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是儀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자우(子羽). 북해군 영릉현 출신으로 본래의 성은 씨(氏).

처음에는 현의 관리였는데, 당시 현의 상이었던 공융이 씨의를 조롱하면서

'씨(氏)'자는 '민(民)'의 위쪽 부분이 없는 것이므로 네놈은 머리가 없구나, 차라리 성을 '시(是)'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1]

라고 하자 씨의는 진짜로 성을 갈아 시의가 되었다.[2]

이후에는 유요에게 의탁해 강동으로 전란을 피해 피신했으며, 손책의 군대에게 유요의 군대가 패하자 회계로 이주한다.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어 문필의 우수함을 이유로 시의를 초빙하자 시의는 손권이 있는 곳으로 도착해 신임을 받아 기밀사항을 전문적으로 처리해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여몽관우 토벌의 계획을 세울 때 시의에게 의견을 묻자 시의는 여몽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해 어서 그 의견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니 그는 관우 토벌에 종군해 충의교위로 승진한다. 시의가 사퇴의사를 밝히자 손권은 그의 사퇴를 막았다.

209년에 손권이 거기장군으로 임명될 때 서상, 호종과 함께 군사와 국가의 기밀사항을 처리했으며, 손권이 형주를 정벌하고 무창을 수도로 정했을 때 시의는 비장군으로 임명되면서 곧 도정후로 봉해졌다가 시중의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시의에게 병권을 주려고 했으나 시의는 자신에게는 장수의 재능이 없다면서 거부했으며, 221년 손권이 오왕이 되자 정후로 봉해졌다.

228년에 시의는 환현으로 가서 유소를 만나 조휴를 회유하게 해 조휴를 유인하자 크게 무찔러 편장군으로 승진하고 상서의 일을 담당해 각 관원을 총 관리했고, 송사 처리를 겸했다. 또 각 공자(公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황제의 대가를 동쪽으로 옮기면서 태자 손등을 무창에 남겨 지키도록 하면서 시의에게 태자를 보좌하도록 했는데, 태자는 시의를 존경해 어떤 일이 있으면 먼저 그에게 자문한 후에 시행했다. 나아가 시의를 도향후로 봉했으며, 이후에 시의는 태자를 수행해 건업으로 돌아와서 시중, 중집법으로 임명되어 모든 관리들의 일을 관리하고 이전과 같이 송사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 때 간신배 여일은 강하태수 조가가 국가의 정치를 비방했다고 무고하자 노망들린 손권은 노여워해 조가를 체포해 옥에 가두고 철저하게 심문했는데, 그 당시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여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일제히 조가가 비방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지만 시의 혼자만 들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의는 며칠 간 궁문을 받으면서 손권의 조서는 엄하게 바뀌었으며, 신하들은 시의 때문에 두려워해 숨을 죽였다. 이 때 시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칼과 톱이 이미 신의 목에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조가를 위해 사실을 숨겨 스스로 멸망을 취하여 충성하지 않는 귀신이 되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사람이 들어 아는 것에는 마땅히 본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에 근거해 질문에 대답하면서 말을 바꾸는 일이 없으니 손권은 결국 그를 풀어 주었고, 조가 역시 사면시켰다.

234년에 제갈량이 죽자 손권은 서쪽의 주에 마음을 두고 시의를 촉으로 보내 우호관계를 다지게 했는데, 이 결과가 손권의 마음에 들어 그는 상서복야로 임명되었다. 손화손패의 두 궁궐이 처음 세워졌을 때 시의는 본래의 직책 위에서 또 손패의 부상을 겸임했는데, 시의는 두 궁의 지위가 근사함을 꺼려 높낮이를 분명히 해야된다로 요약되는 내용의 상소를 세 개나 올렸으며, 항상 충성을 다하고 간언을 했다고 한다.

시의는 산업을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을 받지 않았으며, 집과 방은 그 자신을 받아들일 만큼의 크기로 만들었다. 그의 청렴함에 관해 일화가 있는데 한 번은 그의 이웃집에 큰 저택을 짓는 자가 있었는데, 손권은 궁궐에서 나와 멀리서 바라보더니 큰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묻자 주위의 사람들은 시의의 집 같다고 했으나 손권은 시의는 검소하니 반드시 그의 집이 아닐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물어본 결과 과연 다른 사람의 집이었다. 시의가 인정받고 신임받은 것이 이 정도.

시의는 질병으로 눕게 되자 미리 유언을 남겨 옻칠을 하지 않은 관을 사용하고 평상복으로 염을 해 절약에 힘쓰도록 했으며,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진수가 평하길 시의는 청렴하고 삼가고 곧고 소박했다고 한다.
  1. 氏와 是는 중국에서는 음과 성조가 같다.
  2. 여기에 주석으로 서중(徐衆 ; 혹은 서원徐爰이라고도 함)의 평이 있는데, 아니 부모와 조상이 내린 성을 바꾸라고 한 공융이나 시의나 둘 다 쓰레기 아닌 것이냐고 하였다. 근데 하작(何焯)이 서중의 말을 또 평하기를, 본래 氏와 是는 예전에 통자(通字 ; 서로 호환되는 글자)였다면서 서중이 고문(古文)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깠다고 역관광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