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역사

동남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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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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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에 불교 왕국으로 번영한 진랍 왕조 등이 세워지자 그 영향을 받아 강력한 불교 국가인 스리비자야 왕국이 7세기에 건국되었다. 이 나라는 현재 수마트라팔렘방을 거점으로 자바, 말레이 반도 남부, 칼리만탄(보르네오)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스리비자야의 성립에 자극을 받아 자바 동부에는 사이렌드라 왕국이 세워졌는데, 이 나라가 보로부두르 불탑(佛塔)으로 알려진 세계적 불교 유적을 자바 섬에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이렌드라 왕국을 병합한 스리비자야는 아랍-인도-동남아-중국-신라를 잇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어 중개무역으로 번창하였다. 12세기 후반 스리비자야 왕국은 말레이 반도 전역과 캄보디아, 태국 남부, 베트남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했으며, 중국 나라와의 무역으로 막대한 국력을 비축했다. 그러나 13세기 앙코르를 도읍으로 한 캄보디아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참파(남베트남), 페구(남버마), 수코타이(북부 타이) 등 독립 국가들이 세워졌으며, 스리비자야 내부의 권력 항쟁도 격화됨에 따라 서서히 쇠퇴한다.

2 13세기 ~ 14 세기

1292~93년 사이 쿠빌라이 칸( 세조)이 보낸 몽골군이 한창 기세를 올리며 아시아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당시 자바 섬에 위치해 있던 싱가사리 왕조는 컬타느가라 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쿠빌라이 칸은 이 나라를 원의 피보호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기 위해 맹기(孟琪)라는 관리를 보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컬타느가라 왕은 맹기의 얼굴을 달군 쇠로 지지고, 귀를 자르고,(도둑질을 한 범죄자한테 하는 체벌) 쫓아내 버렸다. 격노한 쿠빌라이 칸이 당연히 군대를 일으켰으며, 대체로 남송인으로 구성된 3만의 병사와 1천 척의 함선, 1년 치의 보급품이라는 큰 규모의 원정을 준비했다.

한편 수마트라 섬의 스리비자야 왕조를 쳐부순 싱가사리 왕조는 지역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침공을 앞두고 이 컬타느가라 왕은 속국인 케디리 왕국의 자야캇왕 왕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왕족들의 증오를 받는 가운데 싱가사리의 왕으로 등극한 자야캇왕 왕이 즐거워하는 동안 컬타느가라 왕의 양자였던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 섬의 지배자였던 알야 위라라자의 도움으로 자야캇왕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목재 자원이 풍부했던 타릭 지역을 지배하게 된 라덴 위자야가 숲을 개간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지역의 마자라는 과일이 쓴 맛을 냈다고 해서 쓴 마자, 즉 마자파힛이라 짓게 된다. 바로 이곳이 후대 인도네시아 최강국이 되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가 된다.

몽골군은 당연히 놀고 있지만 않아 베트남과 참파의 해안을 따라 천천히 남진해오고 있었다. 말레이와 수마트라의 군주들은 몽골 군대의 위세에 겁을 먹어 조공을 바치고 복속했고 몽골군은 다루가치들을 남기며 다가오던 참이었다. 자야캇왕에게 도전했으나 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던 라덴 위자야가 몽골 해군의 접근 소식을 들은 것이 이때였다. 몽골에게 복속하는 것을 댓가로 동맹을 맺은 라덴 위자야는 자야캇왕 왕을 쳐부수기 위해 군세를 모으고 몽골군에게 지도를 넘기는 등 적극 협조했다.

격전의 날에 라덴 위자야군을 선제공격하려던 자야캇왕 왕의 군대는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몽골-라덴 위자야 연합군은 3만의 군세로 10만에 달하던 자야캇왕 왕의 군대를 쳐부수고 2000명이 훨씬 넘는 수가 사살당하고 익사하게 만들었다. 자야캇왕 왕은 자신의 궁전으로 도망쳤으나 몽골군에게 생포되고 만다.

승리를 거두자 라덴 위자야는 조공을 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마자파힛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을 받기를 원했다. 몽골인 장군 시비와 위구르 장군 예케 메세는 라덴 위자야가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했으나 유독 중국인 장군 가오슝(한국식 한자발음 추가바람)만은 반대를 하고 다른 둘을 경고했다. 이 경고는 사실이 되었다.

두명의 장군이 이끄는 이백명의 최정예 병사는 라덴 위자야의 초청에 따라 조공을 받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마자파힛으로 왔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라덴 위자야는 당연히 몽골의 호송대를 쳐부숴 버렸고, 나아가 기습공격으로 몽골군 본대마저 박살을 내 버렸다. 정예 병사가 3000명 이상 숨진 사건에 몽골은 황급히 살아남은 병사와 물자를 수습해 퇴각해야 했고, 라덴 위자야는 인도네시아 일대를 아우르는 마자파힛 제국을 1299년 세우게 된다.[1]

14세기 가자 마다의 정복 아래 중국()-동남아-인도-아라비아-투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차지한 마자파히트 왕국은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이 국가는 16세기 초까지 말라카 해협(믈라카)을 장악하고 국력을 떨쳤는데, 이것이 이 나라의 화근이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방 향료 시장 개척에 사활을 걸어온 포르투갈은 1498년 마침내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 항로를 개척했고, 향료의 산지이기도 한 말루쿠(몰루카) 제도를 장악한 마자파히트 왕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마자파히트 왕국은 전국 각지에서 무역과 농업으로 힘을 비축한 이슬람을 받아들인 지방 영주들이 술탄을 자처하고 이슬람은 점점 더 세력을 얻게 되어 분열되어 가고 있었는데, 그 상태(내우)에서 포르투갈의 압박과 침략(외환)이 겹치자 견디지 못하고 1518년 주변 이슬람 국가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수마트라-말레이 반도-자바 섬에는 강력한 통일국가가 등장하지 못했고, 분열된 상태에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 아래 놓이게 된다. 마자파히트 왕조가 멸망한후 13세기 무렵에 인도네시아 전해져 15세기부터 세력이 커지고 있던 이슬람은 불교와 힌두교를 누르고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종교가 된다.

3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3.1 16세기 ~ 1941년

16세기 후반이 되자 네덜란드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포르투갈은 이 지역에서 쫓겨나고 훗날 동티모르가 되는 일부 지역만을 계속 포르투갈이 통치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1619년 자카르타를 손에 넣고 네덜란드령 바타비아로 개칭함에 따라 300년에 걸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즉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본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지역은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지역이었으나 그 쪽은 영국의 식민지화되어 갈라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국력이 상대적으로 뒤지는 네덜란드는 식민지 개척에 난항을 겪어 자바와 수마트라를 식민지로 삼는 것도 수백 년의 세월을 보냈다.

3.2 일본 제국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끝장낸 것은 일본 제국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본 제국은 1942년 3월 말레이 반도에 침공하고 이어 동남아의 석유 생산의 거점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침공했다. 이어 7월에 자바 해전에서 ABDA(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 연합함대를 격파한 일본에 의해 네덜란드의 동인도 제도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일본 제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통치하면서 인도네시아의 자원을 쥐어짜고 네덜란드로 위시되는 서양적 색깔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인도네시아의 인사들을 고용하고 1944년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키겠다는 립서비스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통치는 본질적으로 네덜란드와 같은 다른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고, 이에 따라 독립 투사들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독립주의가 고조되어 일본 제국에 저항한 저항 운동이 촉발되었다.

3.3 일본 제국의 패망과 독립 선언 및 네덜란드 재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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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 대통령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저항군 지도자 수카르노는 1945년 8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에 강력히 반발한 네덜란드는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한 침략 전쟁을 다시 일으켰는데, 이것이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다. 이 전쟁은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적 속성과 야만성을 드러내어, 20세기 네덜란드 역사에 커다란 오점이 되었다. 전쟁은 네덜란드가 우위에 있었지만 미국의 압력과 인도네시아의 호소로 세계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포기했다.

비슷하게 베트남을 재점령하려고 했던 프랑스의 사례와 달리 전쟁에서도 우위였던 네덜란드가 압박받은 것은 일단 베트남을 장악했었던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달리 넘사벽의 강대국이고 베트남은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베트민이 독립운동의 주역인 반면 인도네시아는 공산주의 단체가 일본의 침략 전에 이미 네덜란드의 탄압으로 싹쓸이당했고 이후 수카르노를 주축으로 한 민족주의 단체가 독립운동을 이끌어 공산화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공산화 위기가 컸던 건 베트남이지, 인도네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도 네덜란드를 압박하였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단교함으로서 네덜란드에 대한 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내었고, 1949년에야 미국과 국제사회의 중재로 겨우 인도네시아는 독립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네덜란드와 싸운 사람 가운데는 일본군, 심지어는 징용된 조선인 출신도 있었다. 일본군 패잔병 항목 참조.

1961년, 인도네시아가 신생독립국인 파푸아 웨스트를 대규모 무력침공으로 점령후 합병해 버린 전과가 있다. 뉴기니 섬의 절반 가까이를 합병한뒤 뉴기니인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 시키고, 뉴기니인에대한 만성적인 차별과 학살도 빈번히 일으켜, 아직도 반감과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는 지역. 파푸아 독립반군은 현재도 활동중이다.

4 독립 초기(수카르노, 수하르토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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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 대통령

독립 후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의 통치를 받았는데, 수카르노는 혼란스러운 정치 철학과 경제 건설 실패로 국내에서 불만이 커지자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게다가 통치 말기에는 점점 좌파로 기울어 도미노 이론을 제창한 미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1965년 쿠데타가 일어나 수하르토에 의해 수카르노는 쫓겨났고, 수하르토는 군정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33년 간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1인에 의한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다.

5 민중 저항운동 ~ 현대

수하르토는 반공정책을 기본으로 하여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을 지휘하고 지방의 독립운동을 억눌렀다. 수하르토 치하에서 인도네시아는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며 좌파정권 수카르노의 독재시절 보다 나라 살림은 나아졌다.

이때 수하르토는 동남아시아 공산화를 두려워한 서구국가들의 묵인하에 100만명이 넘는 정적들을 학살했는데, 수하르토 퇴진 이후인 2010년대에도 학살 책임자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에서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장기 통치와 독재, 부패, 족벌주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고, 결국 1997년 IMF 사태가 일어나면서 인도네시아 경제도 마비되어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1998년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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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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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2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인도네시아어: Susilo Bambang Yudhoyono)

이후 인도네시아는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거쳐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를 거쳐 직선제를 실시, 유도요노가 당선되었고 이후 재선에 성공한다.

2014년 7월 22일 당선 발표, 조코 위도도(인도네시아어: joko widodo)

2014년 7월 9일 투표가 종료된 대선에선 유도요노의 인도네시아 민주당이 일정 지지율을 채우지 못해 참여자격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투쟁민주당의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가 당선되어 사상 첫 직선제를 통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6 관련 항목

  1. 이해에 서아시아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건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