 함께 사직을 청하였으나 효종이 거부하고 같은 날 또다시 송시열과 함께 사직을 청하자 효종이 진노하며 허락하지 않았다.[2] 한편, 김자점 탄핵 과정에 산림들의 성토가 거세자 이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데, 이에 따라 당시 장령이던 송시열이 위에 언급한 대사간 김경여와 송준길에 대한 변론을 10월 18일에 올렸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23일에 효종은 대신들에게 논박받는 것을 달게 여기라 당부하며 25일에는 송준길에게 당상(堂上)에 초승하는 명을 내리기까지 한다.

1655년(효종 6년) 10월27일에 효종이 승지로 임명하였는데 11월16일에 동부승지 직을 사직할 것을 청하였다. 그랬더니 효종이 답을 내리기를 '너의 굳은 사양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것은 나의 정성이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므로 진실로 낯이 부끄럽다.' 1656년(효종 7년)에는 이조참의 직을 사직할 것을 청하고 역시 효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이런 식으로 사직과 벼슬 제수가 반복되는데, 이쯤되면 산림의 풍조인지 유학자로서의 기개배짱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3 효종 때의 정치 활동

김자점과 그 일파에 대한 탄핵 시기와는 달리, 1658년(효종 9년)에 이르면 조정이 산림들과 양송[3]에 대해 우호적인 세력들로 채워졌음을 알 수 있다. 효종 즉위 초에는 산림들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효종이 직접 고기와 쌀을 내려주기도 하며 호조 참판직을 맡긴다.(이 때 이완을 형조 판서로 임명함.) 그러나 이 시기부터 슬슬 산림이라 해도 학파에 따른 정치적 긴장감이 드러난다. 김장생과 송준길을 두루 공박하는 윤선도의 상소를 도승지 김좌명이 괴상하다 하여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4] 한편 동년 9월 18일에는 대사헌[5]에 송준길을 임명하였다. 이 때 송시열은 이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이후 10월 9일에는 송준길을 이조 참판으로 임명하여 양송이 이조의 요직을 전부 차지하였다. 그리고 12월 10일에는 다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효종 10년 3월 8일에는 대사헌이었던 송준길에게 병조 판서를 제수하는데 실록에는 이를 특별히라고 적고 있다. 병조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송준길은 단 이틀 만에 사직을 청하는데 효종이 또 거부한다. 3월 21일에 송준길이 칭병하여 사직을 청하자 효종이 윤허하였는데 4월 4일에는 또다시 대사헌을 제수한다. 츤데레?

4 현종 때의 정치 활동

현종 즉위년인 1659년 6월 2일에도 송준길은 대사헌 직을 또 제수받고 6월 29일에는 이조 판서직을 제수받는데(이 때 송시열은 좌참찬 직을 제수받다.) 7월 2일에 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가납되지 않자 7월 6일에 또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역시 현종이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660년(현종 1년) 1월 19일까지는 이조 판서직에 잠잠히 있다가 또 사직상소병이 도졌는지(...) 4차에 걸쳐 상소하여 체직한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예송논쟁.

한편 송시열과 함께 1660년(현종 1년)에 상소를 올려 구황과 빈민 구휼 및 조세 제도의 개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관둔전과 내수사의 면세지를 혁파하라는 주장은 상당한 강수. 이러한 면세지 혁파의 상소는 당색을 가리지 않아 1661년 4월 7일에 송준길은 남인의 영수 허적과 함께 현종에게 직접 아뢰기도 하였다.

또 송시열과 같은 당파이며 은진 송씨의 두 거두였던 만큼 서로를 챙기기도 하는데, '신은 조정에 있어도 털끝만큼의 보탬이 되는 일이 없지만, 송준길과 같은 사람은 늘 대궐을 못 잊어하며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사직 상소를 올리냐 충성심이 있습니다.'라고 송시열이 상소하기도 했다. 그러자 송준길은 송시열만 낙향하고 저만 조정에 남아있을 수는 없다고 맞장구를 친다. (...) 현종2년 5월의 일이다.

1662년(현종 3년) 6월 21일에 대사헌 직을 제수받고 11월 11일에 또 대사헌 직을 제수받았으며 1663년(현종4년) 2월 18일에 다시 대사헌 직을 제수받았다. 동년 7월 4일에 대사헌 직에서 물러남을 청하자 9월 13일, 11월 19일에 계속 대사헌 직을 내린다. 1664년(현종 5년) 2월 26일에 송준길이 칭병하여 대사헌에서 물러나자 동년 10월 15일에 대사헌 직에 임명하고, 1665년(현종 6년) 4월 2일에 다시 대사헌으로 임명하며 동년 5월 2일에 친히 음식을 내리는데 먹을 거로 꼬셔봤자 5월 13일과 5월 20일에 또 사직한다. 그리고 동년 6년 7월 8일에 세자의 스승이 되고 동년 10월 5일에 현종이 어의를 보내고나서 10월 30일에 다시 대사헌 직을 제수받으나 11월 17일에 또 사직하였다. 구라가 걸린 듯

이후 실록에 의하면 1666년(현종7년) 4월 경부터 송시열과 함께 수차례 칭병하였다. 1667년(현종8년) 4월21일에는 남인의 거두인 허적과 셋이서 칭병하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병이라고 입맞출 필요는 없잖아 (...) 1668년(현종9년) 8월 26일에도 우의정 송시열과 이조판서 송준길이 동시에 관직을 사양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672년(현종13년) 11월 27일에 현종이 어의와 약물을 보내어 송준길의 병을 살피도록 하나 결국 그 해 말에 동춘당 송준길은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는 죽기 직전에 부패한 지방관 김징이 모친의 생일잔치를 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이들까지 죄다 불려들어 거액의 선물을 요구했다가 처벌당하게 생기자 "모친을 핑계대어 위해 한 일에 큰 죄를 줄 수 없다"고 같은 산당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변호했다. 조정에선 "그런 식으로 봐주면 부모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부모를 핑계되어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라고 반박했으나 송준길은 막무가내였고 거물이었던 그의 주장을 무시할 수가 없어 김징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현종을 매우 실망했다. 어의는 보냈으되 위로의 말을 전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씹어버렸다.

5 남인과의 관계

동춘당은 우암과는 달리 남인에 대해서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윤선도를 유배 보냄에 있어 처음의 귀양지는 삼수(三水)였다.[6] 이에 우참찬 송준길이 '윤선도가 죄를 받은 것이 실로 소신들 때문이었으므로 소신이 늘 마음속으로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올라 온 뒤에 한번 진달드리려 했습니다만, 황공해서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죄안(罪案)을 들으니 더욱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현종이 '윤선도의 죄가 중한데도 감하여 준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러자 대사간 김남중과 부제학 유계가 윤선도의 죄가 중하여 관대하게 처분할 수 없다고 답변하고, 현종이 '부제학의 말이 옳다'하니 송준길이 다시 형의 감등을 청하나 현종이 다시 '그의 죄가 너무 무겁다'고 거부한다. 이러자 다시 한 번 송준길이 '윤선도의 나이가 80에 가까움'을 이유로 감등을 청하자 결국 현종이 윤선도를 다른 곳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1661년(현종 2년) 4월 10일의 기록이다. 또한, 이 때의 일로 인하여 1667년(현종 8년)에 윤선도를 석방함에 있어 판부사 정태화와 영의정 홍명하 등이 송준길의 말을 석방 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한편 이세직이라는 자가 1670년(현종 11년) 9월 7일에 종각에 난입하여 종을 발로 찼다가 형조에 체포당하자, '송 정승(송시열)을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후사가 없고 양손(養孫)이 있을 뿐이라 곤란하고 송 판서(송준길)은 친손자가 많이 있어서 난감하다.'는 충청 감사와 충청 병사, 통제사의 역모 모의를 들었다고 무고하였던 사건이 있다. 그런데 남인의 거두인 허적이 헛소리라고 해버렸고 집의 신명규는 미친놈이라고 비판하였고, 결국 무고한 자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 이 항목의 내용을 포함하여 상기한 내용은 모두 서인이 개수한 현종개수실록이 아니라, 현종 말년부터 숙종 초년까지 정권을 잡은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한 현종실록의 내용이다. 동춘당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그와 남인과이 관계가 온유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별세 이후와 개략적인 평가

(이하 숙종 실록에 의거함)

별세 이후, 제2차 예송 논쟁이 촉발되고 살아있는 송시열과 함께 이미 세상을 뜬 송준길도 남인의 공박에 시달리게 된다. 다만, 2차 예송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송준길은 붕당을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주로 공박당하는데 상기한 항목을 보면 그렇게만 평가하기는 힘든 면모가 많다. 물론 송시열이 송준길보다 17년이나 오래 살았고 그래서 절대량의 측면에서 송준길이 휘말린 논쟁이 적은 것이기도 하지만, 양송(兩宋)이 동시에 살아있던 시대의 실록(위 항목 참조)을 보더라도 송시열에 비해서 크게 정치적으로 원만한 모습을 보였으며, 상대적으로 송시열에 비해서 학자적 성격이 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관련 항목

  1. 체직이라고 한다-替職
  2. 툭하면 사직하는 실록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산림들의 풍조를 알 수 있다.
  3. 兩宋, 송시열과 송준길을 아울러 이르는 실록의 표현.
  4. 실록에 따르면 2번의 상소를 도승지가 모두 물리친 것으로 되어 있다.
  5. 오늘날의 검찰총장/감사원장과 비슷한 직위.
  6. 삼수갑산의 그 삼수이다. 당시 윤선도가 70대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추운 산골짜기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상당한 중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