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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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알렉세예비치(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
공동 재위: 1682년 6월 2일 ~ 1696년 2월 8일(14년)
단독 재위: 1696년 2월 8일 ~ 1725년 2월 8일(29년)
총계: 43년
1 개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업적 덕에 표트르 대제(표트르 벨리키 Пётр Великий)라고도 불린다. 영어식 발음인 '피터 대제', '피터 1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킵차크 칸국의 지배 때문에 서유럽과 교류가 단절되어 중세 수준의 문화에 머물러 있었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서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4cm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일반인에게서는 보기 힘들고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에게서나 나올법한 체격이였다.
2 일대기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두번째 황후의 아들로 1672년에 태어났다. 표트르가 4살 때에 알렉세이 황제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표도르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 만에 저승으로 갔다. 이에 표트르 1세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스트렐치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일단 이복형 이반 5세[1]와 표트르가 공동 황제에 오르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소피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의 어머니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마침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2]의 정착촌과[3]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 최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4] 특히 표트르가 흥미 있어한 것은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를 만들어 놀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말이 놀이 군대지 사실상 실탄을 쏘며 훈련을 해 첫 전투에서 20여 명이 살상되기도 했다.크렘린궁 서바이벌 필드
김용의 녹정기에 등장하는, 위소보와 바람피운 나찰국 공주 소피아가 이 소피아로 녹정기의 예는 픽션이지만 이때 당시 시베리아 동부의 상인들과 용병들과 청군과의 충돌이 유명한 나선정벌이다. 나선정벌에서 당한 러시아는 보복을 생각했지만 소피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1689년 이복 누나 소피아와 애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소피아를 수녀원에 유폐시킨다. [5]
사실 이런 일 때문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황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의 권한으로 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논리...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 때부터 표트르는 독자적으로 러시아를 다스렸다. 1698년, 표트르는 서유럽에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으로 슬쩍 끼여들었다.
프로이센에서는 포병 부사관 코스프레를 하고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목수 코스프레를 하고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해군 체험도 하면서 명예 제독의 지위도 얻었다. 심지어는 의학이나 해부학까지 수강했는데, 수강 중 시체를 보고 토한 자들을 크게 문책하며 시체를 먹으라고 지시했었다고 한다.[6]
- 그런데 사절단이건 방문한 나라 사람들이건 다들 '표트르' 미하일로프가 코스프레중인 표트르 1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7]. 단지 당사자가 열심히 코스프레를 하니 장단을 맞춰줬을뿐. 또 아무리 코스프레에 맞춰줘도 황제의 대우를 포병 부사관이나 목수로 해줄 수는 없으니 일반 귀족의 예로 대우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자국을 방문중인 외국 황제의 신변에 위협이 가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가 날테니 표트르가 방문하는 나라의 군주들은 다들 노심초사하며 호위를 겹겹이 붙였다고 한다. 거기에 표트르 또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악동이라, [8] [9] 각 나라들은 제발 러시아 황제가 자기 나라에 오지 말아주십사 했다고 한다. 유학 동안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서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바다에 집착하게 되었다.
유학 중간에 소피아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급히 귀국하여 손수 처리했다. 진짜 반란이라는 설부터 반대파를 처단할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백여명의 사형수들을 속옷차림으로 줄을 지운 다음 하나 하나 손수 목을 도끼로 쳤다고 한다. [10] 키가 2m가 넘는 거구에다가 힘도 엄청난 장사여서 은쟁반을 손으로 구기고 말편자도 펼 수 있을 정도였다니 흠좀무.
스웨덴에는 1697년 새로이 16살의 칼 12세[11]가 즉위했다. 당연한 일로서 당시 팽창중이던 스웨덴과의 대립은 결국 21년간의 대북방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12]
1700년 러시아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13] [14] 칼 12세는 폴란드로 군을 돌려 러시아는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후[15] 폴란드 연합군과의 작전으로 벌어진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대승을 하게 되어[16] 발트해 지역을 점령했다. 1721년 니스타드 조약을 맺어 핀란드를 제외한 스웨덴의 모든 북방 영토를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러시아 정교의 수장이던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를 폐하고 신성 종교 회의를 설치했다.
1710년에는 무리하게 원정을 계획하다가 프루트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어 굴욕적으로 탈출하고 결국 아조프를 상실했다. [17]
한편 행정면으로는 귀족회의 두마를 폐지하고 원로원을 만들었다. 1722년에는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 체계를 정립했다. 또 표트르 1세는 귀족들의 몽골식 긴 수염을 자르고, 러시아판 단발령...[18] 수염을 계속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물렸다.
1703년부터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9]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는데, 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1721년, 표트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에서 따온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제정 러시아 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20]
황태자 알렉세이는 표트르 1세의 개혁에 큰 불만을 가졌다. [21] 러시아 국내에서는 알렉세이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알렉세이는 이 소문 덕택에 정부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피난했고,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재판소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 [22] 1718년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23]
1725년 표트르 1세는 자신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를 마쳤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 건설 공사장을 순시 중 인부들이 네바 강에 빠진 것을 보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 당시 후계자인 황태손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정부였다가 두번째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 1세[24]가 차기 황제로 즉위했다. 몇년 뒤 공식 행사에 속옷 차림으로 오래 서 있는 바람에 고열로 사망하고, 황태손이 표트르 2세로 즉위하지만 표트르 2세가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그 후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여제가 정국을 안정시킨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후계 관련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물론 이는 세종대왕과 영조도 마찬가지지만
표트르 1세는 외아들 알렉세이를 황태자에서 폐위시켰고, 알렉세이의 유일한 아들 표트르 2세에게도 좋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만약 표트르 1세가 알렉세이 황태자[25]를 계속 살려뒀다면 표트르 2세 말고도 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표트르 2세가 자녀를 못 얻고 죽더라도 다른 자녀들이 계승할 수 있었고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표트르 3세 이후의 로마노프 왕조는 스웨덴의 홀슈타인-고트로프에서 나왔다.
표트르 1세는 차르 중심의 절대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후 증외손자 파벨 1세와 그 후손들이 전제정치를 하는 바람에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으니 이는 표트르 대제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3 평가
러시아에서는 대체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은,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을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국가이던 러시아에게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26],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문화에서 '중세'란 표현은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는 '고대'라고 쓴다. 이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나 '차르'라고 하는 왕정(슬라브족)일뿐 다른 국가에게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만든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27]를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28]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거기에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29]
또한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업적만큼 실책이 매우 크다. 특히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봉건귀족들을 타도하고 전제군주제 건설에만 중점을 두었지 민중을 생각하는 것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무엇보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수도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해결하다보니 개혁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컸다. 가장 욕먹을 점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동원하여 노임도 제대로 안주고 노예같이 가혹하게 부려먹어 도시 건설을 한것이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달라고 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고 강행헸다. 또한 개혁을 하면서도 러시아 발전의 큰 걸림돌인 계급제를 폐지할 생각은 절대안했고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기만 했다. 표트르 통치기 때부터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시켜 러시아 민중의 삶을 악화시키기만 했다. 이러니 표트르 통치하에서 러시아 민중의 삶은 전혀 나아진게 없었다. 개혁을 하는 와중에도 유럽, 오스만과 벌인 잦은 전쟁은 표트르 1세와 러시아에는 지위 향상과 영토 확장이라는 영광을 얻었지만, 러시아 민중은 가혹한 세금과 전쟁에 시달려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표트르의 근대화 정책 또한 제대로 된 합의같은 것 없이 힘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귀족과 백성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수가 없었고 봉건제의 틀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다보니 러시아는 겉만 바뀌었지 속은 하나도 바뀌지 않아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표트르의 개혁은 사실상 실패한거나 마찬가지다. 특히 민중에게 저지른 폭정 때문에 표트르 1세는 재위기간동안 권리를 억압받는 귀족은 물론이고 민중에게도 폭군으로 증오받았다. 물론 민중에게 한 짓이 저러니 폭군 소리 듣어마땅하지만.
4 이야깃거리
- 누가 러시아인 아니랄까봐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문제는 술취하면 다혈질인 성격이 더러워져 완전 개가 되다보니 이때 비위 거슬리게 했다간 가차없이 두들겨맞기 일쑤였다. 음주로 인해 요로결석을 심하게 앓았는데 죽기 얼마 전에는 오줌을 못 눠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술을 계속 퍼마셨다(…). 방광에 구멍을 뚫어서 오줌을 빼내기도 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폐렴으로 죽었다더니?
- 맥시밀리언 셸이 주연하고 양지운이 더빙한 미국 미니시리즈가 꽤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MBC에서 피터 대제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다만 이 작품은 고증이나 연대기는 엉망이다. 만나지도 않은 아이작 뉴턴이 나오거나, 10년 전에 죽은 영국인 용병장교 찰스 고든이 버젓히 폴타바에서 나온다. 1990년대 러시아에서 만든 전기 영화는 고증으로서는 완벽한 작품이다.
- 훗날 러시아의 장군이 되는 에티오피아 출신의 흑인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을 등용했다. 이때 표트르 1세는 간니발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했으며, 간니발이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자 간니발의 대부가 되었다. [30]
- ↑ 당뇨로 추정되는 병으로 거의 죽기 직전이었고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저하되었다. 누나 소피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제위에 오르기도 힘든 상태.
- ↑ 주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독일 출신들이었다.
- ↑ 쿠쿠이(KyKyй)라고 부르는 서유럽 이주민들의 마을이었다. 당시에 러시아인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모두 독일인이라고 불렀다.
- ↑ 네덜란드인들에게서는 산수와 기하학, 축성술, 항해술을 배웠고 스코틀랜드인과 스웨덴인에게선 전술을 배울수 있었다.
- ↑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청나라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한 소피아에 대한 귀족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사건이 커진 것이다. 또한 표트르가 소피아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데는, 서유럽 출신자들로 만든 용병대의 대장인 고든과 표트르의 두터운 친분 덕분에 최정예부대인 용병대가 표트르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 ↑ 거기다 시체 해부하는 것까지 참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 일단 키부터가 장신 수준이 아니라 거인이기 때문에 무척 눈에 띄었을 것이다.
- ↑ 머무르는 집마다 총탄 자국이 가득하고 바닥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 ↑ 영국에 갔을 때는 겉옷만 걸치고 국왕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고급 식기를 사용하는 데에 서투르기도 하여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 ↑ 조금 변형된 야사에 의하면 주동자에게 자비를 구하면 살려준다고 하자 반란 주동자는 표트르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표트르는 도끼를 들어 손수 세로로 쪼개버렸다고 한다.
- ↑ 은하영웅전설의 라인하르트의 모델이 되는 왕이다.
표트르는 양 웬리? - ↑ 이때,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서 재미있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러시아인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던 보드카를 앞으로는 국가에서만 제조와 판매를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 정부가 벌어들이는 세금의 40%는 보드카 판매에서 나올 정도였다. 물론 표트르 대제는 민심을 얻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무료로 보드카를 지급해주었다고 한다.
- ↑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명, 러시아군은 약 3만 7천명이였는데, 스웨덴측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하고, 눈보라가 유리한 방향으로 불어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러시아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고, 패주하던 러시아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명이 전사했지만 러시아군은 9천여명이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문과 수만정의 머스킷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 ↑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러시아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채었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러시아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러시아군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 ↑ 표트르 대제는 나르바 전투에서 탈탈 털린 대포 숫자를 메우기 위해 러시아 전역 교회의 종 중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다.
- ↑ 칼 12세는 퇴로마저 끊겨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는 치욕을 겪는다.
- ↑ 이때 표트르는 임신한 자신의 정부인 예카테리나 1세와 같이 있었다. 하마터면 러시아 황제 부부가 나란히 동물원 우리에 갇힐 뻔한 일이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오스만 제국 궁전에 칼 12세가 망명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덜덜덜.
- ↑ 서유럽식 콧수염은 오히려 장려했다. 위의 초상화에서 보듯 본인도 콧수염은 길렀고...
- ↑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어간 일은 흑역사. 애초에 페트로그라드 지역은 춥고 습한 지역이라 건설이 어렵다보니 다들 건설작업 하기를 꺼려서 표트르 대제는 강제노동으로 이를 해결했다. 매년 3만명의 농민들이 끌려와서 일해야 했고 추위와 강풍, 물과 진흙탕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작업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
- ↑ 이전 버전에서는 표트르가 임페라토르를 자칭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차르라는 명칭이 이후 임페라토르와 함께 러시아 군주의 정식 칭호라 했지만 그 또한 잘못되었다. 차르라는 명칭은 임페라토르라는 이름이 쓰이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그간 관습상 써온 것을 하루아침에 막아버릴 수 없어 관습상 허용되었던 것. 메메드 2세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을 '술탄' 이라고 하는 것이 관습상 허용되는 것일 뿐인 것과 같은 경우다.
- ↑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에우도키아를 소박놓고 독일인 하녀 출신인 정부 예카테리나 1세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다.
- ↑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이다.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의 직계 조상이다. 참고로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 ↑ 어떤 소문에 의하면 표트르가 손수 고문치사를 시켰다거나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
- ↑ 정확하게는 전시 억류자로 노예로 팔려와서 표트르의 신하의 집의 가정부로 있다가 헌납...된 여자다. 나중에 표트르의 정부로 살았는데, 후에 표트르가 황후를 폐위시킨 뒤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는 다르다.
- ↑ 이 기마상을 보고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청동기마상'이라는 시를 남겼다.
- ↑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 번역본 참고
- ↑ 표트르 대제 이후 가라앉을 때도 있었으며, 농민들에게는 그다지 많이 퍼지지 않은 면도 있다.
- ↑ 100년 이상 떨어져 있는 사건이기에 표트르 대제는 그저 기반을 다지는 정도였기는 하다.
- ↑ 간니발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조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