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 (이사악키이예프스키 사보르)
영어 : Saint Isaac's Cathedral
프랑스어 : Cathédrale Saint-Isaac de Saint-Pétersbourg
독일어 : Isaakskathedrale
이탈리아어 : Cattedrale di Sant'Isacco
일본어 : 聖イサアク大聖堂
1 개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회 성당으로, 창세기의 이사악이 아니라 정교회의 성인인 달마티아의 이사악에게 봉헌되었다. 달마티아의 이사악의 축일은 율리우스력으로 5월 30일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창건자인 표트르 대제가 바로 이날에 태어났기에 그를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던 것에서 성당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겨울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나 성당의 빛나는 금빛 돔을 바라볼 수 있다. 주철로 건축된 성 이사악 대성당의 돔은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건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그 때부터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1990년부터는 그나마 일정한 날에는 정교회 행사를 다시 치르고 있다.
2 역사
2.1 과거의 대성당
첫 번째 성 이사악 대성당은 1707년 표트르 대제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세워졌다. 길이 18m, 폭 9m, 높이 4~4.5m의 목조 건물로 된 소박한 규모였으며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 강가에 너무 가까이 지은 탓에 건설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건물에 사용된 자재가 썩기 시작했다. 이에 1717년 원로원 광장으로 부지를 옮겨 공사에 들어가 1727년 두 번째 대성당을 지었고, 바로크풍의 종탑도 추가했다. 하지만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735년에 벼락을 맞아 불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대성당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인 1761년 건설을 시작해 약 40년 후 파벨 1세 때인 1802년 5월 30일에 축성되었다.
2.2 네 번째 대성당
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년 1월 23일 ~ 1858년 7월 10일 |
세 번째 성 이사악 대성당이 완성된 뒤 겨우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808년,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원한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몇 차례의 설계 공모를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구스틴 드 베탕쿠르(Agustín de Betancourt, 1758.2.1~1824.7.14)에게 새로운 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으라고 명령했고, 베탕쿠르는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까지 무명이었던 20대 후반의 젊은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려한 건물을 원한다는 걸 파악한 몽페랑은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성당의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정하고 코린트식 열주와 박공지붕으로 된 파사드를 네 면에 두며, 높게 세운 드럼 위에 43m 높이의 돔을 얹는 대담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818년 2월 20일에 황제의 승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몽페랑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성당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워진 도시였기 때문에 공사 현장의 지반이 단단히 다지지 않았다가는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m, 두께 26~28cm의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에 세워질 48개의 원기둥은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해온 것을 사용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으며, 이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여가 더 걸렸다. 각 파사드마다 12개씩 원기둥이 세워졌으며 그 위를 덮은 박공지붕은 12사도의 청동 조각상들로 장식했다. 그동안 벽돌공들은 성당의 주요 벽체와 볼트 천장을 마무리지었다.
40년간 계속된 공사 끝에 마침내 1858년 5월 31일 네 번째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신성한 건물에 동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 기간 내내 40만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로지 인력으로만 건물을 지었다.(…) 공사 책임자인 몽페랑은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7월 10일에 72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렌처럼 몽페랑 역시 자신이 설계한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운 건축가였지만 사후에 받은 대우는 렌보다 못했다. 몽페랑은 평생을 바쳐 지은 성 이사악 대성당에 묻히기를 바랐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청원했지만 황제는 몽페랑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당 내의 매장을 거부했다. 결국 몽페랑의 유해는 아내가 프랑스로 운구해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