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사양[1]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대표작 인간실격의 본문 첫 문장
목차
1 일본의 문호
1.1 개요
일본의 소설가. 1909년 아오모리현 카나기마치(현 고쇼가와라 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츠시마 슈지( 津島 修治(つしま しゅうじ))이다. 일본측 위키 설명에 따르면,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에 대해 이 이름은 그가 태어난 고향인 쓰가루 사투리로 읽어도 똑같이 '다자이 오사무'로 읽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츠시마 슈지라는 이름은 다자이가 태어난 아오모리 현 기타쓰가루 지방에서는 '지시마 슈지'로 읽힌다고.[2]
여담으로 '治'는 돌림자다. 형제들의 이름도 큰형은 분지(文治), 둘째 형 에이지(英治), 셋째형은 케이지(圭治), 동생은 레이지(礼治)... 이런 식이기 때문.
1.2 생애
1.2.1 어린 시절
아버지 츠시마 겐에몬은 부농인 마쓰모토 가문에서 온 데릴사위이며, 마을의 대지주였고 현회 의원, 중의원과 귀족원의 의원까지 지낸 지역의 유지였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났을 당시가 츠시마 집안의 최전성기로 당시 츠시마 겐에몬은 아오모리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었으며 중의원과 귀족원 의원직도 돈으로 샀다고 한다. 당시 츠시마 겐에몬의 화려한 저택은 잘 보존되어 다자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 본인의 말로는 츠시마 집안은 빈농으로 살다가 다자이의 증조부 때부터 가문이 흥했다고 한다. 이때 증조부가 가문을 일으키는 방법은 고리대금업이었다고. 츠시마라는 성 때문에 쓰시마에서 이주해 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다자이는 자신의 이런 집안 내력과 풍요로운 현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이는 후일 그의 인생을 파격적인 삶으로 이끈다.
아버지 겐에몬과 어머니 다네 사이에서 태어난 11명의 자녀 중 열째로, 6남이었으나 첫째, 둘째 형은 요절해 사실상 4남으로 자랐다. 그 외의 형제로는 네 명의 누나와 세 살 아래의 유일한 동생(17세에 요절)이 있으며, 증조할머니, 할머니, 고모와 그 딸 네 명, 하녀를 포함한 30명에 달하는 대가족 속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3~8살 때까지 다자이를 돌봐준 유모 다케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은 듯, 이후 그녀를 <추억>이라는 작품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1916년에 카나기 제1진죠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1920년 증조모가 별세한다.
1922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고등소학교에 입학하는데, 이 학교에서 고향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된다. 이때의 친구들은 소설 <친우교환>에 등장한다. 중학교에 바로 가지 않은 것은 수석으로 졸업했으에도 불구하고 다자이의 학업성적을 걱정한 아버지아 그의 학력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 사무조합에서 운영하던 학교에 입학시켜 1년간 다니게 하였기 때문. 그는 재학 중 친척이었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방과 후에는 국어, 산술 등의 과목을 개인 지도도 받았다.
1923년에 아오모리현립 아오모리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에 아버지가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 재학 시절인 1925년 3월 '아오모리 교우회지'에 발표한 <마지막 섭정>을 시작으로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한다. 가까운 친구들과 동인지 <성좌>, <신기루>를 만들었고,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삶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1926년에는 큰형, 셋째 형을 중심으로 잡지 <아온보>를 펴내기도 했다.
1927년, 다자이는 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히로사키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 이즈미 교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학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하나 이 해 7월 아쿠타가와가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화류계에 입문할 생각으로 기다유[3]를 배우고 요정에 출입하며 우울하게 지내다가 게이샤 베니코(본명은 오야마 하쓰요)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15세였다.
1928년에는 동인지 <세포문예>를 창간한다. <무간나락>을 본명에서 한자만 바꾼 辻島衆二(쓰시마 슈지)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며, 이때 동인으로 가담한 이소노가미 겐이치로에게서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시도했지만 부유한 자신의 집안 때문에 계급이 문제라고 절망한 나머지 1929년 12월, 안정제의 일종인 카르모틴을 과다복용해 자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19세의 나이 때 한 이 시도가 그의 인생에서 여러 번 시도된 자살 기도 중 최초의 시도였다. 여담으로 다자이의 형도 공산주의 관련 비합법 운동에 참여했으나 가담했다가 사망했다.
1930년 히로사키 고등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불문학과에 입학했는데 프랑스어는 하나도 모르고 단지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서 지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 대학 1학년의 커리큘럼은 지극히 수준이 높아 오늘날 대학 2~3년차 수준의 커리큘럼과 맞먹는 것이었다.[4] 불어를 하나도 모르는데 어려운 불어를 공부하려니 수업내용을 따라가기도 힘들었고 본인도 공산주의 운동에 더 집중해서 수업에는 거의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무렵 다자이는 반제국주의 학생 연맹에 가담하고, 또한 자신의 집을 근거지로 하여 조직의 기관지를 인쇄하거나 중앙위원회 회의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도 전단을 뿌리거나 조직 운영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였다.
대학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탓에 당연히 유급을 거듭해 수업일수 부족으로 제적처분을 받았다. 이때 "교수님들 이름을 한 명이라도 말할 수 있으면 제적시키지 않겠다"라는 농담 같은 제안을 들었는데 수업을 거의 나오지 않은 다자이는 이름을 한 명도 말하지 못해서 결국 제적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이 무렵에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고, 11월에는 친하게 지내던 카페 여종업원인 타나베 시메코(타나베 아쓰미라는 가명을 썼다)란 여자와 가마쿠라의 코유루기곶에서 동반자살을 기도하지만 시메코만 죽고 다자이는 살아남았다. 21세의 나이, 두 번째 자살기도였다. 자살방조죄로 체포됐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소설 <인간실격>, <광대의 절규>에서 묘사된다.[6]
다음해부터 베니코와 동거를 시작했고, 임시 필명인 슈린도(朱麟堂)라는 이름으로 정형시 하이쿠를 짓는 데 골몰하면서 계속 좌익 운동에 가담하나 이듬해 1932년 자수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을 그만둔다. 이는 급기야 아오모리 현의 고향 집에까지 경찰들이 찾아갔고 그의 좌익 활동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아서, 당시 현의원이었던 맏형이 분노하여 “아오모리 경찰서에 출두하여 좌익 운동에서 이탈할 것을 서약하지 않으면 (송금을 중단하고) 모든 인연을 끊겠다”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 너 그 짓 안 때려치면 돈 끊는다, 색히야. 역시 돈이란 무섭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행동에 깊은 자기혐오를 느꼈다고 한다. 이때 <추억>을 쓰기 시작한다.
1.2.2 작가 데뷔 이후
1932년 이후 다자이는 소설가로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1933년에 단편소설 <열차>를 발표했다. 이때 처음으로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대한 다자이의 존경심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해와 다음해에 걸쳐 동인지에 여러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우들과 친교를 맺는다. 1935년에는 소설 <역행>을 발표하며, 미야코신문사 입사 시험을 응시했으나 낙제한다. 가마쿠라에서 입수 자살을 다시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26세의 나이, 세 번째 자살기도였다.
1935년은 다자이에게 있어 여러모로 파란만장한 해였다. 위의 자살기도뿐 아니라 맹장염에 걸렸다가 병이 더쳐 복막염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입원해 3개월 동안이나 요양했고, 진통제로 사용한 파비날 중독으로 고생했으며[7], 그 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아쿠타가와상의 후보로 올랐으나 2등으로 낙선했다. 심지어 그 뒤에도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후술.
아쿠타가와 상 때문에 여러모로 일이 있던 와중에도 다자이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첫 작품집을 냈다. 파비날 중독이 재발하여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했다가 치료받고 퇴원한 건 덤. 이때, 약물 중독 증세가 더욱 심해지자 걱정하던 이부세 마스지와 주위의 동료들은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요양’이라고 속이고, 그를 무사시노 병원의 정신병 병동에 입원시켰다. 그는 한 달 후에 완치하여 퇴원했는데, “나를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고 했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이 경험은 이후 <인간실격>에서 표현된다.
1937년에는 내연의 처 베니코가 자신이 입원한 동안 그의 집안 친척과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다니카와 온천에서 칼모틴을 복용하여 동반자살을 시도했으나 역시 미수에 그친다. 28세 때, 네 번째 자살기도였다. 이후 잠시 절필상태에 들어갔으며, 귀경 후 결국 베니코와 헤어진다. 여담으로 베니코는 1944년 중국 칭다오에서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38년, 친구의 소개로 야마나시 현 미사카 고개에 있는 텐가차야를 방문해 3개월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스승 이부세 마스지에게 코후시 출신의 이시하라 미치코라는 여인[8]을 소개받아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결혼 후 아내의 고향인 코후시로 가서 정착한 다자이는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이곳에서 여러 뛰어난 단편소설들(주로 밝은 분위기의 작품들)을 창작했다. 작가로서의 지위가 다져지면서 매우 많은 작품을 창작했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후에 일본의 국민소설로 교과서에도 나오게 된 달려라 메로스다.
1941년 6월 장녀 소노코가 태어났고, 11월에는 징집영장을 받았으나 흉부질환으로 면제를 받는다. 전쟁 중에도 집필을 계속했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쓰가루(津軽)>가 있다.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 형식의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앞 문단에서도 언급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사토 하루오는 '다른 모든 작품을 없앤다고 해도 <쓰가루> 하나만 있으면 그는 불멸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라고 평하였다.
비록 면제를 받았지만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다자이라고 무탈할 수는 없었다. 1942년에는 <불꽃놀이(후에 <일출 전>으로 개제)>를 발표했다가 시국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문 삭제 명령을 받았고, 1943년에는 <종달새의 소리>를 완성했으나 검열을 우려해 출판을 연기했으며, 이듬해 출판하게 되었으나 인쇄소가 공습을 당해 출판 직전의 책들이 몽땅 소실되었다. 으아악![9]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창작에 매진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시대상황으로 인해 절망과 좌절을 거듭하며, 작품 발표를 거의 하지 못하는 등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한 시기다. 도쿄대공습 때는 처자를 아내의 친정으로 보내고 혼자 도쿄에 남았다가 본인의 집도 파손되는 바람에 그 역시 처가로 피난했고, 3개월 후에는 처가도 공습으로 전소되어 다시 다자이의 고향으로 피난해야 했다.
패전 후에도 1946년 한 해 동안만 15편의 작품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고, 1947년 몰락한 화족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사양(斜陽)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사양족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당시에는 매우 성공한 소설이지만 <달려라 메로스>, <인간실격>에 비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1948년에는 다자이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자전적 소설인 인간실격과 <앵두(桜桃)>를 집필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자이는 다마가와 상수로에서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투신자살했다. 다자이의 자살이 워낙 충격적이라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는데 애인과의 문제로 인해 그랬다는 설,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다운증후군이라 근심이 많아서 그랬다는 설 등이 횡행했지만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었다. 일단 대부분 게이샤였던 야마자키 도미에의 과거에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더불어 청산가리 음용후 투신했다는 소문이 돌아 다마가와 상수로의 수질검사가 시행됐다.
6월 13일 심야에 투신한 뒤 6월 19일에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다자이의 39번째 생일이었다. 여담으로 다자이의 시신을 수색하는 기간 동안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고 한다.
유서로 남긴 유언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유작은 <굿바이>가 되었다.
1.3 미시마 유키오의 디스
생애에 무려 네 번이나 자살미수를 펼친 끝에 끝내 자살에 이르렀던 탓에 무겁고 우울한 소설을 쓴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작품들도 여러 편 썼다. <오토기조시(お伽草紙)>[10]가 대표적인 그런 경향의 작품으로 이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싫어했던 미시마 유키오는 "그럼 다자이가 쓴 <오토기조우시>를 부정해봐라"라는 지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미시마 유키오도 처음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허구의 방황-다스 게마이네>를 읽고 그를 높이 평가했고 <사양>도 대단히 높게 평가했지만 후에 이 소설에 나오는 몰락 화족의 언행이 비현실적이라고 다자이까로 돌변했다.
예를 들어 <사양>의 주인공은 기품 있는 귀족가문 출신인데 사용하는 말은 귀족의 일본어가 아니다. 자신이 귀족 출신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언제나 사전 자료조사에 철저한 미시마가 보기엔 어떻게 보였을까? 이후 다자이와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면전에서 "당신의 문학은 싫습니다"라고 까버렸다. 미시마가 이 발언을 할 때는 당시 젊은 문인들이 나름대로 원로 취급받던 다자이에게 단체로 인사를 갔을 때였는데, 이 말을 들은 다자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미시마를 바라보다가 "그래도 역시 좋아하니깐 여기 온 거겠지"라고 얼버무렸다.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자이를 까는 데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다자이가 자살한 것을 두고 "그런 개같은 성격이 문제라서 그 인간은 자살한 거다.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자살했을 리가 없다"라고 까지 거의 폭언 수준의 발언을 쏟아냈다. 그런데 당신도 자살했잖수? 그러나 문학 평론가들이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미시마의 다자이 디스에 대해 "미시마의 내면에는 다자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더 격렬하게 깐 거다"라는 평을 하고 있다. 아니 미시마 본인이 그걸 잘 알고 있었다.
1968년에 히토쓰바시 대학(一橋大學)에서 있었던 강의에서 "나는 다자이와는 더욱 더 대조적인 방향을 향하려 하는데, 그것은 아마 내 안의 어딘가에 다자이와 같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욱 분발해서 그와는 반대되는 쪽으로 가는 것이겠지요."(「학생과의 티치인 - 국가 혁신의 원리」)라고 발언하거나, 무라마쓰 다케시(村松剛)나 출판사 『신쵸(新潮)』의 편집자에게 자기 스스로를 "다자이와 같다"는 취지의 발언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에서 자기 내면에 어두운 모습을 그림자라고 부르고 이걸 부정할수록 그림자가 더욱 커진다고 하였는데 미시마가 적절한 예다.
1.4 아쿠타가와상과의 악연
이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면 이렇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를 존경하던지라 상에 나름대로 욕심이 났다. 이때 심사위원인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심기를 고려해서 본래 다른 작품을 내려고 했다가 <역행>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는 오류이고, 아쿠타가와상의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은 <역행>이 맞으나 실제로는 <역행>과 함께 <어릿광대의 꽃>이라는 작품도 후보로 올라 있었다. 그리고 다자이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사토 하루오는 <역행>보다는 <어릿광대의 꽃> 쪽을 최종 후보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자이 또한 <어릿광대의 꽃>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다자이의 <어릿광대의 꽃>을 다자이의 실제 생활과 연관지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후보 작품으로 선정되는 것을 꺼려했고, <어릿광대의 꽃>은 최종 후보 작품 명단에서 제외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해 아쿠타가와상은 이시카와 타츠조(石川 達三)의 <소우보(蒼氓)>란 작품이 수상하게 되었다(참고로, 최종선고 과정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심사회에 결석했다). 이 때문에 빡친 다자이는 "작은 새를 키우고, 무도회를 보러 다니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생활인가? 찔러버릴까, 라고도 생각했었다. 악당이라고도 생각했었다..."라고 문예통신이란 잡지에서 가와바타를 공격하기도 했다(가와바타 본인은 시크하게 "불안정한 사생활에 대한 지적마저도 듣기 불편한 소리로 들렸다면 나는 단호히 취소하겠다"며 받아쳤지만). 결국 다자이에 이어 가와바타 역시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이후 역시 자살하게 된다.
이런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자이 오사무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스승격인 존재이기도 했던 사토 하루오가 아쿠타가와상의 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다자이는 1회 수상의 좌절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1936년에도 제2회 아쿠타가와상의 수상을 노렸지만 1935년 10월에 발표한, 다자이의 회심의 역작 <다스 . 게마이네>는 후보에 오르지 못하고, 그해 아쿠타가와상도 해당 작품 없음으로 결론이 나버렸다. 그리고 1936년도 상반기를 대상으로 한 제3회 아쿠타가와 상의 대상 후보에 다자이의 <만년(晩年)>이 고려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다자이는 자존심을 접고 사토 하루오는 물론 가와바타에게까지 사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가와바타도 "나는 예선 후보 작품을 빠짐없이 읽었다. 의구심이 가는 작품은 두 번씩 읽었다. 다자이씨의 작품집 <만년>도 이전에 읽었다. 이번에 적당한 후보 작품이 없다면, 다자이씨의 특이한 재능이 수상을 해도 좋을 것이다"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비췄다.
하지만 제3회 아쿠타가와 상은 오다 타케오의 <성외(城外)>라는 작품에게 돌아가고, 다자이의 아쿠타가와 수상은 다시 무산되어버렸다. 이거 훗날의 어떤 작가가 생각나는데? 그리고 당연시하던 아쿠타가와상 수상에 거듭 좌절한 다자이가 사토 하루오와의 서간을 공개하며 자신이 떨어진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을 표출했고, 이에 분개한 사토 하루오도 소설 <아쿠타가와상>에서 다자이의 둔감함을 비난, 둘은 한동안 서먹한 사이가 된다. 그리고 3회 이후 아쿠타가와상 후보 선정의 기준이 '한 번 후보에 오른 작가의 작품은 다시 후보로 선정하지 않는다'로 확립되면서솔직히 이렇게쯤 되면 좀 빡칠 만하다. 다자이의 아쿠타가와상 도전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사실 위에서는 아쿠타가와에 대한 동경이라고 간단히 썼지만, 실은 좀더 복잡한 이유가 있다. 당시 다자이는 약물 중독으로 인해 불어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상금이 필요했다. 또한 자신의 지난 일들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도쿄에 상경한 이후, 동반자살을 감행하였으나 자신만 살아 남았으며, 가족조차 반기지 않은 화류계 여자와 결혼했으며, 비합법 활동을 하고, 대학조차 졸업하지 못해 취직도 실패하는 등 가족들에게 민폐만 끼쳤으니까. 그러나 결국... 현실은 시궁창.
1.5 시가 나오야와의 대립
다자이 오사무는 대표작 중 하나인 <쓰가루>에서 일본의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 하나였던 시가 나오야(志賀 直哉)를 정면으로 저격질 까버렸다.
일본의 어느 50대 작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그다지 좋지 않아"라고 그만 무심결에 답해버렸다. 최근 그 작가의 과거 작품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도쿄의 독서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신'이라는 묘한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도 나타나서, 그 작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 독서인의 취미의 고상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이상한 풍조마저 생겨났다. 정작 그야말로 응원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폐가 된다는 식으로 그 작가는 아주 곤혹스러워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전부터 그 작가의 기묘한 권세를 보고 쓰가루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11]에서 "천한 놈이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라고 혼자 흥분하여 순순히 그 풍조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에 그 작가의 작품을 대부분 다시 읽어보고 '훌륭해!'하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취미의 고상함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야비한 점이 이 작가의 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려진 세상도 구두쇠 소시민이 별 의미 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상황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때때로 '양심적'으로 반성을 하지만 그런 부분은 특히 진부하고 그런 불쾌감을 주는 반성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쪽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학적' 미숙함에서 벗어나려고 해서 오히려 그것에 빠져버린 것 같은 좀스러움이 느껴졌다. (다자이 오사무. 서재곤 譯.『쓰가루 · 석별 · 옛날 이야기』. 문학동네, 2011 : P.60~61) |
물론 직접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소설의 신(小説の神様)'이라는 별명은 이미 당대에 붙여진 별명이었기 때문에 '이 어느 50대 작가'가 시가 나오야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시가 나오야는 이 사건 이후 다자이 오사무를 계속해서 혹평했으며, 가쿠슈인을 나오는 등 상류층 출신이었던 시가 나오야는 다자이 오사무가 뒤에 출간한 <사양>에 나오는 몰락귀족 출신 딸의 말투가 산골마을 여중을 나온 여자의 말투와 같다면서 혹평했다. 물론 다자이도 가만 있지 않고 문예잡지 등을 통해 시가 나오야를 계속해서 디스했다.
예를 들면 다자이가 쓴 <범인>이라는 작품을 시가는
"처음부터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끝까지 읽지 않아도 결말이 눈에 다 보이고 시시하더라."
라고 대놓고 깠는데, 다자이는 자신이 연재하던 평론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소위 '결말'이라는 것을 꽁꽁 숨기고 숨기다가 불쑥 들이미는 것, 그것을 범상치 않은 재능이라 여기는 선배는 딱하기 그지없다. 예술은 시합이 아니다. 봉사다. 읽는 이를 상처입히지 않고자 하는 봉사인 것이다. 그렇지만 상처를 입고 기뻐하는 변태(...)도 많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다(중략) '결말'를 피하면서 그러나 그것에 대한 암시와 흥분으로 글을 써온 것은 네 녀석 아니던가?"
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각자 알아서....
시가: "네 소설은 결말이 너무 하나같이 뻔하고 시시해서 재미없거든? 반전을 좀 주지 그래?"
다자이: "반전 없이 결말이 정해져 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도 있거든요? 독자들 반전으로 깜짝 놀라게 하려고 글 써놓고 그 반전에 놀라는 독자를 보면서 기뻐하는 당신이 오히려 더 변태스러운 거 아세요?"
그런데 나이도 훨씬 어린데다[12] 당시 문단에서 그야말로 신적 존재였던 시가 나오야를 거스른다는 것은 당시 문단에서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자기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또 문단의 원로로 대접받는 인물을 두고 "네 녀석", "너"라고 부르는 다자이 오사무의 패기를 보여주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세계의 파탄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시가 나오야는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한 얼마 뒤 다자이 오사무의 죽음에 관한 글을 써서 "다자이의 몸과 마음이 그렇게 쇠약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대화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행동이 어른스럽지 못했음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물론 시가 나오야가 쓴 이 글에 대해서는 다자이의 죽음과 관련해 자신에게 쏟아지던 비난에 대한 변명 비슷한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 일본문학계에서의 위상은 다자이 오사무쪽이 훨씬 높다. 국내에서도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가 나오야는 일본문학에 대해 깊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듣보잡 수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가 나오야의 소설이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 될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다자이 오사무쪽이 더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
1.6 작품 특징
단편과 장편을 모두 잘 쓰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고 <만원(滿願)> 같은 불과 원고지 몇 매밖에 되지 않는 엽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여학생>은 1인칭 시점으로 화자가 여성이라서 남성인데도 여성의 심리를 어찌 그리 잘 아냐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특정 여성의 일기를 바탕으로 써서 그런 것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후대의 연구에 의하면 다자이 오사무가 단골 세탁소에 방문했는데 세탁소 주인의 딸이 쓴 일기가 펼쳐져 있었고 이걸 우연히 본 다자이는 해당 일기를 잠시 빌려달라고 한 뒤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해당 일기 원본을 입수한 평론가에 의하면 소설과 일기 내용이 거의 90% 이상 일치한다고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다자이의 이런 도작 내지는 모작 의혹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여고생에 대해서는 소름끼칠 만큼 세세하게 묘사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당시에 모에를 아는 작가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쇼와 10년대(1935~45년)를 대표하는 무뢰파[13]의 선두주자로,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이시카와 준과 더불어서 상당히 퇴폐적인 작풍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한 정신상태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동시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절대자를 강렬하게 요구한 작가라는 연구도 있다. 그래서인지 성경과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駈込み訴え>[14]에서는 이스카리옷 유다의 갈등을 소재로 하기도 했다.
그의 말년 작품인 인간실격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의 국민소설로 불리며 교과서에까지 수록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15]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인 빙점에서도 여주인공인 요오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 '사양'을 예로 들며 간접적으로 그녀의 추궁을 피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쓰에: 요오꼬, 오늘 어딜 갔었지?요오꼬: 엄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읽어보셨어요?
나쓰에: 어딜 갔었는지 묻고 있잖아, 지금?
요오꼬: 그 책을 봤는데, 비밀이 생겼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16] 래요. 그럼 저도 이젠 어른이 된 거에요, 엄마.
1.7 여성관계
호색한으로 유명한 인물이 결코 아니지만, 은근히 엮인 여성들이 많다. 첫 애인 하쓰요(통칭 베니코), 동반자살을 시도한 다나베,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 미치코, <사양>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펜팔 친구에서 내연관계가 되어 아이까지 얻게 된 오오타 시즈코, 전쟁 미망인으로 알게 되어 그와 최후를 함께한 마지막 정부 야마자키 토미에까지.
특히 첫 애인이었던 오야마 하쓰요와의 스토리가 화려하다. 다자이는 21세 때, 그녀가 고향 유지의 첩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요하여 그녀를 도쿄로 데려왔다. 명문가의 아들이 게이샤를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에 퍼지면서 소동이 벌어졌는데, 모든 친척들을 놀라게 하고 어머니에게 지옥의 고통을 맛 보게 했다라고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다자이의 맏형이 상경하여 “(하쓰요가 게이샤이더라도) 결혼은 인정하지만 집안에서 제적시키겠다”며 그들의 관계를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형과 하쓰요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에서 이름을 빼 분가를 했고, 비로소 ‘다자이’라는 이름으로 오야마 가문에 폐백을 보냈다.
그 사이 도쿄에 남아 있던 다자이는 또 다나베와 만나 그녀와 동반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후(...) 요양 차 머무르던 아오모리의 시바타 여관에서 하쓰요와 약식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다.
1.8 평가
다자이는 일본 근대문학 특유의 문학 장르인 사소설을 나름대로 개척한 작가로 손꼽히는데, 남다른 독자성을 지닌 천재성 넘치는 작풍을 보인다. 예리하고 섬세한 감수성과 뛰어난 스토리텔러로서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으며, 인간의 속성과 삶의 모습들에 대한 다소곳한 풍자를 통해 인간의 고뇌와 진실을 고즈넉하게 파헤치고 있어 때로는 잔잔한, 때로는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심각한 내용에서부터 가볍고 유머러스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창작을 했다. 초기 작풍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주로 나타나 있다. 생가인 쓰시마 가문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스스로의 눈으로 목격하고 자랐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강자를 향한 비판과 약자를 향한 사랑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동반 자살 후 죽은 여성에 대한 자책으로 작품 중에서 성서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는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밝은 내용의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일본 신문학사상 가장 천재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일본 평론가들 사이에서
놀랍고도 뛰어난 자화상의 작가
더할 나위 없는 일본 문학의 신
천재 아쿠타가와가 그 생애의 마지막 판에 도달한 지점에서 출발한 천재 중의 천재
이런 격찬을 받을 정도. 일본 현대문학사의 전성기를 장식한, 이 시기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불후의 독자성과 보편성을 확보한 작가다. 문장은 마치 물의 흐름처럼 우아하며,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는 흥분마저 느끼게 하는, '세기의 정서'라고 칭찬받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품들이다. 어느 번역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 까닭 모를 우수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야릇한 감정과 감격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다자이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거의 우상에 가깝다. 해마다 그의 생일인 6월 19일에 그를 추모하는 '앵두기'가 묘소 앞에 개회될 정도다. 심지어 다자이의 제자는 그의 무덤 앞에서 자살하기도 했다.[17]
1.9 한국어 번역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근대 문학 작가들 중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작품들은 한국어로 활발하게 번역되어왔다. 특히 대표작인 인간실격은 현재 판매되고 있는 번역본만 해도 10여 종에 달한다.
2014년 12월, 출판사 도서출판b에서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전 10권으로 완간하였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기행문 형식의 소설인 쓰가루를 비롯해, 어복기(魚服記) 등 쓰가루 사투리를 쓰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몇 편 썼는데, 다자이 오사무 전집에서는 쓰가루 사투리를 모두 전라도 방언으로 번역했다.
소설가 김승옥이 기획한 다자이 오사무 컬렉션도 있는데, 이쪽은 전집은 아니고 선집이다. 현재 단편집 두 권과 '사양'이 나와 있다.
1.10 기타
자녀로는 아내 미치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1941년생 장녀 소노코와 44년생인 아들 마사키(10대에 요절), 47년생인 차녀 사토코, 그리고 같은 해 오오타 시즈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하루코가 있다. 이 중 사토코는 '쓰시마 유코'라는 필명으로 역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으며, 그녀의 작품은 한국어로도 여러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다만 쓰시마 유코가 태어난 바로 다음해에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쓰시마 유코는 2016년 초에 별세했다.
2 1의 인물을 모티브로 한 문호 스트레이 독스의 등장인물
- ↑ 이 문장은 도쿄 구울에도 인용된다.
- ↑ 한국으로 치면 경상도 사투리에서 '송병철'이라는 이름이 된발음으로 가운데 '병' 자가 '여'와 '으'의 중간 발음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 비슷한 셈.
송뱽챌이 - ↑ 義太夫, 겐로쿠 시대에 다케모토 기다유가 시작한 조루리의 한 파로 대가 굵은 샤미센을 사용했다.
- ↑ 여기엔 당시 일본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시절 고등학교는 오늘날 대학 교양수준(1학년~2학년)의 수업이 진행되었고, 대학은 입학하자마자 대학 전공 수업이 진행되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나온 히로사키 고등학교가 종전 후 히로사키 대학으로 바뀐 것이 그 예. 오늘날의 도쿄대학 교양학부는 구제 일고(一高)의 후신이다
- ↑ 제적심사가 아니라 졸업시험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이는 틀린 말이다. 정확히는 졸업 쯤 있었던 구두시문이다.
- ↑ 흔히 '오바 요조'라는 이름의 소설 등장인물을 인간실격 주인공으로 알고 있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중편인 광대의 절규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이 이거다. 자살기도와 기소유예 과정에만 중점을 맞춘 작품이 광대의 절규.
- ↑ 이때뿐 아니라 남은 평생을 두고두고 약물중독증에 시달렸다.
- ↑ 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고 한다.
- ↑ 다행히 교정판이 남아 있어서 1945년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 ↑ 원작은 무로마치 시대에 나온 일본의 설화집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일본 전쟁 중에 방공호 속에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혹부리 영감님'이니 '우라시마 타로' 같은 일본의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머릿속에서는 그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비틀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구성이다.
- ↑ 작중에서 쓰가루 사람들에 대해 다자이는 "그 지역 풍습은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도 복종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다"고 한 군담소설의 내용을 빌려, 성공한 사람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저게 지가 잘나서 된 줄 아나? 천한 주제에 어쩌다 조상 잘 만나서, 어쩌다 운이 좋아서 출세한 거지, 순수하게 자기 실력만으로 이룬 게 뭐 있다고!"라고 까기 바쁘다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쓰가루 속에서는 현지 출신으로 지위가 높은 데다 공도 많이 세운 군대 장성도 고향을 방문하면서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으로 눈에 안 띄게 갔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이거 어떻게 보면 단순한 열폭 같은데 - ↑ 시가 나오야는 1883년생,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생. 26세나 연하였다.
- ↑ 혼미 속에 허탈함과 퇴폐를 표방한 일본 작가들의 유파.
- ↑ 국내에는 <직소>, <유다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 1990년대에 장편 애니화하기도 했지만 망했다. 이후 모리미 토미히코가 리메이크를 한 바 있다.
- ↑ 요오꼬가 예로 든 부분은 정확히는 "다른 동물에게는 절대로 없고 사람만이 가진 것. 그건 바로 비밀이란거에요."라는 대사다.
- ↑ ①2014년 열림원 출판,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의 역자 전규태의 후기 겸 해설. ②2005년 도서출판 하늘연못 출판, 작품집 <여자의 결투>의 김성수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