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의 역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Nederlands Oost-Indië
네덜란드의 식민지
국기휘장
1602 ~ 1799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
1800 ~ 1949
(네덜란드령)
위치인도네시아 제도
수도바타비아
정치체제네덜란드 식민지
지도자네덜란드 총독
언어네덜란드어
인도네시아어

1 개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해체되고 네덜란드가 동인도 제도(인도네시아)를 통치하던 1800년부터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1949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넓게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통치한 1602년 ~ 1799년까지의 기간도 포함한다. 이 경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존속 기간은 약 350년이 된다.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통치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1]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의 통합적인 성격을 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다. 1605년 암보니아를 점령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후추, 정향, 육두구 등)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하였는데,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메이스의 경우, 19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반다제도의 룬 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200년 넘게 네덜란드가 독점한 것이다.

얀 피터르스존 쿤 총독(Jan Pieterszoon Coen)[2]때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바탕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있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 군대는 영국군을 몰아내고 자카르타를 획득, 바타비아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지나친 경쟁으로 말미암아 암보니아 학살 사건이 발발하였다. 1641년,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타이완 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교류망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와 섬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이슬람 왕조 반탐 술탄국과 마타람 술탄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이 두 이슬람 왕조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쇠퇴하게 된 마타람 술탄국과 반탐 술탄국은 각각, 1755년, 1813년에 멸망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회사는 경영난으로 1799년 12월 31일 해체되고 동인도 회사가 소유한 영토는 네덜란드 본국이 네덜란드령으로 국유화하였다.

3 영국의 통치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를 직할령으로 삼았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동인도 제도를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과 그가 주변 유럽국들과 벌인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프랑스 제1제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이 기간동안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4 네덜란드의 직할 통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전후 네덜란드는 다시 동인도 제도 경영에 열의를 보였다. 1825년 마타람 술탄국의 왕자인 디파느가라(인도네시아어: Pangeran Diponegoro)의 반란을 진압하고 1826년뉴기니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의 급박한 정세 변화와 동인도 제도 원주민들의 반란 진압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었고, 네덜란드 본국 정부 역시 벨기에 독립전쟁 등으로 심각한 재정(財政)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요하네스 반 덴 보스(Johannes van den Bosch)[3]는 강제재배/강제경작 제도 (Cultivation System)를 실행하였다. 강제경작 제도는 식민지 농민들에게 강제적으로 국제 상품(차, 커피, 담배, 사탕수수, 쪽 등)을 생산시켜 본국에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일종의 플랜테이션(Plantation), 즉 재식농업 형태이다. 네덜란드 본국은 이렇게 경작한 작물을 헐값에 사들여 유럽에 판매함으로써 급속히 재정을 회복하였다. 반면 강제경작 작물을 위해 자신들의 농토 일부를 (1/5~1/3) 강제로 할당하고, 1년 중 120일 이상을 그 땅의 작물을 위해 노동해야하는 식민지 원주민들은 노동력 착취와 함께 작물도 거의 수탈에 가까운 헐값에 팔아야 했고, 강제경작 작물로 인해 주식인 쌀 재배면적이 급속히 줄어들어 식량난과 함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4]

강제재배 제도는 이러한 부작용 때문에 식민지 농민들의 강한 저항과 함께 본국의 지식인과 중산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서서히 완화되다가 네덜란드 본국 역시 재정이 회복된 이후인 1870년 완전히 폐지한다. 네덜란드는 회복된 재정을 산업혁명에 투자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하고 1848년에 발리를, 1849년보르네오를, 1872년수마트라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였다.

네덜란드의 통치는 외형적으로 인도네시아를 번영시켰으나, 내부적으로는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그 중 특히 심각했던 것은 빈곤이었다. 네덜란드인 관리들과 토착 지주들, 고리대금업자들은 부를 누렸으나, 농민들은 식민본국의 정책에 소외되어 빈곤을 면치 못했고 이들의 불만이 증대되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네덜란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에 수립한 교육 시설과 시스템은 도리어 식민지 지식인이 소수만이 혜택받고 다수의 민중이 소외받는 현실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때 벌어진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1908년 5월 20일 창설된 부디 우토모(Budi Utomo)가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들의 자치, 독립적인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았고 본국과 식민지인들 사이의 마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독립할 때까지 지속하였다.

5 인도네시아의 독립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네덜란드 본국이 1940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점령되자 네덜란드 왕실을 주축으로 망명 정부가 수립되어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망명 정부의 관리들이 계속 통치하였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1942년 일본 제국이 석유 생산지를 확보하고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략하자 망명 정부의 관리들은 1942년 3월 8일 항복하고 동맹국인 호주 등으로 피신하였다.

일본 제국의 점령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 제도 통치는 종료되었다. 이후 일본 제국은 인도네시아의 자원을 수탈하고 반서양 사상을 가르치며 일본 제국에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통치는 근본적으로 이전 지배국인 네덜란드와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현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 저항군의 지도자 수카르노(Soekarno, 1901 ~ 1970년)[5]를 주축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는 이에 반발하였고,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영연방처럼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인도네시아 공화주의자들의 반대로 백지화되었다. 1947년 7월부터 8월까지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네덜란드군 160,000명이 자바와 수마트라에 투입되어 군사 활동을 벌였다.

이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미국이 인도네시아 편에 서서 중재하기 시작하면서 4년 동안 계속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1949년 공식적으로 독립이 승인되었다.

6 기타

인도네시아(Indonesia)라는 명칭이 이때 확립되었다. 1850년대 영국인 조지 얼과 제임스 로건이 동인도 제도를 지칭하기 위해 인도라는 뜻의 'Indo'와 섬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nesos'를 합성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독일의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이 이 용어를 마다가스카르타이완 섬 사이에 위치한 도서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학술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기존에 사용되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라는 말을 밀어내고 점차 대중화되어 1948년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식민지 행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국명이 되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정체성 및 민족의식에 있어 중요한 명칭이 되었다.

7 참고 문헌

  • Leonard Blusse, '만남과 발견: 극동 아시아에서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활동', 2003
  • 주경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아시아 교역:세계화의 초기 단계', 2005
  • 조흥국, '동남아시아에 대한 유럽 식민주의의 동기와 영향', 2010

8 관련 문서

  1. 이 회사들을 뒤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구분지어 선구회사(voor-compagnien)라 한다.
  2. 생물년도 1587 ~ 1629년. 네덜란드 호른 출생, 1618 ~ 1623년, 1627 ~ 1629년 동안 총독을 역임.
  3. 생물년도 1780 ~ 1844년. 네덜란드 헤르비넨 출생. 1830 ~ 1833년 총독 역임
  4. 단순히 식량재배량이 줄어든 것 이외에 노동력 착취와 체력고갈이 무척 심각한 문제였는데, 1년중 최하 120일 이상을 강제경작에 투입할 경우, 농민들 자신이 먹을 작물 재배등에 드는 기간을 합산할 경우, 거의 1년 내내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겨울이 없는 열대지방의 특성 상, 열대 농민들의 노동강도는 온대지방 농민에 비하여 현저히 적다. 이는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체력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온대지방 농민들의 경우, 겨울등의 농한기와 혹서기 기간등을 제외하면 연중 1/3이상 일하지 않는다.
  5. 네덜란드령 동인도 ~ 인도네시아의 정치인.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하다 1927년, 1933년 두차례에 걸쳐 체포되었다. 전후에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