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신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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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의 역대 국왕
제2 쇼씨 왕조
19대 국왕 쇼센이 왕20대 국왕 쇼신 왕21대 국왕 쇼세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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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에서 어진은 어후회御後繪(おごゑ 오고에)라고 부르며 조선시대 불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는데 오키나와 전투로 모두 사라지고 흑백 사진만 남아있다.


류큐 제2 쇼씨 왕조의 3번째 왕, 그리고 류큐사 최고의 명군[1]. 신호神號[2]는 오갸카모이(於義也嘉茂慧 おぎやかもい)이며 한자의 뜻을 빌려적자면 비친공丕親公이고 뜻은 친애하는 임금님.[3]

1 소개

제2쇼씨 왕통의 3대 왕인 쇼신은 15C 류큐의 번영을 이끌었던 왕이다. 13살에 왕위에 올라 50년동안 왕위를 지키며 류큐 역사상 군사,영토, 문화, 경제적 측면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쇼신이 류큐의 왕위에 있었던 긴 시기는 '중산의 위대한 날들'로 묘사되며 당시의 길었던 평화와 그에 따라오는 번영의 일면을 보여준다.

2 즉위

쇼신은 1465년 제 1대 왕인 쇼엔의 아들로 태어났다. 쇼신이 13살이 되었을 때 쇼엔이 훙거하게 되었는데, 왕의 아들인 쇼신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쇼엔의 뒤를 이어 왕의 동생인 쇼센이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다음 해인 1477년 신에게 제사지내는 의례에서 '쇼신이야말로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신탁이 내림에 따라 쇼센이는 즉각 퇴위되고 쇼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4] 이러한 과정을 거쳐 즉위하게 된 쇼신은 2년 후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중산국[5] 국왕이 되었다.

3 중앙집권화 정책

구스쿠시대 이래 지방에서 할거하는 아지 계층은 중앙의 슈리 정부에 매우 큰 위협이 되어왔다. 새롭게 왕가가 된 2차 쇼씨 가문 역시 이러한 호족층으로부터 출발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쇼신은 다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쇼신은 지방의 아지들을 중앙의 슈리에 모여살게 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슈리성은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지층을 모아들임으로써 영주를 잃어버린 지방에는 왕의 명령을 받는 아지웃치(按司掟, あいうっち)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에서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수도에 모인 아지층을 대상으로 관인 하치마키(冠, はちまき)의 색깔, 비녀인 지화(簪, じーふぁ)의 색을 결정하였다. 하쿠 제도로써 아지층의 위계를 결정함으로써 쇼신은 아지층을 중앙 정부의 위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류큐 왕국이 빠르게 중앙집권화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일부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쇼신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억누를 수 있었다.

4 군사와 종교

쇼신은 100여척의 전선을 파견하며 미야코 섬과 야에야마 섬 등의 사카지마 제도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이와는 반대로 쇼신은 모든 사람들의 무기 소유를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는 이전에 일어났던 지방 반란과 같은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쇼신은 모든 무기를 슈리 내부의 무기창고에 보관하도록 함으로써 국왕과 중앙 정부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쇼신은 류큐의 민족종교를 정비하여 신녀 조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 신녀인 노로를 편제하고 이 노로직의 위에 좀 더 넓은 범위를 관리하는 오아모를 두었고, 이 모두를 통솔하는 기코에오키미 등의 직위를 창설했다. 또한 이 모두를 중앙의 슈리성에서 임명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성공한다. 또한 최고 신녀직인 기코에오키미에 쇼신의 누이인 오토치토노 모이카네가 임명되어 류큐 왕실의 제정일치 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또한 쇼신은 말년에 불교로 귀의하게 되는데, 그가 세운 엔가쿠지(円覚寺)는 이후 대대로 류큐 왕실의 비호를 받아 오키나와 전투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류큐 제일의 사찰로써 번영하기대 했다.

5 류큐의 황금기

쇼신은 명나라와의 조공을 기존의 2년 1공에서 1년 1공을 바꾸고[6] 멀리 떨어진 시암과도 무역을 시작하는 등 교역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이렇게 얻어진 부를 바탕으로 쇼신은 여러 건설사업을 벌였는데, 슈리성 정비와 왕실의 능묘인 다마우돈 조영, 엔가쿠지 준공, 슈리성과 나하항을 잇는 마다마미치를 건설한 것이 그 예이다. 쇼신은 각지의 오모로를 모은 오모로소시를 편찬하여 류큐의 역사적, 언어학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쇼신 말년부터 명의 해금정책 약화와 서양세력의 유입[7], 그리고 전국시대의 혼란기에서 막부가 제어하지 못하는 틈을 타 바다로 확장하려는 일본 다이묘들의 진출 등으로 인해 류큐의 중개무역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버티던 류큐에게 결정타로 작용한 것은 임진왜란사쓰마의 침공. 임진왜란때 몇천명의 군대에 점령당했던 류큐는 쇼네이 왕 때 사쓰마의 침공에 반식민지가 되고 만다. 이후 류큐는 17-8세기의 짧은 황금기를 맞이하다가 제국주의희생양이 되고 만다.

6 평가

역사가 커(George H. Ker)가 쇼신의 시대를 두고 '오키나와는 쇼신의 치세와 같은 평온한 시대를 다시는 알지 못할 것이다'라 평했듯 쇼신의 시대는 류큐가 매우 번창했던 시기였다. 그가 세운 여러 위대한 건물들은 이러한 쇼신 시대의 광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대한제국 연대기에서도 나름 비중있게 등장한다. 고유 종교 대신 정교회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해외 진출을 장려하여 이후 류큐가 제국주의 시대에도 중견국으로 자리잡게 될 기반을 다진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도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2,3,4로써, 류큐를 통일한 쇼하시 왕의 뒤를 이어 류큐 왕 중에서 두번째로 좋다.
  1. 삼산을 통일한 쇼하시 역시 무역을 중시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등 뛰어난 왕이었지만 지방 호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후계를 명확히 하지 못해 쇼하시 사후 쿠테타가 여러차례 발생하게 되고 결국 가니마루(쇼엔)에게 왕통을 빼았기게 된다. 한편 쇼신은 류큐의 황금기를 연 것 외에도 중앙집권을 통해 당시까지만 해도 매우 불안정하던 류큐를 굳건히 만든 최대의 공로가 있다.
  2. 류큐어로 지은 존호
  3. 출처는 [1] 해석을 하자면 오お는 일본어의 미み처럼 높임 앞가지로 말을 아름답게 꾸민다. 일본어나 류큐어나 이걸 어御로 쓰지만 한자의 원래 뜻을 생각하면 비丕가 맞다.(서주시대 금석문에서 비丕가 일본어의 미み나 류큐어의 오お처럼 쓰인다.) 갸캬ぎやか 일본어에서 가까움을 뜻하는 치카ちか와 같은 뜻이며 뜻이 확장되어 친애함을 뜻한다. 모이もい는 생각을 뜻하는 오모이おもい에서 나온 말로 을 뜻한다. 류큐의 시집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 제 1권 제9수에서도 나온다.
  4. 이러한 쇼센이의 퇴위는 쇼신의 어머니이자 '어머니 여왕'로 언급되는 오기야카의 책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5. 류큐 왕국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류큐를 일컫는 오랜 별칭중 하나이다.
  6. 조공 항목에도 나와있듯 대부분의 조공은 하면 할수록 바치는쪽에 이득이었다.
  7. 처음 유럽인들이 동남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는 오히려 류큐에게 중개무역을 확장할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와 필리핀을 점령하는 등 유럽인들이 직접 무역에 뛰어들게 되자 이것은 류큐에 있어 커다란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