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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御眞
왕의 초상화. 진용(眞容), 영정(影幀), 왕상(王像) 등의 단어로 불리다 1713년 조선 숙종 39년 숙종 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이이명(李頤命)의 건의에 따라 '어진'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해 불렸다.
영자(影子)는 왕이 지칭하는 것이므로 신하로서는 감히 지칭할 수 없고, 영정(影幀)은 그 뜻이 회화를 열어 펼친다는 뜻이니 족자(簇子)로 꾸며진 것이 아니면 칭할 수 없는 것이다. 수용(睟容)이란 단순히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니 부를 바가 못 되며, 어용(御容)역시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전신(傳神)이란 사진(寫眞)으로 불려왔으며, 또한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진전(眞殿)이라 하므로 왕의 화상 역시 어진(御眞)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 《승정원일기》
2 어진 제작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 이렇게 3종류로 나뉜다. 다만 도사와 모사는 1713년 이전에는 모사(模寫)라는 단어로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 도사(圖寫) : 왕이 살아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는 것.
- 추사(追寫) : 왕이 살아있을 때 그리지 못하여 사망 후 그리는 것.
- 모사(模寫) : 왕의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시에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것.
어진 제작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왕실 종친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에서 관장하기도 했다. 또 전문 화원은 아니지만 미술에 조예가 높은 양반 신분 화가들이 유화(儒畵)라는 기술적 조언자로 참가해 잘못된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직접 제작하는 화원을 어진화사(御眞畵師)라고 불렀는데 도화서 화원 가운데 뽑았지만 마땅히 사람이 없을 경우엔 민간의 화가중에 선발해서 그리게 하기도 하였다. 어진화사(御眞畵師)는 보통 6~7명 선이었지만 최대 13명까지 이를 때가 있었다. 어진화사 중에서도 집필화사(執筆畵師)와 왕의 몸 중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물감을 섞는 일을 돕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뉘어 있다.
2.1 제작 과정
어진의 초본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채색을 한다. 채색이 끝나면 뒷부분을 종이로 배접하여 잘 말린 후 영정의 네 가장자리를 두르는 장황을 하고 뒷부분을 비단으로 배접한다. 옥축, 홍사유소[1], 봉안색환[2]등을 부착하고 마지막으로 표제(標題)작업[3]이 끝나면 어진 제작이 완성된다.
표제를 마친 어진은 길한 날을 선택하여 진전에 봉안했다. 진전은 임진왜란 이전에 총 6곳에 이르렀는데 한양의 문소전,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준원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의 경기전에 영전들을 배치했다. 이는 한나라 한고조의 묘를 수도뿐만 아니라 군국에 분립하게 했다는 제도를 따른 것이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4], 경기전의 어진만이 살아남아 병자호란 등의 전쟁에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녔다고 한다. 영조때의 전주성 대화재(1767년)도 피했다니 참 운 좋은 어진인 셈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태조의 어진만큼은 볼 수 있다. 역시 복사를 많이 해놓아야 후손들에게 전해지기 좋다 뒤에 가면 이런거많이 나올거임
3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어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정식적으로 그려진 어진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고대의 어진은 하도 오래됐다보니 원본이 남아있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겠지만 고려시대의 어진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일일이 모아서 불태우거나 땅에 묻었다고 한다. 고려 임금 불태운 세종 1426년 도화원이 간수하고 있던 고려 역대 군왕의 초상화를 태우고 1428년에는 전국에 퍼져 있던 역대 고려왕의 그림과 조각상을 모아서 개성에 가져가 묻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왕씨 학살, 숭유억불을 비롯해 고려시대 색채를 지우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조선 이전의 초상화라고 주장하는 그림들이 몇 떠돌고 있지만, 아래 삼국시대, 고려시대 어진은 그린 이가 확실하거나 혹은 사서에 등장하는 어진으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에 등재했다
3.1 고조선시대
3.1.1 단군왕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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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전단군화상 |
[파일:attachment/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8/Portrait_of_Dangun.jpg] | |
20세기 쯤에 그려진 채용신의 단군상 |
1920년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당시 대종교가 생긴지 10여년도 안된때라 대종교의 영향을 받거나 아예 대종교 쪽에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3.2 삼국시대
3.2.1 감신총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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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총에 있는 벽화들 |
북한의 용강군 신령면 신덕리에 있으며 대략 약 4세기에서 5세기의 사이의 고구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특히나 위 사진에서 가운데 인물들은 다른 인물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크게 그려져 분명 높은 신분일 것이고, 사진의 왼쪽 초상의 인물은 왕이 쓰는 흑나관과 입는 옷인 홍포를 입고 있어 고구려 왕의 초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오른쪽의 초상은 감신총의 다른 분묘 인데, 비록 얼굴은 훼손되었지만, 드리워진 비단 장막에 왕(王)자가 수도 없이 적혀 있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왕이라는 연관성을 더욱 뒷받침 해주는 증거라고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벽화 자체는 의외로 잘 남아 있지만, 가장 심하게 도굴을 당한 무덤 중 하나라서 내부 유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3.2.2 고국원왕(추정)
북한의 안악군 안악 3호분을 발굴한 북한 학계 및 한국 소장파 학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이 고국원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 일본 및 한국 원로 학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이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귀족 동수라고 주장하여 이 그림이 고국원왕의 어진인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3.2.3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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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상용암 제작본 | 1794년에 이명기가 그린 경순왕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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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승려화가 이진춘이 그린 밑그림 | 1904년 이진춘이 그린 경순왕 어진 |
눈썹 신경쓰면 지는거다
통일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초에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강원 원주시 고자암(...)[5]에 봉안해 놓은 경순왕 어진을 모사한 작품들이다.
- 1677년 강원도 원주 고자암에서 제작된 것
-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제작된 것
-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 1904년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그리고 이것의 밑그림
이들 어진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되었다 2007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진으로[6]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3.3 고려시대
3.3.1 고려 태조
경기도 연천 숭의전에 있는 태조 왕건의 영정(좌우 반전) | 얼굴 확대 | ||
왕씨 족보에 실려있는 왕건 초상화 |
왕건의 어진은 조선 시대에 그려진 영정의 1950년대 이전 모사본이라 한다. 고려 왕씨 족보에 실려있는 왕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왕씨 족보는 1992년 9월 개성시에 살고 있던 태조 왕건의 31대 후손인 왕지송 노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던 것을 개성시 당위원회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단군묘도 만들어내는 북한인지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위의 어진을 보고 배낀 것이든 아니면 그 반대로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의 모습을 바탕으로 우측의 어진을 그려낸 것이든 두 초상화가 매우 닮았고, 연관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왕씨 족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져야 알 수 있을 듯 싶다.
현릉에서 발굴된 왕건 동상 |
왕건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어진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동상이 남아있다. 그것도 왕건 당대와 가까운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사이에 만들어진 동상으로 왕건 당대와 매우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만큼 왕건의 어진을 직접 보고 만들거나 왕건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들은 토대로 충실히 재현 했을 확률이 높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북한에서 1992년 왕건의 릉(현릉)을 확장 공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상으로 오인되었으나 고려 왕실 제례 때 사용되던 고려 태조상을 조선 세종 11년(1429)에 현릉에 묻었다는 기록과 교차 검증되어 왕건상임이 밝혀졌다. 이 청동상은 왕건의 젊은 시절을 모사한 것이라 한다. 나체상이지만 원래부터 벌거벗은 임금님마냥 저렇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나체 동상을 만든 후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던 것이다. 실제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남북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던 2006년에 국내에서 전시된 적도 있다. 왕건의 청동상은 왕건의 제대로 된 어진이 전무한 상황에서 왕건의 외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 한편 과거 왕건의 어진은 3곳의 사찰에 봉안되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곳인 개태사가 위에 나온 왕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어진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3.3.2 공민왕
고려 공민왕 어진으로 전해져 오는 그림 |
태조 이성계가 재위 4년째인 1395년에 종묘 창건을 하며 경내의 신당에 봉안했던 그림인데 오른쪽 인물이 공민왕, 왼쪽은 노국공주라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자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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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어진으로 추정된 그림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의 화장사라는 절에 소유하고 있던 공민왕의 초상이라고 전해졌던 그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화장사에 있던 정종(조선) 부부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그림 한쌍과 함께 궁으로 이안되었다가 정종 추정 어진이 신원이 불확실한 이유로 다시 화장사로 돌려보낼 때 다시 딸려서 돌아왔다고 한다. 이유는 망한 나라 임금 초상따위 있어서 뭐하냐는... 현재 행방이 묘연한데 한국 전쟁 당시 화장사가 폭격으로 파괴되어 소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4 조선, 대한제국 시대
조선시대 어진은 임진왜란 때 궁궐이 타면서 태조의 어진, 문종의 어진[7],덕종 어진, 세조의 어진[8]만이 남았다고 전해진다. 왜란 이전의 임금들은 모두 어진을 남겼다는 기록은 있지만, 왜란 후의 임금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인지 몰라도 남기지 않았다. 조선 선조는 어진 그리기가 싫다며 거부했으며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이 없다. 이 후 어진 제작이 다시 활발해진 시기는 숙종부터다. 영조는 20세와 재위 20년 후 50세 어진, 후에도 10년마다 어진을 남겨 5점의 기록을 세웠고[9], 행사 때마다 어진을 그린 조선 정조도 있었으며, 사도세자가 평양에 놀라갈 당시 화사 변상벽에 의하여 초상화를 남겼고, 정조 즉위 이후 현륭원으로 이동해 봉안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21년, 고종의 3년상이 끝난후 당시 전국에 있던 왕의 그림들과 각 궁궐에 퍼져있던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을 한 곳에 모아 모시기로 하고 창덕궁에 선원전을 설치했다. 1921년까지 남아있던 어진들은 태조, 세조, 원종[10],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11][12],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 뿐이었다.[13] 그 전에 보존 되어 왔던 문종, 덕종 어진은 병자호란이나 1900년에 선원전에 화재가 일어날 당시 많은 어진들이 소실되었는데 그때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14] 또한 현륭원의 사도세자 초상은 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의아한 점은 일제강점기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불타 없어지기까지 9년이란 시간 동안 어진을 찍어 놓은 사진이 없다시피하다는 것이다. 왕의 어진이라는 이유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 게 주 원인으로 이때 어진 관리 차원으로 사진이라도 찍혔다면 조선 왕들의 얼굴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일정 정도의 추정, 보정을 거쳐 복원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전쟁 당시에 다른 왕실 유물과 함게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관재청 벽돌식 창고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희대의 병크가 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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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두동 대화재 당시. |
1954년 12월 26일에 발생한 화재로 영조, 철종을 포함한 11점의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 35점의 어진들이 유물 4000여점과 함께 타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 용두산 대화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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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신선원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어진 현황(네이버 케스트 자료) | |
화재에서 태조 익선관 1점, 원종 사모 1점, 영조 사모 1점 익선관 1점, 순조 원유관 1점, 익종 면복 1점, 철종 군복 1점, 순종 황룡포 1점이 살아 남았다.[15] |
결국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태조의 어진과 부산 화재에서 살아남았으나 얼굴 부분이 타 버린 태조, 순조, 문조(익종)의 어진, 얼굴은 보존되었으나 신원이 불명확한 어진 2점[16] 그리고 얼굴이 보존되고, 신원도 확인 할 수 있는 영조와 철종, 고종 어진 뿐이다. 부산에서 얼굴이 소실된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본을 참고해 복원했고 철종 어진은 얼굴이 무사했기에 복원이 가능했으나, 순조 어진과 문조 어진은 가로로 얼굴이 완전히 불타 버려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당 김은호가 순종 사후에 그린 익선관본 순종 어진은 1954년 화재로 오른쪽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어진 완성 후 촬영한 흑백 사진, 이당이 그렸던 순종의 다른 어진의 얼굴,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황룡포 등의 자료를 토대로 2014년 복원했다. 세조, 정조, 숙종, 헌종의 어진은 완전히 불타버렸으니 말 다했다. 세조의 어진은 김은호 화백이 이모 할 당시 그렸던 밑그림이 남아 있었으나 행방이 묘연하고 경향신문 기사에 사진으로 남아 있울 뿐이다. 다만 수원 화성 화령전에 있던 정조의 구군복 어진은 선원전 이전 중 분실 되었다고하니 어디선가 발견 될지도 모른다. 당시에 조선왕의 어진을 눈으로 본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인상착의를 확인하고는 몽타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물론 조선 왕들의 경우 어진이 없더라도 얼굴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데 각 왕릉에 묻혀있는 왕들의 두개골만 스캔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17] 아니, 어쩌면 썩어서 뼈로 변하지도 않은 채 미라처럼 되어 있을지도... 조선 시대에 조성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미라처럼 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간혹 들려오는데, 이는 석회 · 모래 · 흙을 혼합한 삼물(三物) 반죽으로 무덤을 만든 데 따른 현상이다. 이 삼물 반죽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공기를 완벽히 차단해 준 덕분에 시신이 썩지 않았던 것.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무덤 조성 방법 때문이었다. 이상 언급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그야말로 정성 들여 조성되었을 왕릉 내부의 시신도 미라처럼 되었을 거라는 추론이 아주 불가능한 기대는 아닌 셈... 조선 왕릉 석실에 대해 다룬 기사 다만 아무리 민주주의 공화정 시대라 해도 왕의 얼굴을 복원한답시고 말짱한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내는 게 여론에는 좋지 않게 비칠 터이고 전주 이씨 종친회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게 쉽나... 어진도 설마? 만약 지진과 태풍에 자연재해로 왕릉이 완전 파괴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거나, 전쟁으로 파괴되는 특수한 상황을 빼고는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다.
또한 세조, 숙종, 정조, 원종, 순조, 철종 등의 간략한 초상화가 있는 선원보감, 열성어진을 배경으로도 복원하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선원보감 어진은 복장부터가 익선관과 곤룡포가 아니라 사모와 단령을 입은 모습이다. 거기에 헌종이나 철종 항목에 나와 있듯이 과연 실제 인물을 보고 그리기나 한 건지 의심되는 점이 많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표현이 간략하며 거기에 그 표현마저 과장이 심하기 때문에 이 의견은 소수의견에 머무르고 있다. 세조의 경우에는 세조 어진을 멀리서 찍은 사진, 김은호가 남긴 세조 어진의 초본, 해인사의 세조 어진을 통해 복원을 할 수는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을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연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어진은 태조 어진 2축(청룡포본(복제품), 홍룡포본), 원종 어진 1축(사모본), 영조 어진 2축(사모본, 홍룡포본), 문조 어진 1축(면복본), 철종 어진 1축(군복본), 고종 어진 1축(석지 채용신이 그린 황룡포본), 순종 어진 2축(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 2014년 복원한 모사도)이다. 다른 어진과는 달리 순조 어진은 전시되지 않았다.
3.4.1 조선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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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포를 입은 태조 어진 *대한민국의 국보 제317호 | 얼굴을 확대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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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복원한 조선 태조의 어진 | 반쯤 타버린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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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포본과 같은 얼굴 [18] |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조선태조어진 |
한자 | 朝鮮太祖御眞 | |
영어 | ||
분류번호 | 국보 317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0 |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 |
시설 | 1폭 | |
지정연도 | 2012년 6월 29일 | |
제작시기 | 조선, 1872년 |
신숙주가 쓴 《영모록(永慕錄)》에 따르면 당시 선원전이라는 경복궁내 열성어진 봉안처에 받들던 태조 어진이 무려 26축[19]이나 있었으며 그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태조의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반쯤 타버린 홍룡포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 어진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 원본은 태조가 승하한지 2년뒤인 태종 10년(1410년)에 이성계가 64세 때 모습이 담긴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해 제작되었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았는데 한반도에 있었던 주요 사고들을 볼 수 있다.
- 묘향산에 있던 어진은 1614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경기전을 다시 세우면서 전주로 돌아왔다.
- 1636년 병자호란때는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졌고 이듬해인 1637년에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 1688년 한성의 영희전에 모실 어진모사를 위해 한성으로 옮긴적도 있다.
- 1763년엔 한차례 수리를 했고, 1767년에 일어난 전주성 대화재 당시엔 전주향교로 옮겨지기도 했다.
- 동학농민운동 당시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뒤 다시 돌아왔다.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고종 9년이던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고 낡아서 영희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배은배 등 8명이 4월 22일부터 5월 4일까지 모사 한 것이다. 모사본이 완성되고 1410년에 제작된 원본은 세초한 후 백자 항아리에 넣어 경기전 본전 뒤편에 있는 북쪽 계단 위에 묻었다고 한다. 그 곳을 찿아 세초한 태조 어진을 안 꺼낸 이유가 뭡니까?[20]
청룡포의 어진의 경우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은 물론 양쪽 트임새로 보이는 내공(內工)과 첩리(帖裏)의 형태가 조선 초기 초상화법을 닮았으며,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으로 보(補)와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왕의 품위가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의 최초 어진은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왜구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성계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그의 초상을 벽화로 그리라는 명에 따라 그려진 벽화다. 조선 왕으로써 그려진 어진은 1398년으로 왕위에 오른지 7년째 되던해에 그린 어진인데 그해 함주(함흥)의 준원전에 자신의 진영을 봉안토록 하였고 8월에는 계림(경주)의 집경전, 문소전, 장생전 등에 봉안되었는데 이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세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현재 경기전 정전의 어진의 원본은 2008년 보존 처리후 2010년 부터 경기전 경내 어진 박물관에 있으며 1999년 전주시가 권오창 화백에게 모사를 의뢰해 제작된 모사본은 어침실 문앞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전주시에서 어진 원본을 박물관으로 옮기고 모사본을 배치하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의 강력한 반발로 모사본과 원본 2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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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 준원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조선 태조 어진 |
1913년, 일본인 순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함흥 준원전 어진은 전주 경기전 어진과 마찬가지로 전란을 피했던 어진이었기에 139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64세가 되었을 때다. 저 얼굴이 예순넷이라면...흠좀무(아닌게 아니라 저그림 그릴시점에 이성계는 딸(숙신옹주)도 하나 만들었다. 흠좀무). 그러나 한국전쟁 때 준원전이 사라지면서 행방불명되었다. 따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소실됐을 확률이 높다. 북한은 도서정리사업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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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젊은 태조 어진. | 확대 모습 |
2013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함흥 준원전 태조어진을 복원하였는데 일본인 순사가 남긴 준원전의 태조 어진 사진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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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진에 실린 태조 모습 | 출처[21]. |
일제시대 만들어진 열성어진에 실린 태조의 모습이다. 매우 간략한 그림이지만 복식이나 수염의 형태를 보면 실제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초기에는 정면상이었다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묘사가 쉬운 측면상으로 바뀌었고, 조선말에 이르러 서양식 화법이 가미되어 정면상으로도 충분히 개성을 나타내기 쉬워지면서 정면상으로 회귀했다. 열성어진의 다른 초상과는 달리 조선초기 양식대로 태조만은 정면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볼 때 최소한 열성어진을 그렸을 때 뭔가 보고는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다만 어떤 어진을 보고 그렸을지는 짐작하기 힘들다. 열성어진이 편찬될 당시에는 전주 경기전, 함흥 준원전, 한성 선원전에 각각 태조의 어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참고해 그렸을 것이다. 우측에 있는 초상화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초상화를 보고 그렸을지도 모른다.
3.4.2 조선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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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영모전에 봉안되있던 단종 승마 영정 | 복원한 승마 영정 |
강원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태백신으로 여겨 지금도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근방의 사찰 들이 그 추모제를 열고 있다. 원래 그 전에는 용포를 입으며 단상에 앉은 모습의 단종 영정, 또는 나무인형으로 영모전에 봉안 되어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훼손이 심각해졌고, 1927년 이규진이라는 사람이 불교 탱화기법으로 다시 제작해 만든 민화 형태의 영정이다. 단종을 끝까지 모셨던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와 달래를 바치는 모습이다.
이 영정은 6.25 전쟁때 영모전이 폭격을 맞으며 소실이 되었고, 운모 김기창 화백에게 복원을 의뢰하여 다시 만들었다. 지금은 여러곳에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많아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3~4개 버전이 있는듯하다.) 현재는 다시 세운 영모전에 붉은 용포 모습의 승마 영정이 봉안 되어있으며 이 영정을 표준삼아 추모제를 연다고 한다.
참고로 영모전은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
3.4.3 조선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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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찍힌 조선 세조의 어진. | 1969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세조어진 초본 |
왼쪽 사진에서 저 멀리 보이는 게 어진이고 그리고 있는 것이 모사본이다.[22] 그러나 현재 원본, 모사본 모두 남아있지 않으며 사진 자체가 원래 원본과 모사본 자체를 찍으려고 촬영한 게 아니라 모사본을 만드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거라서 어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과거 저 사진에서 모사본을 그렸었던 김은호가 신문기사로 남긴 수염없는 초본의 얼굴은 1969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 남아 있는데 오른쪽 사진으로 광대뼈가 드러나고 수염이 거의 안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초본은 현재 행방불명이다. 그리고 이당 김은호가 모사하여 그린 세조 어진의 초본을 바탕으로 하여, 세조의 얼굴을 청강문화산업대학 안태성 교수가 복원한 세조의 어진 링크 출처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 |
1458년 그려져 해인사에 봉안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그려진 것인 만큼 실제 모습보다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대에 그려진 게 그대로 보존된 만큼 가치는 높다. 게다가 둥그런 얼굴형과 옅은 수염이 위에 나온 왕실 어진과 일치하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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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세조 초상 | 열성어진 세조 초상 |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감과 일제시대에 제작된 열성어진에 실린 세조의 모습이다. 딱 봐도 두 초상이 같은 그림인 것을 알 수 있다. 차이점은 선원보감보다 열성어진에 있는 그림이 더 못 그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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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 그려진 세조 초상 | 민간에서 그려진 세조 무속화 |
좌측의 초상은 해인사에 봉안된 어진을 후대에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민간에서 모사했기 때문에 정밀한 이모가 이루어 지지 않아 수염이 매우 풍성하게 그려졌다. 우측은 무엇을 보고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세조의 초상화..... 아마 세조가 조카의 보위를 빼앗았기 때문에 민간에서 흉폭하게 모사된 듯 하다.
3.4.4 조선 숙종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
일제강점기 당시 2종류의 어진이 원본+이모본으로 총 4장이 전해져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이후 관리실수로 인한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나마 얼굴이 멀쩡히 남은 영조, 철종이나 다른 곳에 안전하게 보관된 어진이 있었던 태조, 어진 자체는 불타버렸으나 초본 사진이나마 남아있는 세조, 선원보략에 조잡하게나마 초상화가 남아있는 정조,순조, 헌종과 달리 어진 자체는 잿더미가 되고 선원보략에도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용모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에 나온 서적인 '열성어진'(列聖御眞)을 참고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책에는 조선조 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놨는데, 선원보략에 초상화가 남은 왕들과 선원보략에 초상화가 없었던 태조,숙종, 영조의 어진 간략본 역시 있었다. 문제는 숙종의 초상화를 그린 이가 선원보략에 그려진 조선왕들의 초상화를 그린 자보다 그림 실력이 떨어진 사람이 그렸고, 그림을 그린 이가 실제 어진을 보고 그렸는지 신뢰가 안 간다. 한마디로 더럽게 못 그렸다 더구나 일제시대 까지 남아 있던 숙종의 어진 2축은 모두 익선관 차림이었으나 이 초상화는 익선관 차림이 아닌 원유관과 비슷한 관을 쓰고 있다. 영조의 외모와 비슷하게 그려서 실제 숙종의 얼굴이 영조와 붕어빵 얼굴일 수도 있다.
3.4.5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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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시절 영조 | 조선 영조의 어진 |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원본이다.[23]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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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진의 영조의 초상 |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24]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시대 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 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수술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3.4.6 조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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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정조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 모습 |
정조는 어진을 자주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어진 화사에 참여 했으므로 매우 뛰어난 어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두동 대화재 때 홀랑 다 타버려서 정조의 얼굴은 선원보감의 간략한 초상화로 추정할 뿐이다. 정조의 표준영정이 다소곳한 이미지라면 현재 선원보감에 남아 있는 초상은 골격이 우람해서 무인 기질이 엿보인다. 표준 영정을 다시 그리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 듯하다.[25]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의 모습 역시 선원보감의 그림과 같은 것이라 추정된다. 게다가 그림의 퀄리티는 더 떨어졌다. 다만 정조 어진 중 수원 화성 화령전에 모셔졌던 구군복 차림의 어진은 일제시대 때 창덕궁으로 옮기던 중 분실 되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분실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만약 분실되지 않았다면 다른 어진과 마찬가지로 부산에서 한 줌 재가 되었을 것이다. 제발 일본인이나 도굴꾼이라도 좋으니 빼돌려서 어딘가 온전히 남아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
3.4.7 조선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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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의 어진 | 확대모습 |
순조 30년(1830년) 화가 유당 김하종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 어진은 원유관 강사포본 2축과 익선관본 2축 총 4축이 있었으나, 이 그림 제외하고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유일하게 남은 순조의 원유관 강사포본 어진으로 얼굴의 반이 불타 복원은 불가능하다.아니, 최소한 귀와 눈썹이 남은 효명세자와 달리 이쪽은 구레나룻 외에는 남은 부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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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모습 |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진의 얼굴이 타버려 구레나룻 외에는 확인 할 수 없으니 왕실 족보인 선원보감에 남아 있는 간략한 초상화로만 순조의 얼굴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열성어진의 그림 역시 선원보감과 같은 그림으로 추정된다.
3.4.8 조선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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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헌종 초상화 |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우 미남이었고, 풍만한 체형이었다고 한다. 잘생기 외모 때문인지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궁녀들과 놀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해버린 데다 어진마저 남아 있지 않기에 미남이었다는 헌종의 얼굴은 선원보에 남은 간략한 초상화로 추측해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선원보의 초상은 참으로 난감하게 20대 초반에 죽은 왕의 모습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나이들어 보인다. 심지어 미남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얼굴이다. 당시에는 저런 얼굴이 미남이었을지도... 미간에 사마귀 또는 점이 묘사되어 있는데 외조부 조만영 초상화에도 미간에 사마귀가 그려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실제 헌종의 미간에는 점이나 사마귀가 있었을 확률은 높아 보인다. 열성어진에 실린 초상화는 선원보감을 참고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차이점이라면 더 못 그렸다는 것과 미간의 점이 빠졌다는 것이다.본격 어진에 성형수술한 사례
3.4.9 조선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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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의 어진 | 복원본 |
철종의 31살 때 모습을 담은 구군복본 어진으로 철종 12년인 1861년, 3월에 제작되었다.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사를 담당했던 이한철, 조중묵이 주관화사였고 김하종, 박기준, 백영배, 백은배[26], 유숙, 이형록이 도와 1개월 동안 제작했다고 한다. 또 구군복본 외에 강사포본을 그렸는데 그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얼굴까지 소실된 다른 어진들과는 달리 얼굴 부분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1987년 복원본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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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철종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철종 초상화 |
선원보감과 열성보감에 실린 초상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정원군과 함께 선원보감에 실린 초상과 실제 어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한데 정말 많이 다르게 생겼다. 다만 수염은 간략한 묘사나마 모양이 어느 정도 잡혀있으므로 여타 어진 복원 시 참고해 볼만 할 듯하다.
3.4.10 대한제국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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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어진 |
고종의 어진은 1872년 군복대소본, 익선관본, 복건본, 면복본등 모두 5본이 도사했는데 그 중 2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0년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의 모사본들 뿐이다. 또한 위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통천관 강사포본의 경우는 배경에 휘장을 치는 등 일본식 화법이 가미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역대 제왕 중 유일하게 외국인이 그린 어진이 있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것.# 고종의 경우 어진 말고도 사진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 얼굴을 유추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편이다.
3.4.11 대한제국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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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 어진[27] | 순종 어진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
순종 어진(1936년 作) 당시 사진 | 이당 김은호 화백의 순종 어진 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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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소실된 어진(1928년 作) | 2014년 복원한 황룡포본 순종 어진 |
전통적인 기법보다 서양화적 요소가 가미된 어진이다. 1912년 어진이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순종 어진 유지초본으로 마지막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익선관본 중 황룡포, 홍룡포본 총 3축이 있다고 전해지며 1954년 용두동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황룡포본 1점이 살아남아 2015년 문화재청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림의 표제가 적혀있던 오른쪽 부분이 탔지만, 순종 생전에 촬영했던 제국군복 사진을 토대로 김은호 화백이 그렸던 어진과 같고, 고종과 더불어 유일한 황룡포를 입은 모습인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현 공개된 순종 어진은 김은호 화백이 1928년 서울 영희전에서 제작 한 것이고, 위의 흑백 사진에 순종 어진은 이왕직의 요청으로 1936년 세조, 원종 어진을 복원했을 때 추가로 모사한 어진이다.
3.4.12 왕족의 그림[28][29][30]
3.4.12.1 이천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며, 태종 이방원의 사촌 형이 된다.
3.4.12.2 익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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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안대군 |
이성계의 3째 아들로 야심이 적어 '왕자의 난'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으며, 태종 즉위 후에 대군의 지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와는 부자지간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태조의 어진과 용모를 비교해 보면 좋을 듯 싶다. 더불어 정종과 태종의 모습을 유추 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 1월 도난을 당했다가 그 해 4월 회수에 성공하여 보관 하던 중, 2009년에 재 도난을 당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범은 잡혔지만 해외에 반출을 해버려 안타깝지만 돌아오기가 어려울 듯 하다.
3.4.12.3 효령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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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 경내 효령각에 소장되어 있는 효령대군의 초상화다. 1978년 11월 10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몇 번 옮겨 그린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작품이다. 문화재청 링크
윗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동생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아서 양녕대군이 비행을 일삼을 때 자신을 효령이라고 사칭했다는 기록도 있고, 3형제의 동생인 성녕대군이 죽자 아버지 태종이 "성녕은 내 아들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아이였다"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어 이 그림은 태종과 세종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3.4.12.4 정원군(조선 원종)
정원군(원종) |
최근 원종(정원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공개되었다. 부산 용두동 대화재 때 살아남은 신원 미상의 어진 2축 중 하나다. 신원 미상의 어진 2축은 오른쪽에서 부터 왼쪽으로 불에 타 들어갔기 때문에 오른쪽 윗 부분에 써있는 문구가 타버려 신원을 확인 할 수 없었으나, 선원전 어진 목록에 원종의 어진이 머리에 쓴 사모와 단령을 입은 차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어진 양식이 17세기 초상화 양식인 점으로 보아 원종의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 되었다. 그리고 2015년 이 어진이 원종(정원군)의 것으로 최종 판명이 되었다.기사 선조의 어진이 남아 있지 않은 현 상황에서 선조와 인조의 얼굴을위 아래로 암군 추정 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어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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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정원군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정원군 초상 |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는 같은 그림으로 보이며 실제 어진과 비교하면 복식은 비슷하지만, 용모는 어진을 보고 그린 것 같지만, 세세한 모습이 차이를 보인다. 재밌는 점은 열성어진에서 정원군이 쓴 사모가 효명세자가 쓴 사모와 같은 모양인데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을 비교해 보면 정원군의 사모의 모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선원보감을 보고 모사하다가 실수로 잘못 그린 듯 하다.
3.4.12.5 효명세자(조선 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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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 확대모습 |
왕들의 족보인 선원계보에 의하면 문조(효명세자)는 어진이 8축이나 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지만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이 어진 하나뿐이다. 문조가 18살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면류관곤복본이며 순조 26년인 1826년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얼굴 부분이 소실되어 복원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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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 열성어진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
두 초상화는 동일한 그림으로 보인다. 20대 초반에 죽은 세자의 모습 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게 묘사되었다. 그리고 효명세자가 후대의 인물인 이 분처럼 20대에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용안일 수 있다. 권오창 화백의 복원본과 눈의 위치가 비슷한데 선원보감의 그림을 보고 복원한 것이 아닐까 싶다.
3.4.12.6 흥선대원군(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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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금관조복본, 흑건청포본, 흑단령포본 보물 제 1499호 이하응 초상 |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하고 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한철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구나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이하응의 친필 표제(表題)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자표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5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3.4.12.7 신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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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신정왕후 초상화 |
신정왕후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어서 현재로서는 신원 미상의 초상화다. 신정왕후는 효명세자(문조)의 왕후로 헌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철종 사후 흥선대원군의 차남[31] 즉 고종을 양자로 삼아 보위에 올려놓았다. 이 초상화의 존재는 1990년대에 이미 알려졌으나 모습이 공개되지는 않았었다가 문화재청이 최근 발간한 '한국의 초상화'에 '조선 말기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3.4.12.8 영선군 이준용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조카이며 흥친왕의 아들, 순종의 사촌 형이 된다.
3.5 표준영정 및 현대 복원본
현재까지 남아 있진 않지만 상상에 근거하여 그린 어진이 몇 가지가 있다. 쉽게말해 상상도. 그러니 실제 모습과는 달라 실제 모습이 이렇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성왕의 경우엔 남아있는 유물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에 등재된 어진들 중 정부표준영정(政府標準影幀)으로 등재된 것은 국가가 공인한 영정이다.
3.5.1 삼국시대
3.5.1.1 가야
수로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49호 |
구형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62호 |
3.5.1.2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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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4호 |
3.5.1.3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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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75호 | 구세관음상 |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지는[32] 호류사 몽전 구세관음상을 기반으로 제작한 대한민국 표준 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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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71호 |
3.5.1.4 신라
선덕여왕 |
태종 무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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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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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興武大王) [33] 정우성화백 作 | 김유신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9호 |
3.5.1.5 발해
고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86호 |
3.5.2 고려
고려 태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66호 |
태조 왕건의 능인 개성 현릉에 있는 태조 어진 |
개태사에서 제작한 왕건 어진 |
왕건의 어진은 3곳의 사찰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곳인 개태사가 위에 나온 왕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어진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3.5.3 조선
3.5.3.1 조선 태종
효령대군 기념관에서 제작한 태종 어진 |
3.5.3.2 조선 세종
세종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2호 | 세종 김학수 화백이 그린 어진 |
3.5.3.3 조선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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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김호종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어진 |
3.5.3.4 조선 세조
세조 세조 종친회에서 따로 복원한 어진[34][35] | 안태성 교수가 복원한 세조의 어진[36] |
3.5.3.5 조선 성종
성종 우승우 화백이 그린 어진이다. |
3.5.3.6 조선 경종
경종 우승우 화백이 그린 어진이다. |
3.5.3.7 조선 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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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사도세자) 우승우 화백이 그린 어진이다. |
3.5.3.8 조선 정조
정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42호 | <-2><:> 정조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그린 구군복 차림의 어진[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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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표준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렸다.[38] | 추가바람 |
3.5.3.9 조선 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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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 화백이 복원한 어진이다. |
4 역대 어진 화사
기록상 남은 어진 화사들이다.
당시 도화서에 속해있어 어진을 제작했고, 당대 이름을 떨쳤던 화원들이다. 이들의 작품 중 대다수가 보물이거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숙종 어진 – 심사정, 윤덕희(윤두서 子), 조영석, 장득만, 진재해, 김덕하
세조 어진(18C 이모)- 장득만, 장경주, 이치
영조 어진 – 장경주, 진재해(연잉군 초상), 김홍도, 김두량,
정조 어진[39] – 강세황, 김홍도, 김득신, 이명기, 신한평, 한종유, 김응환 어벤저스 1기
순조 어진(효명세자 포함) – 김득신 가문(아우 김석신, 아들 김하종, 김건종), 박기준
헌종 어진 – 이한철, 조중묵, 박인석, 박기준
철종 어진 – 이한철, 조중묵, 김하종, 박기준, 이형록, 백영배, 백은배, 유숙
1900년 태, 영, 정, 순조, 효명세자 이모, 고종 어진 – 이한철, 조중묵, 박기준, 조석진, 채용신, 유숙 어벤저스 2기
1936년 세조, 원종, 순종 어진 제작 및 이모 - 김은호
5 외국에 현존하는 어진
중국의 경우엔 고대의 경우 역대제왕도권 등이 남아있고 명나라나 청나라의 경우엔 어진들이 온전히 남아있어 보기가 쉽다. 명나라의 각 황제 항목과 청나라의 각 황제 목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 왕국의 경우 어진을 우구이 또는 오고에(御後絵)라고 불렀다. 신과 함께를 연상시키는 화풍과 구조가 인상적인데 불교 탱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이전에 찍어둔 흑백사진들이 남아있다. 쇼신 왕, 쇼엔 왕, 쇼네이 왕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유럽의 경우엔 매우 많이 남아 있다. 역시 각 왕들의 항목마다 배치되어 있으니 참조.- ↑ 붉은 비단실을 묶어 만든 장식끈.
- ↑ 봉안용 고리.
- ↑ 이 어진이 누구의 것이며 언제 제작되었는지를 표기하는 작업.
- ↑ 전주 경기전의 경우는 정유재란.
- ↑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뒤 말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생활하던 곳이다.
망국의 왕이 생활하던 곳이라 그런지 이름도 꽤나 슬프다 - ↑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1875년 모사한 것이다.
- ↑ 완전한 것은 아니고 얼굴 일부 부분만 남은 조각이었다고 하나, 수염이 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 ↑ 세조의 어진은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와 보존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모사본 제작을 명했다.
- ↑ 고종대에 이모본 하나 더 추가 됨
- ↑ 인조의 아버지로 사후 추증되었다.
- ↑ 헌종의 아버지로 사후 추증되었다.
- ↑ 익종으로 추증되었으나 대한제국 시기 문조로 재추증되었다
- ↑ 이후 순종 사후 김은호 화백이 그린 순종의 어진이 추가되었다.
- ↑ 고종의 명으로 채용신과 조석진이 헌종, 순조, 영조, 정조 등을 복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 ↑ 현 남아있는 고종 어진은 왕실의 명으로 제작한 어진이 아니라 정식으로 제작 후에 고종의 유지 초본을 가지고 있었던 화가 채용신이 민간인에게 그려준 어진이다. 그래서 황룡포 3점이 남아있지만 모두 같은 나이의 고종이며 초상화로 유명했던 채용신의 평소 실력에 비해 그림의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 왕실에서 보관한 어진은 모두 소실 되었다.
- ↑ 신원미상의 어진 2점 중에 한점이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으로 최근에 확인되었고, 다른 한점은 황룡포본 순종 어진이다.
- ↑ 임진왜란 당시 약탈된 성종의 능과 중종의 능을 제외하곤 도굴된 적이 없다.
- ↑ 출처
- ↑ 개수를 뜻하는 단어.
- ↑ 세초란 실록이나 어진을 새로 작성한 뒤 오래된 기존의 어진이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이다. 실록의 경우 물에 씻어서 글을 지우거나 불에 태우는 방법으로 세초를 했다. 하지만 어진의 경우 어떻게 세초하고 매안 했는지 구체적 기록은 없다. 다만 태조의 어진을 고종 때(1872년) 세초하여 백자 항아리에 넣고,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항아리를 발굴하면 자세한 방법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 ↑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 사진이다. 일제시대 기록에 따르면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 3축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흐릿한 형상이지만 현재 전주 경기전에 남아 있는 어진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영흥 준원전 어진과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선원전에 모셔졌던 3축의 어진이 각각 전주와 함흥의 어진을 이모한 것이라 해도 나머지 1축은 분명 다른 어진 있었을 확률이 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선원전에 봉안 되어 있던 어진이 아닐까 싶다.
- ↑ 세조 어진은 다른 어진들과 달리 백피화를 신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세조어진의 모습을 살피던 영조가 백피화를 신은 모습이 특이한지 언급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록 흐릿하긴 하지만 1921년에 찍은 세조 어진의 이모 작업 사진을 잘 보면 뒤에 걸린 세조 어진의 신발이 하얀색임을 볼 수 있다.
- ↑ 다른 것은 모두 이모본 또는 복원본이다.
- ↑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
- ↑ 정조의 표준영정을 그린 화백이 선원보략의 간략하게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린 어진이 있다. 그 어진으로 교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기타 문단에 있는 조선 문단에 있는 정조 어진 상상화를 참조.
- ↑ 임천 백씨로 현종, 숙종 때 어의였던 백광현의 종잉손자(잉조할아버지의 형제다. 실제로는 고조할아버지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현조할아버지 래조할아버지 곤조할아버지 잉조할아버지 운조할아버지로 이어진다.) 그의 형인 백광찬의 직계후손이다. 아버지는 백민환 할아버지는 백명채 증조할아버지는 백사구 고조할아버지는 백임대 현조할아버지는 백상규 래조할아버지는 백홍주 곤조할아버지는 백흥선 잉조할아버지는 백광찬. 출처: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 정원군은 왕위에 오른 적이 없어 왕족으로 분류했으나, 사후 장남 능양군이 반정으로 왕(인조)위에 오른 후 왕(원종)으로 추존되었다.
- ↑ 효명세자의 경우 세자 시절 사망해서 왕족으로 분류했으나, 사후 왕(문조)으로 추존되었다.
- ↑ 흥선대원군의 최종 군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지만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탈바꿈하며 군호가 격상된 것이기 때문에 일국의 군주로서 사용된 군호는 아니다.
- ↑ 서형이 한 명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3남.
- ↑ 이설로는 쇼토쿠 태자의 외모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쇼토쿠 태자는 실존 인물인지 불분명하다.
- ↑ 김유신은 왕위에 오른적은 없지만 사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 되었다.
- ↑ 이목구비나 얼굴형 등은 위의 김은호 화백이 남긴 어진 초본 스케치에서, 수염과 넓은 얼굴, 하관은 선원보감의 간략하여 그린 어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어진이 멀리서 찍힌 사진으로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해인사 세조어진과 비교하면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했다.
- ↑ 원래 세조의 어진은 백피화를 신고 있었다. 흐릿한 흑백 사진이긴 하지만 세조 어진을 이모하는 사진을 보면 뒤쪽에 있는 이모본에서 세조가 백피화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조 종친회에서 복원한 어진에는 백피화를 신은 모습은 반영되지 않았다.
- ↑ 링크
- ↑ 수원 화성 화령전에 봉안돼 있다.
- ↑ 이 정조 어진은 수성고등학교에서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되었다.
- ↑ 제작에 참여한 화가 모두 엄청난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