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카르노

역대 인도네시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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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초대[1]2대
인도네시아 건국수카르노수하르토

1 개요


정열맨
얼굴이 요상하게 생긴 건 넘어가자.

수카르노(Soekarno, 1901년 6월 6일 ~ 1970년 7월 21일)

인도네시아독립운동가이자 국부,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독립 이후 독재자가 되어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다가 결국 수하르토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철저히 격하되었던 인물.

인도네시아 독립에 큰 공헌을 했지만 독재정치를 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현재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어린 시절의 수카르노

수카르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자바 섬 동북부의 도시인 수라바야에서 태어났다. 수카르노의 아버지는 자바의 하급귀족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이자 이슬람교 신자였고, 수카르노의 어머니 역시 발리의 귀족출신이였고 믿는 종교는 힌두교였다. 수카르노 자신은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던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원주민 학교를 졸업하고, 유럽인의 자제들이 다니는 소학교를 거쳐 수라바야의 고등시민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곱상하고 예쁜 미모로 인해서 연극부에서 종종 여장을 하고 연기를 했다고 한다. 출처는 자기가 쓴 자서전(...) 또한 이 당시 백인 네덜란드인 소녀를 좋아하여 고백을 하였다가 소녀의 아버지에게 죽도록 처맞고 반네덜란드 감정에 눈을 떴다고 한다.정치적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 1921년에 학교를 졸업한 뒤 네덜란드가 1920년에 설립한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한 후 1926년 5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수카르노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7년 7월 4일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다가 돌아온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국민당(Partai Nasional Indonesia, PNI)를 결성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집회를 열면서 연설 단상에서는 뛰어난 웅변술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이로 인해 수카르노는 "민족의 지도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물론 네덜란드는 이걸 그냥 놔둘 리는 없었고, 수카르노는 1929년 12월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았지만 1931년에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는 다시 1933년 체포되어 플로렌스 섬의 엔데에 갇히게 되었으며, 유배장소가 변경되어 1938년에는 수마트라 섬의 벵쿨에서 유형생활을 해야 했다. 다만 무지막지하게 통제된 삶은 아니여서 유형생활을 하던 벵쿨에서 첫번째 부인이 된 파트마와티와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러던 중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일본군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자 제16군 사령관이던 이마무라 히토시는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구금 상태에 있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수카르노와 모하메드 핫타를 석방하고 그들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일본 제국일본군에게 협력하라고 요구했다. 수카르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카르노는 민중총력결집운동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협력해서 네덜란드와 싸우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를 몰아냈지만 일본 제국도 식민지 열강이랑 별반 다를바 없었고 인도네시아를 여러가지로 착취를 했다. 일본인들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자바섬의 인도네시아인들을 강제징용하고 혹독한 강제노동과 전쟁동원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을 내몰았다.

다만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자치권을 주어 훗날 독립했을 때 이 때의 행정경험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네덜란드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는 권장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기에 인도네시아가 건국되었을 때 인도네시아어가 자국어가 되는 것이 수월해졌다. 또한 일본 제국의 필요에 위해 길러진 군대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힘이 되었다. 어쨌든 수카르노는 일본에 계속 협력했고 여러가지로 인도네시아의 안정시켰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와 모하메드 핫타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은 네덜란드는 군대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인도네시아를 다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으나, 나치에게 점령당한 것들이 참으로 뻔뻔쩐다 인도네시아는 당연히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 전쟁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와의 전쟁에서 게릴라 전에 굉장히 애를 먹었으며,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군대를 동원한 것을 두고 "저놈들 또 식민지 만들려고 학살이나 해대네 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고, 수카르노는 실제로 이 당시에 다른 서양 국가들에게 저걸 그냥 납둘거냐고 외교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당시 서방에서 경계하던 공산화와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으므로 미국이 인도네시아 편에 서서 중재를 시작하자 네덜란드는 더 전쟁해봤자 이득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인도네시아와의 협상에 나섰고 결국 인도네시아는 독립하게 된다.

수카르노는 1948년 12월에 네덜란드군에 의해 임시수도였던 자카르타가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받자 결국 붙잡혀 포로신세가 되어 방카 섬에 유배되었지만 ,1949년 12월 네덜란드가 협상하면서 얻어진 하그 협정이 통과되면서 인도네시아의 주권과 독립이 이루어지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어서 치뤄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1955년에 자바 섬 서부의 도시인 반둥에 제 1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일명 반둥회의를 열어 제3세계의 결속을 주장하며 그 자리에서 주도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며 국제사회에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물론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인도네시아의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다. 3년 간의 일본 점령 그리고 4년에 걸친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경제는 엉만진창이 되었다, 여러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고 학살로 인한 문제 수습 등도 문제가 됐지만,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성장한 지방군벌들의 세력이 가장 큰 문제로 이로 인해 수카르노 정권은 이 군벌들로 인해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겪었다, 의회에서도 서로서로 편이 갈라져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주장과 ,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식 민주주의,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자들이 의회에서 서로 다툼을 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에서 독립할 때 제정된 신 헌법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국정운영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다른 정치가들과 인도네시아 군부에서 그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수카르논느 인도네시아의 혼란을 해결하겠다는 명분 아래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최초의 총선을 실시해 의원내각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국은 여전히 군벌들로 인한 문제에 시달렸고 결국 국가분열의 위기에 처한 수카르노는 이른바 "지도된 민주주의"를 주장했다.[2] 이것은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된 의회제도를 정지시키고 수카르노 자신이 국내세력의 조정자가 되어 국가를 지도한다는 것인데 사실상 비상계엄령이나 다름없었다. 이 계엄령으로 1959년 7월 5일 인도네시아 의회는 해산되었고 수카르노는 헌법을 정지시키며 독재자가 되었다.

수카르노 정권의 슬로건은 나사콤(NASAKOM)이었다. 이것은 내셔널리즘, 종교, 공산주의에서 따온 말로 국내의 여러가지 대립세력의 단결을 요구하고 수카르노가 그 대립세력들의 조정자가 된다는 뜻이였다. 그렇기 떄문에 수카르노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실권을 쥐고 있는 군부와의 갈등을 조정하여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수카르노는 애국을 주장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1961년, 인도네시아가 같은 네덜란드령이었던 신생독립국인 서파푸아(이리안 자야)를 대규모 무력침공으로 점령후 합병해 버린 전과가 있다. 뉴기니 섬의 절반 가까이를 합병한뒤 뉴기니인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 시키고, 뉴기니인에 대한 만성적인 차별과 강간 학살도 빈번히 일으켜, 아직도 반감과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는 지역. 파푸아 독립반군은 현재도 활동중이다. 또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내걸고뭐? 1963년에 독립한 말레이시아와는 마찰을 빚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북보르네오[3]를 침공하여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전쟁을 일으켜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원조가 정지되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에 수카르노는 공산세력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1965년 1월에는 UN에서 탈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산당에 의한 군수뇌부에 대한 암살쿠데타가 자주 발생하며 군부와 공산당은 계속해서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같은 해 9월 30일 쿠데타를 일어나자, 이에 수하르토가 이들을 진압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척결, 인도네시아 부패척결을 내세우며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냉전하에서 동남아시아의 가장 큰 공산세력 중 하나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소멸하는 계기가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대차게 깨진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태국은 도미노 이론으로 불안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수하르토의 정권장악을 환영했다.

공산당과 친밀한 관계를 쌓으며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던[4] 수카르노는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당하고 1966년 3월에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며 실권을 잃었다, 인도네시아는 그 후 1968년 3월 27일에 정식으로 수하르토가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무려 100만명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악명높은 대학살이 발생하게 된다.

여담으로 한겨레 기사에 의하면 1966년 1월 수하르토와 수카르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수카르노 : "수하르토,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뭐하는 거냐 이게 무슨 짓이냐?

수하르토 : "나는 당신을 민족의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부모님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불행하게도 기대를 저버렸습니다.”왕위를 계승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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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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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의 무덤

수하르토에 의해서 축출된 수카르노는 연금 상태에 처해졌고 쫒겨난지 4년 정도가 흐른 1970년 6월 21일 수도 자카르타에서 사망했다.

3 기타

수카르노라는 이름은 자바어로 인도의 고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무예의 달인인 카르노와 가옹고 국왕의 이름인 수르요푸트로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는 서명을 할때 S.Karno라는 서명을 자주 했었다고 한다.

수카르노는 이슬람 무슬림답게 4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4번째 부인이였던 하리아티의 장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훗날 인도네시아의 5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3번째 부인 데비 수카르노는 일본 출신으로 본명은 네모토 나호코(根本 七保子). 긴자의 고급 술집 접대부로 있다가 수카르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눈에 들의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되면서 이름도 데비 수카르노로 개명하였다. 통칭은 데비 부인. 수카르노가 쿠데타로 축출되어 망명중 객사한 후에 사치 등 행실이 좋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현재 수카르노를 기리며 수카르노 상이 주어지기도 하는데 별로 좋지 못한 사람들 (독재자)들한테 상이 돌아가서 비판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정은(...)

수도 자카르타의 공항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이다.
  1. 1945년 8월 18일부터 인도네시아 지도자로 집권하고 있었으며, 1949년 12월 18일 초대 대통령에 선출됨.
  2. 인도네시아 역사, 비교정치 관련 전공 도서에서는 '교도 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 guided democracy)라는 용어로 쓰인다.
  3. 동말레이시아의 사바, 사라왁
  4.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서로 엇갈린다 몇몇 주장에 의하면 수하르토가 수카르노를 몰아내기 위해서 이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