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1933년 6월 26일 ~ 2014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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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지휘자.

1 생애

밀라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교육가였던 아버지 미켈란젤로 아바도와 피아노 교사 겸 아동문학가였던 어머니 마리아 카르멜라 사바뇨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밀라노의 유명한 음악가 가문인 아바도 가문 출신으로 일가 친적이 밀라노 음악계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당시 밀라노에선 아바도 가문에 찍히면 음악을 접어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이러한 환경 덕분에 어릴 적부터 피아노 연주를 비롯한 기초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고, 열여섯 살 때 고향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화성법, 대위법을 본격적으로 배웠고,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문호 살바토레 콰시모도에게 문학 수업을 듣기도 했다.

1953년에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는 시에나의 키지아나 음악원에서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때 사귄 동창들로는 훗날 역시 지휘자로 대성하는 주빈 메타다니엘 바렌보임이 있었다. 특히 메타는 아바도에게 빈으로 유학하지 않겠냐고 권했고, 아바도는 이 권고에 응해 시에나에서 지휘 코스를 마친 뒤 1955년에 메타와 함께 빈으로 가서 여러 유명 지휘자를 양성하고 있던 한스 스바로프스키 문하에 들어갔다. 빈에서 공부하는 동안 메타와 함께 카라얀이 종신음악감독으로 있던 합창단 빈 징베라인의 베이스 파트에 참여하여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다.

스바로프스키에게 배운 뒤 1958년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 탱글우드에서 열리는 음악제의 부속 행사인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지휘 콩쿠르에 참가했고, 여기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지휘 경력을 시작했다. 1960년에 데뷔한 고향의 라 스칼라 오페라를 비롯한 이탈리아 각지의 오페라극장에서 객원 출연하면서 오페라 무대의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동기인 주빈 메타가 LA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 등 잘나가고 있는 것에 반해 상대적으로 아바도는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 채 이탈리아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며 고전하고 있었다. 1963년에는 뉴욕 필하모닉에서 주최한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국제 지휘 콩쿠르에 참가해 우승했고, 덕분에 레너드 번스타인의 조수로 채용되어 5개월간 뉴욕 필에서 일했다.

1965년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말러 교향곡 2번을 지휘하여 성공을 거둔 것이 아바도의 경력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바도 본인은 이때 연주가 별로여서 스스로 실망과 자책을 하면서 지휘했다고 하는데, 연주 후 반응이 좋아 놀랐으며, 나중에 녹음을 들어보니 생각보다는 상당히 괜찮게 연주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후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곧 맨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필두로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자로 초청되었다. 또 이를 바탕으로 DG와 녹음 계약이 성사되었다. 당시 독일계 지휘자 일색이었던 DG는 레이블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비독일계 지휘자들을 적극 영입하기 시작했는데 아바도는 그 첫주자였다. DG와 계약을 맺으면서 빈 필,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등 여러 명문 오케스트라와 녹음,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60년대 중후반 부터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 유수의 악단들에 객원 출연을 시작했고, 1968년에는 라 스칼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해 수많은 오페라들을 성공적으로 상연하면서 콘서트와 오페라 양쪽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1976년에는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에서 조직한 유럽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이후 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에 부임하면서 이후 평생에 걸쳐 이어진 청소년 악단 조직 활동에도 뛰어들었다. 1979년에는 앙드레 프레빈의 후임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부임하여 1987년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동시에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1986년에는 라 스칼라에 이어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여기서는 정통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의 레퍼토리들 외에도 무소륵스키보리스 고두노프와 호반쉬나 같은 러시아 작품, 슈베르트의 피에라브라스와 로시니의 랭스 여행 등 좀처럼 상연되지 않는 듣보잡 작품들까지 올리는 혁신가 기질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시에 유럽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에 이어 두 번째로 비(非) 유럽연합 국가 출신의 청소년 연주자들까지 포괄하는 범유럽 악단인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을 창단해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DG와 계약한 덕분에 70~80년대에는 빈 필과 비교적 많은 녹음을 남길 수 있엇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이후 빈 필과의 관계는 점차 단절되었다. 1991년 빈 필 신년음악회에서는 빈 왈츠와 폴카만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하던 악단의 전통을 깨고 로시니,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작품을 선곡하면서 큰 파장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91년 이후 아바도는 더이상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 초대되지 못했다. 또 빈 국립오페라의 이사진과도 갈등이 생겨 1991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에서도 물러났다. 아바도와 빈 필과의 관계는 베를린 필에 선임되기 이전부터 미리 잡혀있던 공연과 녹음 계획을 다 소화한 1994년 이후에는 연 1회 정도의 연주회만 가질 뿐이었다.

1980년대 후반 아바도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맡아왔던 게오르그 솔티가 90년 쯤에는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진작부터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아바도는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던 만큼 유력한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바도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사임한 것도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결국 시카고 심포니의 후임지휘자 자리는 바렌보임이 차지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아바도는 메타의 후임 자리를 물색하던 뉴욕 필과 긴급하게 접촉하여 계약 성사 직전에 있었다. 그런데 뉴욕 필과 계약이 거의 성사 단계에 있을 때 뜬금없이 베를린 필이 차기 상임지휘자로 아바도를 선택했다는 기사가 뜬 것이다.

1989년 무려 34년 동안 베를린 필의 수장으로 있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직책을 사임한 지 몇 달 후에 세상을 뜨자, 베를린 필은 민주적인 투표 방식에 의한 상임 지휘자 선출을 도입해 아바도를 상임 지휘자로 뽑았다. 투표에 앞서 단원들 간의 오랜 의견 교환이 있었으며, 투표 당일에도 하루 종일에 걸친 난상 토론 끝에 어느 정도 의견의 합의를 본 후 투표를 실시했다고 한다. 베를린 필의 차기 지휘자로 거론된 인물은 여럿 있지만 바렌보임, 마젤, 무티, 오자와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막판에는 바렌보임과 마젤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양 후보를 지지하는 단원들 간의 대립이 워낙 첨예해서 바렌보임이나 마젤이 될 경우 퇴단하겠다고 선언하는 단원들이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바렌보임과 마젤에 대한 단원들의 호불호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타협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제3안으로 뜬금없이 아바도가 거론되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아바도와 베를린 필과 브람스 교향곡 3번을 공연했는데, 이때 리허설에서 아바도의 민주적인 지휘 방식이 단원들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1] 대립각을 세우던 단원들은 결국 아바도로 타협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아바도를 선택한 베를린 필의 결정에 대해서는 세계 언론은 물론 아바도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당시 성음 라이센스 음반으로 클래식을 접하던 국내음악애호가들에게도 아바도의 지명은 충공깽이었음은 물론이다.[2]

뜬금없는 아바도의 선출은 세계는 물론 아바도와 베를린 필 당사자들에게도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 다니엘 스타브라바도 아바도의 선출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아바도 본인도 베를린 필의 직책은 예상 못했다고 하면서 바로 수락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베를린 필에 취임한 아바도는 카라얀의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그가 소홀히 했던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고,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꾀하는 여러 기획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악단의 활동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현대음악을 중시하는 시도는 베를린 청중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베를린 필하모닉 홀 화장실에 적힌 비판적인 낙서를 보고 아바도가 충격을 받아다고도 전해진다. 이와 더불어 문학과 접목하여 레퍼토리를 구성하려는 "문화운동"을 시도했다.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단지 같은 소재를 취했을 뿐 음악적으로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을 함께 선곡하여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디 차이트'지는 "세련된 밀라노의 교양인인 아바도가 야만적인 베를린 청중들을 얼마나 개화시켰나?"하고 비아냥거렸다. 아바도가 베를린 시민들로부터 외면받는 동안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도 자주 객원 지휘하면서 베토벤, 브루크너, 바그너 등의 정통 독일 고전 낭만주의 음악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호평을 받았다.

취임 공연인 말러 교향곡 제1번이 큰 히트를 쳤지만 이후에 발매된 음반들은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93년 베를린 필과의 두번째 말러 녹음인 제5번 교향곡이 큰 기대 속에 발매되었다. DG사가 새로 개발한 4D 방식의 녹음이라는 점을 앞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이 음반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녹음한 당해에 편집을 끝내고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유래없이 논쟁적인 리뷰들을 양산했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연주였지만, 문제는 말러 교향곡 제1번의 큰 성공으로 음악애호가들이 기대가 너무 높아졌던 데 있다. 결국 아바도의 새 말러 5번은 번스타인과 빈 필의 음반과 비교당하며 난도질 당하고 말았다. 이어 발매된 빈 필과의 말러 교향곡 제2번 역시 아바도 자신의 이전 녹음만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녹음들은 리뷰어들에게 이전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DG도 아바도 음반의 마케팅을 크게 줄여서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과 같은 대작이 소리소문 없이 발매되기도 했다.[3]

음반 판매 실적이 좋지 않자 DG와의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아바도와 소니 간에 새로운 계약이 맺어져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모차르트 교향곡 등이 발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진이었던 DG와는 관계는 악화되었다. DG는 아바도라고 해서 정명훈과 같은 다른 소속 아티스트와 다른 대우를 해주는 것을 거부했다. 마침내 1997년 아바도는 DG와 완전히 결별을 선언하고 EMI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EMI에서 발매된 음반은 베를린 필의 음향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몇 개월 후에 DG로 조용히 다시 돌아왔다.

음반 판매고의 급감은 베를린 필과도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카라얀 시절에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음반, 영상물 취입 및 카라얀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본봉의 다섯배 가량의 부수입을 올렸다. 카라얀 시절 1년에 평균 25개 정도 발매되던 음반은 아바도 시절 연 3회 정도로 급감했다. 수입이 급감하자 여러 단원들이 베를린 필을 퇴단하여 교수나 솔로이스트로 전향했다. 특히 1992년~1993년에는 관악기 수석들이 대거 퇴단하여 싹 물갈이 되었다.[4]

평론가들 뿐만아니라 단원들도 베를린 필의 중후한 음색을 희석시키는 아바도의 해석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리허설에서 아바도가 금관악기와 팀파니 소리를 줄이라고 지시하면 단원들은 악보에는 포르테시모로 써있다고 항변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1979년부터 콘서트마스터를 역임하고 있는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이탈리아식의 밝고 가벼운 해석을 추구했던 아바도의 해석에 다수의 단원들이 동의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알려진 바와 같이 음악적으로 자주 부딪혔다고 술회했다. 베를린 필 금관단원들도 훗날 인터뷰에서 카라얀 시절 강렬한 금관사운드를 추구했던 베를린 필의 전통을 아바도가 evil, enermy로 치부하면서 완전히 부정했던 일종의 암흑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당시 리허설 중에 단원들과 고성이 오갔다는 소문들이 밖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바도의 민주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리허설 방식은 처음에는 단원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원들은 이러한 방식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바도는 종종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고 리허설에서 여러 템포로 시도해 본 후 단원들에게 어떤게 좋을지 물어보곤 했는데, 이런 방식은 오히려 단원들의 불만을 유발했다. 아바도의 이러한 리허설 방식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불만이 컸다. 1997년에 이르러서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1997년 12월 20일자 '프랑크푸트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 기사는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리허설 장면을 폭로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연습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냐고 아바도에게 따지는 단원, 아바도의 리허설 와중에 잡담과 토론하는 단원, 리허설 시간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지를 쓰는 단원 등의 모습을 공개한 기사가 나오자 아바도의 리더쉽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베를린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베를린 필이 아바도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이후에 더이상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이 보도가 나온지 며칠 후인 1998년 2월 13일 아바도는 더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자진해서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해버림으로써 베를린 필에 스스로 먼저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아바도가 재계약 포기를 선언한 이후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는 서서히 수습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0년 7월에는 위암 수술을 받고 몇 개월 간 공백 후에 복귀했는데, 복귀 후 완전히 달라진 외모로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에 충격을 주었다. 극도로 초췌해진 아바도의 외모로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안타까움을 표했다. 위암 수술 이후 베를린 필과의 적대적인 관계도 다소 회복되어 베를린 필과 마지막 두 시즌은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퇴임 후에는 주로 이탈리아의 밀라노 스칼라좌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간헐적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하긴 했으나 일년에 한번 정도였다.[5] 2003년에는 스위스루체른을 본거지로 하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인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2004년에 이탈리아 볼로냐를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를 결성해 이 악단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루체른에서는 주로 낭만에서 현대에 이르는 대작들 위주로 프로그램을 짰고, 오케스트라 모차르트에서는 바로크에서 초기 낭만에 이르는 곡들을 시대연주와 절충한 방식으로 연주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만년에는 위암 수술 이후로 건강 상태가 들쑥날쑥해지면서 연주회 일정의 취소나 축소가 잦아졌고, 특히 2013년 8월 루체른 페스티벌에서의 연주회 이후 갑작스럽게 위암이 악화되면서 연주회 일정이 계속해서 취소가 되었다. 그리고 2014년 1월 20일에 볼로냐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주요 수상 경력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상 (1958)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니콜라이 금메달 (1980)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84)
오스트리아 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금장 (1994)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1급) (1994)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1994)
빈 시 명예반지 (1994)
그래미상 클래식 독주와 관현악 협연 부문 (1997)
독일 국제청소년음악재단 뷔르트상 (2001)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성장 (2002)
독일 음악비평가상 (2002)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2003)
일본 타카마츠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2003)
이탈리아 음악비평가상 (2003)
뒤셀도르프 키테라 음악재단 키테라상 (2004)
스페인 유디 메뉴인 음악상 (2006)
이스라엘 볼프 재단 볼프상 (2008)
이탈리아 상원 종신의원 (2013~14)

3 음악 스타일

오페라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답게 이탈리아 오페라에 상당한 강점을 보였지만, 어릴 적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의 레전설들이 출연한 여러 관현악 연주회를 실연으로 보고 자란 경험 때문인지 표준 독어권 레퍼토리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또 동향인 루이지 노노살바토레 스키아리노를 비롯해 피에르 불레즈,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죄르지 리게티, 볼프강 림, 쿠르탁 죄르지, 베아트 푸러 등의 현대음악 작곡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여러 작품들을 초연 혹은 재연하는 등 현대음악 공연에도 적극적이었다. 다만 결과물은 좀 별로라는 말도 있다

정통 레퍼토리에서는 베를린 필에 취임할 때까지는 음향적인 측면에서 무게를 덜어내는 실내악 지향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전반적인 해석의 기조는 20세기 초중반의 거장들이 확립한 전통에 두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시대연주 쪽의 연주 기법이나 해석을 많이 받아들여 이전 연주들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고전주의 작곡가 베토벤과 모차르트 해석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단적인 예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1980년대 후반에 빈 필과 만든 것과 2000년대 초반에 베를린 필과 만든 것을 비교하면 그 변화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반면 브루크너말러 등 후기 낭만 계열의 작품들은 여전히 비교적 정통적인 해석을 고수하는 편이었고, 이런 점에서 중도적인 성향의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다.

과거의 지휘자들이 수시로 하곤 했던 악보의 변형 관행에도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2000년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그 동안 통용되던 악보가 아닌 조너선 델 마 편집의 베렌라이터 신판 전집 악보를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6] 그러나 아바도가 악보의 가필에 대해서 항상 완고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아바도가 악보 가필에 엄격했던 것은 그의 활동 중기에만 해당한다. 시대연주의 영향을 받기 전 젊은 시절은 물론이고, 만년에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베토벤에서도 관습적인 수정을 일부 채택하기도 했다. 또 모차르트 레퀴엠 연주에서는 여러 판본을 혼합한 자신만의 판본으로 연주하였는데, 이는 연주의 다양성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악보 자체에 수정을 가하는 것을 배격하는 원리주의자들에게는 크게 비판받을 일이다.

주류 레퍼토리인 독일 고전 낭만주의 계열의 음악을 어느 정도 소화했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은 좀처럼 지휘하지 않았다. 특히 오페라 지휘자로써 활발하게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된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위주로 편중되어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특히 바그너,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거의 지휘하지 않았다. 바그너 중에서는 가장 낭만적인 로엔그린만이 디스코그라피에 남아있을 뿐이다. 브루크너 교향곡도 드물게 지휘했는데, 브루크너의 대표작인 8번은 끝내 평생 지휘하지 않았다.

아바도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분야인 이탈리아 오페라에 있어서도 의외로 레퍼토리가 편중되어 있는데, 거의 베르디에 집중되어 있다. 베를린 필 재직 시절도 콘서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이 베르디를 연주할 일이 거의 없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물론, 발트뷰네 콘서트, 송년음악회 등에서 꾸준히 베르디를 지휘했다. 그밖에 때때로 로시니의 작품을 지휘하였지만, 의외로 푸치니를 거의 전혀 지휘하지 않았다. 그의 방대한 디스코그라피에 푸치니가 전혀 없다!!!

청소년 음악 교육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생애 란에서도 언급했지만 청소년 관현악단을 두 개나 만들 정도로 이 분야에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해당 악단의 단원들이 나이가 차 퇴단하자, 이들 중에서 단원을 뽑아 유럽 실내 관현악단(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 출신)과 말러 실내 관현악단(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 출신)이라는 두 실내 관현악단을 결성하면서 연속성을 가지게 만들기도 했다. 또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관현악 운동인 엘 시스테마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직접 현지로 가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을 비롯한 악단들을 지휘하기도 했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 모차르트 역시 젊은 연주자들을 대거 영입하는 식으로 구성했다.

음악회에서 극적인 효과를 싫어하는 점잖은 이미지로 알려져 왔다. 특히 LD로 발매되어 화제를 모았던 베를린 필 취임 공연의 말러 교향곡 제1번 리허설에서 악보에 지시된 대로 호른 단원들이 기립하자 기립하지 말고 벨만 들고 연주하라고 지시한 장면이 회자되면서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성향이 달라져 콘서트에서 다른 지휘자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작위적인 효과를 자주 사용하였다. 93년 베를린 필 송년음악회에서는 합창석에 기둥처럼 솟은 높은 단을 만들어 성악가들이 그 위에 서서 부르도록 하여 시각적으로 큰 효과를 주었다. 또 말러 교향곡 3번 마지막 악장에서 금관악기에 검은 모자(베를린 필)나 보자기(루체른 페스티벌)를 씌워 연주하게 한 경우, 말러 교향곡 제9번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의 마지막 악장, 모차르트 레퀴엠 등에서 무대 조명을 어둡게 하고 연주자 보면대에 스탠드를 켜서 연주하게 한 경우, 말러 교향곡 제2번과 제5번 등에서 악보 지시에 관계 없이 호른 단원 등을 기립시켜 연주하게 한 경우 등이 있다.

2006년 로마에서는 자신이 지휘하기로 되어있던 음악회에서 인터미션이 끝나고 무대에 오르자마자 지휘봉을 객석에 있던 두다멜에 건내 두다멜이 말러 교향곡 제5번 전곡을 지휘하는 퍼포먼스 생쇼 를 벌리기도 했다. 다행히 고국이서 그런지 큰 욕은 안먹은 듯 하다.

4 음반사

음반 녹음은 주로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많이 했지만, 필립스나 CBS(이후 소니 클래시컬), 데카, EMI, RCA 등 여타 메이저 음반사들에서 몇몇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대다수의 음반들은 DG에서 녹음되었다.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DG와 계약을 맺었다. DG측에서 전략적으로 키운 영건이다. 아직 이탈리아에 활동영역이 한정되어 있던 시절부터 DG는 아바도를 베를린 필, 빈 필, 런던 심포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연결하여 음반 녹음을 진행했다. 상술한 두 차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7].[8], 베를린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 런던 교향악단 재임기에 남긴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 유럽 실내 관현악단과 남긴 슈베르트 교향곡 전집, 베를린 필과 빈 필, 시카고 교향악단 등과 녹음한 것을 합친 말러 교향곡 전집 등 굵직한 교향곡 전집 프로젝트 음반들도 모두 DG에서 녹음되었다. 오페라 쪽에서도 베르디의 맥베스, 돈 카를로, 가면무도회, 시몬 보카네그라, 아이다, 팔스타프, 로시니의 신데렐라, 세비야의 이발사, 알제리의 이탈리아인, 랭스 여행, 슈베르트의 피에라브라스, 무소륵스키의 호반쉬나 등이 모두 DG에 속해 있다.

초기에 DECCA에서 몇 장의 음반을 낸적이 있으나 곧 DG와 전속계약을 맺으면서 DECCA에서는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EMI에서 음반을 낸 적이 있다. DG와 계속된 마찰 끝에 DG와 계약을 파기하고 돌연 EMI로 완전 이적하였다. 당시 음악계에서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생소한 빨간 딱지 음반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도 가쉽거리였다. 결국 몇 개월 후에 결국 DG측과 재계약을 채결하고 다시 돌아왔다. 결국 DG의 재계약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EMI를 이용해 먹은 감이 있다. EMI 지못미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에 필립스에서 음반을 낸적이 있다. 내연녀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와 음반을 내기 위해서였다. 뮬로바의 전속사가 필립스였다.

5 사생활

음악 신동이었다는 점이 주로 부각되기는 하지만, 어릴 적에는 음악 외에도 상당한 독서가로 유명했다. 콰시모도 문하의 문학 수업까지 들었다는 이력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생전에 남긴 여러 인터뷰나 에세이를 봐도 카프카마키아벨리, 도스토옙스키 등의 대문호들이 남긴 명문 등을 자주 인용하는 등 상당히 지성적인 인물이었다. 베를린 필과 개최한 여러 종합예술 지향 공연이나 빈 모데른 같은 현대예술제에서도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테마로 하거나 괴테셰익스피어의 극음악을 공연하면서 관록있는 배우들인 브루노 간츠[9]나 케네스 브레너, 주디 덴치 등을 기용해 실제 연극처럼 대사가 곁들여진 음악을 들려주는 등의 면모도 이러한 성격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이었는데, 라 스칼라의 음악 감독 부임 후 오페라극장 노동조합과 이탈리아 공산당, 극장장 등의 협력을 얻어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볼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고 공개 문화 포럼을 개최해 비음악인들의 예술 토론을 활성화하는 시도도 했다. 또 베를린 필의 전임자들이었던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과 달리 사회적인 사건에 대한 공개적 발언도 자주 하는 등,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성찰도 끊임없이 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처럼 쉽게 노발대발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뭔가 꼬인 일이 있으면 잠시 온건한 모습을 보이며 혼란을 가라앉힌 뒤 자신의 주장을 조용히 밀어붙이는 정치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베를린과 빈,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도 별로 꿀리는 기색 없이 큰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소 베일에 싸여 있다. 기자들도 캐려다 포기했다 혼외자녀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자녀는 총 네 명이다.

첫번째 부인인 Giovanna Cavazzoni과는 1956년에 결혼하여 1968년에 이혼했다. 첫번째 결혼기간 동안 아들과 딸을 한명씩 두었으며, 아들 다니엘레 아바도는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추모 분위기 때문에 몸값이 상종가를 치고 있다고 한다.

두번째 부인인 Gabriella Cantalupi과의 결혼생활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한 명의 아들이 있다.

두번째 결혼기간 중에 1986년부터 91년까지 5년간 빈에서 26세 연하의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와 두집살림 동거했다. 뮬로바는 23세였던 1983년 단신으로 소련을 탈출하여 서방으로 방명하여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미국과 유럽을 떠돌다가 84년부터 빈에 거주하고 있었다. 빈 음악계의 정점에 있던 50대의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과 가족과 생이별하고 떠돌던 20대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와의 원조교제 만남이었다. 아바도는 뮬로바와 녹음을 위해 뮬로바와 계약되어있던 필립스에서 음반을 내기까지 했다. 아바도와 뮬로바 사이에서는 미샤라는 이름의 혼외 아들이 있다. 아바도는 미샤의 임신 7개월에 뮬로바를 떠났지만 양육비는 지속적으로 지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초 한 방송사에서 촬영된 뮬로바의 다큐멘터리에는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연주자 생활을 병행하는 그녀의 딱한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근래의 뮬로바의 인터뷰를 보면 아바도와 헤어진 이후에는 완전 관심 끊고 지내는 듯. 아바도의 건강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일반 음악애호가들보다도 훨씬 늦게 알게 된 듯하다.

6 기타

1973년 3월 27일 ~ 28일 이틀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화여대 강당에서 내한공연을 했다. 당시 서울시민회관이 화재로 전소된 후였기 때문에 이대 강당에서 공연을 했다. 아바도와 빈 필의 내한공연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는데, 특히 베토벤 영웅에 대한 평이 안좋았다. 정관호씨가 레코드음악에 쓴글에는 왠 꺼다리 미식축구선수 같은 지휘자가 나와서 마구 흔들어대다가 들어가버렸다고 혹평했다. 아직 아바도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이라 빈 필이라 잔득 기대했는데 왠 듣보잡이 지휘하냐는 반응이었는 듯. 사실 아바도의 빈 필 영웅 음반을 들어보면 당시 국내에 많이 알려졌던 카라얀, 뵘 등의 영웅과는 해석상 차이가 크다.

아바도도 이 내한공연에 대해 매우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에 취임한 후 객석과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진흙이 질퍽한 길을 지나 공연장까지 갔던 일을 회상하고 있다. 또 철길 옆에 있는 공연장(이화여대 강당)에서 공연했는데, 공연 중에 기차가 지나가 홀이 흔들렸다고 한다. 베를린 필과 내한할 계획이 있냐는 객석의 질문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1. 아바도 본인도 이것이 자신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2. 당시 DG, DECCA, Philips 세 음반사를 보유하고 있던 폴리도어와 라이센스계약을 맺었던 성음음반은 카라얀, 뵘, 번스타인, 솔티, 쿠벨릭 등 네임밸류있는 지휘자들의 음반을 중심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이들과 레퍼토리가 중복되던 아바도의 음반은 라이센스로 잘 발매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추천서적이 몇년 후에 번역되어 들어오던 터라 국내음악애호가들에게 아바도는 잘 거론되지 않던 지휘자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내한하여 국내 음악계에 큰 센세이션과 충격을 일으켰던 것이 이로부터 불과 5년 전이었음을 상기하자.
  3. 90년대 후반부터 때마침 음반계의 불황이 닥쳐 메이저 음반사들은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4. 로타어 코흐, 게르트 자이페르트, 칼 하인츠 쵤러 등이 동시에 퇴단했다.
  5. 나중에는 좀 더 빈도가 높아졌다.
  6. 아바도 이전까지 베렌라이터판은 대개 원전연주 단체가 택하고 있었지만, 아바도 이후로는 현대악기를 사용하는 일반 악단들에서도 채택 빈도가 늘기 시작했다.
  7. 사실 전집은 80년대에 빈필과 녹음한 것, 베를린 필과 2000년에 베를린에서 녹음한 것, 그리고 역시 베를린 필과 2001년 로마에서 실황으로 녹음한 것으로 3가지이다. 그 중 베를린에서 녹음한 음반은 아바도의 의견에 따라 폐기되었다.
  8. 물론 전집은 3가지 다 구할 수는 있다.
  9.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다미엘을, 몰락에서 히틀러를 열연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