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제국

세르비아 제국
Српско Царство
국기
1346년 ~ 1371년
위치세르비아,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스,알바니아,
몬테네그로,불가리아,크로아티아
수도스코페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차르
언어세르비아어
종교세르비아 정교
주요사건1346년 건국
1371년 해체
통화디나르
성립 이전중세 세르비아 왕국
멸망 이후보스니아 왕국,오스만 제국

1 개요

중세 세르비아 왕국 네마니치 왕조의 스테판 두샨(Stefan Dušan,1308~1355)에 의해 세워진 제국.

2 역사

동로마 제국이 내분으로 쇠퇴하자 세르비아는 그 틈을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알바니아를 점령하고 최대 영토를 이룩했다. 확장된 세력으로 슈테판 두샨[1]은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영어: Emperor and autocrat of Serbs and Romans[2] // 세르비아어: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 // 그리스어: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Σερβίας καὶ Ῥωμανίας)'를 자칭했다. 즉 차르를 칭한 것이었지만,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슈테판 두샨이 1355년에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슈테판 우로시 5세가 즉위하자,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우선 새로 넓힌 지방을 아직 완전히 세르비아의 지배하에 통합시키지 못했고[3], 알렉산드로스와는 달리 슈테판 우로시 4세에게는 당시 19세였던 아들 슈테판 우로시 5세(Stefan Uroš V)가 있었지만 그는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후와 궁정 관료들에게 매달리기만 하는 나약한 인물이었다[4].

이러다 보니, 정복지이던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저항하며 도로 독립하려고 하고 내전에 시달린다. 이런 가운데 무능한 슈테판 우로시 5세는 1371년에 35세에 후계자 없이 죽었다. 그러자 세르비아는 그대로 전국시대로 돌입. 그후 가장 강력한 지방 귀족이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1329~1389)가 등장하여 세르비아 공국(Serbian Despotate)을 창건했다[5]

한편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세르비아 제국을 재창건한다는 과제를 내걸고 세르비아의 통일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고, 세르비아의 모든 귀족들을 대표하는 맹주 비슷한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당시 발칸 반도에서는, 신흥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나날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라자르는 2번에 걸쳐 오스만 제국을 물리쳐, 당시의 술탄 무라트 1세가 발칸 정복을 단념할까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은 신하들에게 맡긴 채 자기 자신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다른 투르크계 공국들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던 무라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결심했고, 3번째 전투인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를 쓰러뜨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자기 자신도 전사[6]하고 만다[7]. 결국 라자르가 이룩한 세력은 아들인 슈테판 라자레비치가 이어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야만 했고, 이후 헝가리와 오스만 사이를 오가며 나름 이익을 챙겼던[8] 세르비아는 1427년에 세상을 떠난 슈테판 라자레비치의 친족으로 뒤를 이었던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1456년에 죽은 뒤 공작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합병되고 만다[9].

3 그밖에

세르비아 역사에서는 가장 찬란한 리즈 시절 역사이지만 너무나도 짧았기에 세르비아 우익들이나 세르비아 환빠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그래서인지 가상 소설로 세르비아 제국이 잘 유지되어 오스만 제국까지 몰아내고 유럽을 호령한다는 소설도 쓰인 바 있다[10].

4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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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샨'두산 은 별칭이고, 공식 칭호는 슈테판 우로시 4세(Stefan Uroš IV). 네마니치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슈테판' 이었기에, 별명을 가진 왕이 많다. 여담으로 이 때문에 '슈테판' 이라는 이름은 세르비아 제국의 상징과도 같이 되어, 아래에 소개하는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도 독립군주로 행세하면서 자신의 이름에 슈테판을 덧붙였고 세르비아 제국에서 독립한 보스니아왕국의 첫번째 왕도 자신의 이름에 슈테판을 더했다.
  2.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Emperor of the Serbs and Greeks'라고 기재해 놓았지만, '로마 황제'가 되길 원한 두샨의 의도 및 원어를 생각하면 지극히 잘못된 문구다. 동로마 제국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당대인들의 인식은 '동로마(비잔티움) = 로마'였다. 원어상으로도 '로마인(Ромеја, Ῥωμανίας)'이 맞는데 굳이 '그리스인'이라고 쓴 걸 보면, 아직도 동로마를 로마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서방의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3.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이 어찌 됐던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처럼 단명하지는 않은 슈테판 두샨은 '두샨 법전' 이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지만,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부터 헤아려도 24년밖에 안 되는 치세 동안 전통적으로 세르비아의 영토였던 곳과 새로 정복한 영토 사이에 일치감을 심기에는 무리였다.
  4. 실제로 슈테판 두샨은 '강인한 왕(the Mighty)' 이라는 별명을 받으며 대왕으로 인정받았지만, 슈테판 우로시 5세가 받은 별명은 '약한 왕(the Week)' 이었다.
  5. 엄밀히 말하면 세르비아 공국의 역사는 1403년부터이고, 라자르의 세르비아는 'Moravian Serbia' 라 부른다. 이는 라자르 본인은 슬라브어로 공작을 뜻하는 '크네즈(knez)' 를 칭한 반면, 그 아들인 슈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가 1403년에 우호국이었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공작에 해당하는 'despot' 의 칭호를 받았기 때문.
  6. 다만 애매한 것이 누가 무라드를 쓰러뜨렸는지도 기록에 따라 다르고, 아예 전사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뒤 전장을 둘러보다 죽은 척 하고 있던 세르비아 기사에게 암살당했다거나 포로로 잡힌 기사가 무라드를 알현하기를 청했고 그 자리에서 암살당했다는 등 다양한 기록이 전해진다.
  7.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아나톨리아 반도 주둔군 일부를 차출하여 발칸에 보내면 되는 오스만과는 달리 코소보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부은 세르비아에는 더 이상 싸울 병사가 없었다. 즉 전투에서는 지지 않았으되, 전쟁에서는 진 셈.
  8. 일단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드 1세앙카라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내전이 벌어졌고,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143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문서상으로는 봉신으로 삼았지만 봉신이 되는 대가로 영토를 할양해주는 등 후원하여, 사실상으로는 동맹국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쌓아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 발칸 반도 최대의 광산지대 가운데 하나인 노보 브르도(Novo Brdo)가 고향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슈테판 라자레비치는 중세 세르비아 최후의 경제적, 문화적 중흥기를 이룩. 오늘날에는 세르비아 정교의 성인으로 추증되어 있다.
  9. 여담으로 계승분쟁 과정이 참 안습한데, 세르비아 제국 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왕국이 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 보스니아 왕은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헝가리 왕에게 '제 아들을 세르비아 공작에 앉힐게요. 그럼 세르비아랑 보스니아가 합쳐져서, 이교도에 맞서 훨씬 튼튼한 완충국이 될 거임' 이라고 제안했고, 당시의 헝가리 왕 마티아슈 1세는 흔쾌히 승낙했다. 결국 1456년에 오스만 제국이 침공했을 때 이웃나라의 왕자를 공작으로 모시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나라는 망했어요라고 인식하고 있었던데다 보스니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에 가톨릭을 강요하고 있었기에,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10. 슈테판 두샨의 후계자가 슈테판 우로시 5세가 아니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였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상당히 늦추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라자르는 생전에 황제는커녕 왕도 칭하지 못했지만, 세르비아 민담에서는 '라자르 황제'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