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나오야

志賀 直哉(しが なおや)

일본소설가. 시라카바파(白樺派)[1] 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자신의 신변 체험을 써내려가는 사소설(私小說)과 심경소설에 능하였으며, 간결한 문체와 필치로 당대에 명성이 드높아 '소설의 신(小説の神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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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883~1971

1 생애

1883년 2월 20일 미야기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도쿄로 이주한 이후 가쿠슈인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를 거쳐 도쿄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이후 국문학과로 전향하였다가 대학을 중퇴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와의 불화로 고뇌하였는데, 그 발단이 된 사건이 바로 1901년 일어났던 아시오 광독 사건이었다. 시가는 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보려 했으나 시가의 아버지는 이 광산에 시가의 할아버지가 관계되어 있다고 하여 이를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또 1907년 시가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신분의 차이 때문에 온 집안 사람들이 반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가의 아버지는 시가 몰래 하녀를 강제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강경조치까지 취하면서 시가는 아버지와 심하게 대립하게 된다. 거기에 시가가 소설가를 지망하는 것까지 불만족스럽게 여긴 아버지에 대해 시가는 극도의 증오를 품게 되면서 부자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10년 이후 같이 시라카바파로 꼽히게 되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 사토미 톤(里見弴),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郎) 등과 함께 '시라카바(白樺)'를 창간하고 창간호에『아바시리까지(網走まで)』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 해에 징병검사를 받고 입영하지만 중이염으로 인해 8일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된다.

이후 시가는『오쓰 준키치(大津純吉)』,『정의파(正義派)』등의 소설을 발표하고 원고료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려 했으나, 그가 소설가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와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고, 도쿄를 떠나 히로시마현의 오노미치(尾道)시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계속했으나 잘 풀리지 못했으며, 특히 스모 구경을 하고 귀가하던 길에 전차(電車)에 부딪혀 큰 부상을 입고 온천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쓰인『키노사키에서(城の崎にて)』라는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1914년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의 사촌과 결혼하게 되지만 이 또한 이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결혼 후 시가 부자의 호적관계는 폐적 처리된다. 말 그대로 호적에서 파버린 것

시가 부부는 교토로 이주하였으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부족함을 몰랐던 시가는 생활력이 전무한 수준이었고, 따라서 시가 부부는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장녀 케이코가 태어나지만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연사하고 만다. 이때 시가의 아버지는 시가 가문의 묘지에 딸을 묻으려던 시가의 부탁을 거부하면서 또다시 시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1917년 시가의 부인이 다시 임신하여 딸 루메코를 낳은 뒤 시가와 시가의 아버지는 마침내 화해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和解(화해)』라는 소설로 표현되었다.

아버지와의 화해 이후 시가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어린 점원의 신(小僧の神様)』등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준 단편 작품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으며, 특히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암야행로(暗夜行路)』에서 그의 문학적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진 이후인 1949년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이후에는 주로 소설보다는 수필을 많이 썼다. 1971년 폐렴으로 입원하였고, 10월 21일 만 8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2 주요 작품

  • 『어느 아침(或る朝)』(1908)[2]
  • 『아바시리까지(網走まで)』(1910) - 시가 나오야의 공식적인 데뷔작.
  • 『세이베와 표주박(清兵衛と瓢箪)』(1913)
  • 『키노사키에서(城の崎にて)』(1917)
  • 『화해(和解)』(1917)
  • 『어린 점원의 신(小僧の神様)』(1920)
  • 『암야행로(暗夜行路)』(1937) - 시가 나오야 유일의 장편 소설.

3 평가

시가 나오야는 당대에 이미 '소설의 신(小説の神様)'[3]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소설은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의 심경을 묘사하는 사소설에 특히 뛰어났으며 사소설 최고의 작가로 꼽힌다. 그렇기 때문에 단편소설에서 특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시가 나오야의 소설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창작상의 이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처럼 당대의 소설가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시가 나오야는 거의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이런 것을 다자이 오사무는 매우 혐오하여 그의 작품『쓰가루(津軽)』속에서 작중 화자의 이름을 빌려 시가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대 놓고 시가를 디스해 버린다. 당연히 이를 읽은 시가는 격노하였고, 직후 시가는 잡지사의 좌담회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극렬 비난하였으며, 이후에도 다자이 오사무와 시가 나오야는 계속해서 상호 비방을 계속하였다.

다자이와 같은 사조인 사카구치 안고도 시가의 소설을 사상도 별로고 희작성(다른 말로 하면 재미)도 없으면서 태도만 진지한 소설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군대와 전쟁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싱가폴 함락(シンガポール陥落)」등 전쟁을 찬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이런 점이 비판받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당연히 시가 나오야를 공격하는 데 이 떡밥을 써먹었고, 실제로 까여도 싸다(...) 하지만 적어도 적극적인 태도로 협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고, 다른 시라카바파의 동료 문학가인 무샤노코지 사네아쓰가 적극적으로 전시체제에 찬동하여 활동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소극적인 활동이었다는 참작 사유는 있다. 당시 일본이 미쳐 돌아가던 상황 속에서는 전쟁에 전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쉴드를 쳐 줄수는 없지만.

4 그 외

시가 나오야는 패전 직후였던 1946년,「국어 문제(國語問題)」라는 글을 통해 프랑스어 공용화론을 주장한 일이 있다.

나는 60년 전, 모리 아리노리가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려고 했던 일을 이 전쟁 중 때때로 떠올렸다.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본의 문화가 지금보다 월등히 진보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과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학업도 보다 쉽게 진전되어 있었을 것이며, 학교생활도 보다 즐겁게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우리들은 척관법[4]을 모르는 아이들처럼, 낡은 국어를 모른 채 외국어라는 의식 없이 영어를 말하고, 영문을 썼을 것이다. 영어 사전에 없는 일본의 독특한 말도 잔뜩 생겨났을 것이며, 만요슈[5]겐지모노가타리도 그 말에 의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것이라는 것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중략)

거기서 나는 이 경우 일본은 큰 맘을 먹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언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가져와 그대로 국어로 채용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한 언어로는 프랑스어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60년 전 모리 아리노리[6]가 생각했던 일을 지금이야말로 실현한다면 어떨까. 철저하지 못한 개혁보다도 이것은 옳은 일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시대에는 실현은 곤란했다지만, 지금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대 의견도 여러가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국어를 완전한 것으로 고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이상 바랄 나위가 없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우리들의 감정을 버리고, 100년에 100년 후의 자손을 위하여 결심할 때라고 생각한다.

외국어에 어두운 나는 프랑스어 채용에 자신을 가질 정도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생각한 것은 프랑스는 문화가 진보한 나라이며, 소설을 읽어봐도 무언가 일본인과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며, 프랑스의 시에는 와카, 하이쿠 등의 경지와 공통되는 면이 있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문인들에 의해 때때로 정리된 언어라고도 하며, 그러한 의미로 프랑스어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채용설에서 그 일을 생각하여, 어중간한 개혁으로 몇 년, 몇십년 동안 불완전한 국어로 잘못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확실하며, 철저한 것이며,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어의 전환에 대해서 기술적인 면의 일은 내게는 잘 모르는 일이나, 그렇게 곤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원의 양성이 완료된 때에 소학교 1학년부터, 프랑스어로 전환한다면 좋다고 본다. 조선어를 일본어로 전환했을 때는 어땠을까.


시가 나오야 저 개객끼를 봤나. 어땠긴? 시궁창이였지.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 공용화론이 이미 60여년 전 엄청난 비판을 받고 버로우했던 마당이었는데다, 시가 나오야 자신이 프랑스어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막연하게 프랑스어를 받아들이자고 한 이 주장은 당연히 엄청나게 비판받았으며, 시가 나오야를 비판할 때 종종 언급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1. 1910년 창간된 문예동인지 '시라카바(白樺)'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동인에 참가한 작가들은 주로 인간주의, 이상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주로 당시 일본 사회의 상류층의 자제가 많았는데, 때문에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상류층 도련님들의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2. 시가 나오야의 데뷔작은『아바시리까지(網走まで)』이지만, 그가 처음 쓴 작품으로 든 것은 이것이었다. 더 이전에 쓴 소설로는『유채꽃과 소녀(菜花と小娘)』(1904) 라는 습작이 있다.
  3. 그의 작품인 『어린 점원의 신(小僧の神様)』을 한자음 그대로 번역하면 '소승의 신'인데, 여기에 빗대어 지어진 별명이다.
  4. 동양 사회의 전통적인 도량형 방식
  5. 万葉集; 7~8세기 이전 일본의 고전 와카(和歌) 약 4500수 이상이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이다.
  6. 메이지 유신이후 초대 문부대신으로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쓰자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