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첼리비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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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오르제 에네스쿠의 루마니아 랩소디(Rapsodia română).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인 1978년 부쿠레슈티에서 지휘한 영상이 남아있다.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1912년 7월 11일[1] ~ 1996년 8월 14일). 루마니아 태생의 지휘자. 지금은 작고한 유명 지휘자 중 하나이다. 그가 한번 맡은 오케스트라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청소부"라는 별명도 있다고 한다.

1 생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를린 필을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써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독일에 남아서 활동했던 지휘자들[2]은 줄줄이 연합국에 의해 연주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오케스트라를 재건하여 연주활동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베를린 필은 지휘자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해외에 있던 발터, 셀, 라이너 등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3] 결국 베를린 필은 레오 보르하르트라는 어중간한 지휘자를 간신히 영입하여 공연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불과 석달만에 보르하르트마저 연합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베를린 필 단원 중 한 사람이 첼리비다케라는 젊은 합창지휘자를 추천했고, 첼리비다케는 아마추어 합창단 이외에는 지휘 경력이 전무했음에도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2년 후인 47년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할 때까지 베를린 필을 이끌었다. 하지만 첼리비다케는 단원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걸핏하면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점차 베를린 필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푸르트벵글러도 젊은 사람(첼리비다케)이 너무 기술적 정확성에만 집착하여 베를린 필을 미국 오케스트라처럼 만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종전 직후 연간 수십회씩 베를린 필을 지휘했던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 복귀 이후 점차 연주회 횟수가 줄어들어 1954년에는 단 네 번만 지휘했을 뿐이었다.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이 자신과 계속 연주를 하고 싶으면 단원들을 싹 다 물갈이해야 한다고 공언하는 등 악단과 불화는 깊어졌다. 마침내 1954년말 리허설에서 단원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지휘대를 떠나버렸고 이것으로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의 관계는 잠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갑자기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게 되었다. 불과 두달 후에 미국 순회 공연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던 베를린 필은 당장 새로 상임지휘자를 뽑아야 했고 선택된 이는 카라얀이었다. 이후 첼리비다케는 몇십 년 동안 베를린 필을 지휘하러 온 일이 없었고, 만년인 1992년이 되어서야 한 차례 지휘하였다. 베를린필이 카라얀을 선택한 이유가 첼리비다케보다는 카라얀이 더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는 설이 도는데 사실은 첼리비다케 개인의 성격적인 문제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독불장군 그 자체로 걸핏하면 리허설 현장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리는 첼리비다케의 성격을 베를린필 단원들이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혀지고 있다.

첼리비다케는 예술의 순수성을 매우 추구하여 음반 녹음을 꺼리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음반 녹음을 꺼린 것은 아니었다. 데뷔 초인 1940년대 후반에는 꽤 열심히 음반을 녹음했는데, 소련의 베를린 봉쇄 위기로 전운이 감돌고 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몇번 갈아타고 얼마전까지 적성국가였던 영국 런던까지 건너가 DECCA에서 음반 녹음에 임할 만큼 열성을 보였다. 베를린필을 지휘한 이 시기의 녹음들은 의외로 양이 많아서 박스 음반으로 발매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시점부터 녹음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녹음을 혐오한다는 발언과는 모순되게도 뮌헨 필을 맡기 전까지 커리어는 거의 전부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였다. 때문에 그의 연주의 상당수가 방송용 녹음으로 남아있다. 뮌헨 필 역시 공연녹음에 열심이었던 바이에른 방송국 산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같은 홀에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연이 실황으로 녹음되었다. 사실 그가 만년에 녹음을 전혀 안한 것도 아니다. 1990년 일본 도쿄 산토리홀에서 지휘한 브루크너 교향곡 6번, 7번, 8번 영상물이 그의 허가 아래 소니에서 공식 발매되었는데, 당시 첨단 매체였던 LD로 발매되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극도로 녹음을 혐오하게 되면서[4] 자신의 사후 음반을 내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첼리비다케의 아들의 주도로 기록용으로 녹음해 놓은 음원을 음반화하였다. 당시 첼리비다케 음원 판권을 두고 메이저 음반사들의 입찰전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결국 입찰전에서 승리한 EMI에서 엄청난 양의 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유력한 경쟁자였지만 입찰에서 탈락한 DG는 첼리비다케가 뮌헨 필 이전에 맡았던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 등의 음원을 음반화시켰다. 그리고 음반시장이 침체된 2000년대 후반, 염가 박스반까지 나오면서 아주 사골을 우려내고 있다.불효자

2 연주 성향

무진장 느리게 지휘하는 걸로 유명하다. 일본 선불교도였다고 하는데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느려야 곡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온다"는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선불교의 종교철학을 자신의 음악에 그대로 도입한 첼리비다케는 긴 호흡으로 한음 한음 연주하며 클래이맥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높은 산을 힘겹게 오를수록 정상에서의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듯 그의 연주 역시 절정부에서는 무아지경의 희열을 느끼게 한다.

사실 첼리비다케가 젊은 나이부터 느린 템포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젊은 시절에는 제법 빠른 템포의 연주도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템포가 비가역적으로 차차 느려졌다. 같은 레퍼토리를 보더라도 라디오 심포니를 지휘할 때의 연주보다 뮌헨 필의 연주가 더욱 느리고, 뮌헨 필 시기도 임기초에서 임기말로 갈수록 비례하여 템포가 더욱 느려진다. 유심히 살펴보면 비슷한 시기의 연주인 경우에는 뮌헨 안방에서 연주한 것보다 해외 순회공연에서 연주한 것이 공통적으로 약간씩 더 빠르다.

안톤 브루크너에 정통한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종교적인 브루크너의 교향곡들과 첼리비다케의 음악 철학은 환상적인 마리아주를 들려준다. 애청자라면 반드시 들어봐야 할 음반들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루크너 지휘자 중 한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람스, 슈만 등의 연주에도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주지만, 베토벤에 있어서는 특유의 느린 템포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공연 중 기합 소리를 넣거나 가끔 지휘봉으로 보면대 등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는데 이 소리가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3 여담

여담으로 번스타인이 떠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그랬듯이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첼리비다케의 사후 망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원래 첼리비다케가 오기 전에 뮌헨 필이 그닥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아니었다.[5]

그리고 첼리비다케는 특유의 독선적 성격으로 츤데레 다른 지휘자들을 까는 것으로도 꽤 유명하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음표공장
클라우디오 아바도 : 전혀 재능이 없는 지휘자.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3주는 버틸수 있지만 아바도의 지휘를 들으면 심장발작이 일어날 것이다.
칼 뵘 : 마치 감자푸대가 지휘하는 것과 같다.[6]
레너드 번스타인 : 그는 내 지휘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자다.[7]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는 재능있는 사업가가 아니면 제대로 듣지 못하는 지휘자. 카라얀이 유명한 것은 코카콜라가 유명한거와 다름없다.
로린 마젤 : 칸트를 읽는 두 살 짜리 어린애
카를로스 클라이버 : 그는 음악이란 무엇인지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을 것
리카르도 무티 :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교양이 결여된 지휘자
그 외에도 많은 지휘자를 깠는데 아는분은 추가바람

첼리비다케의 독설에 대응하여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슈피겔지에 첼리비다케를 비판한 글을 투고한 것은 유명하다.

  1. 그레고리력이 아닌 첼리비다케가 태어났을 당시 루마니아에서 통용되던 옛 율리우스력으로 따지면 1912년 6월 28일이 된다
  2.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뵘 등
  3. 당시 베를린 필이 제시한 개런티는 미국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4. 녹음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선불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중론이다. 선불교의 空에 심취하면서 음악은 단 한번 일회성으로 사라지는 것이 옳다는 철학이 세워졌고, 거기에 완벽주의적인 첼리비다케의 성격이 실연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음반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유라고
  5.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부임하여 조금 살아나는 기미를 보였지만, 틸레만은 이내 드레스덴으로 자리를 옮겼고 후임으로 로린 마젤이 이끌었다. 로린 마젤 시절에 내한 공연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마젤의 급사 이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명되어 2020년까지 지휘하게 되었다. 2015년 내한 공연에서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 이제 러시아 레파토리 한정으로 뮌헨필의 부활을 기대해봐도 좋을듯 하다.
  6. 사족으로 그가 지휘할 때 구부정하게 서 있는 폼을 빗대어 낙타라고도 했다.
  7. 하지만 나중에 그는 번스타인 사후에 자기가 봤던 지휘자중에서 재능이 넘쳤다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