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의 역대 황제 | |||||
16대 공황제 조현 | ← | 17대 단종 민황제 조하 | → | 18대 소황제 조병 |
묘호 | 단종(端宗) | |
시호 | 유문소무민효황제(裕文昭武愍孝皇帝) | |
연호 | 경염(景炎, 1276년 5월 ~ 1278년 4월) | |
성 | 조(趙) | |
휘 | 하(昰) | |
생몰기간 | 1269년 ~ 1278년 5월 8일 | |
재위기간 | 1276년 6월 14일 ~ 1278년 5월 8일 |
휘는 조하(趙昰). 묘호는 단종, 시호는 유문소무민효황제(裕文昭武愍孝皇帝), 연호는 경염(景炎).
생몰 : 1269년~1278년, 재위 : 1276년 ~ 1278년
제15대 황제 송도종의 3남으로 제7대 송공제의 이복 형이다.
황후 전씨의 소생이었던 공제와 달리 숙비 양씨의 소생, 즉 서자였기 때문에 이복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원나라에게 요충지 양양이 함락되고 도종이 죽은 후 나라가 박살나는 안습한 시기에 황제가 되었다. 더구나 전 황제였던 공제는 사태후[1]와 함께 수도 임안(항저우)를 열고 원에 항복하여 대도(베이징)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남송의 부흥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중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임안이 함락되자 양숙비와 도종의 어린 황자 조하와 조병[2]을 데리고 나와 그 중 나이가 많은 조하를 황제로 옹립한다. 이 때 단종의 나이는 겨우 7살이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원의 군대는 복주를 항복시키고 천주의 실력자인 성박사 포수경을 포섭하는 등 점차 강남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된다. 이에 부흥군은 단종을 모시고 최후의 수도인 애산에서 결전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해운을 장악한 포수경 없이 배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탓에 애산까지 가는 파천길에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풍에 놀라 익사할뻔 한 단종은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고 재위 2년만에 1278년 지금의 홍콩 근처인 복주 인근에서 사망한다. 영복릉에 안장되었으며[3] 뒤는 역시 7살짜리 이복 동생 소제 조병이 이었으나, 결국 1279년의 애산 전투와 함께 소제와 송 군신 전원이 바닷물에 몸을 던지면서 남송은 완벽하게 멸망하고 만다.
너무 어린 나이와 안습한 최후는 조선 단종 못지않게 참담하지만 그래도 동생과는 달리 나라의 멸망까지 보지 않은건 다행인 듯하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인지도는 처참하다.
- ↑ 이종의 황후
- ↑ 도종의 7남으로 수용 유씨 소생이다.
- ↑ 남송 역대 황릉은 임안에 있었다. 그러나 수도가 함락되고 망명 정부라서 복주 일대에 간소한 장례를 치뤘다. 봉분은 매우 작았으며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단종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