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반적인 의미
1.1 관련 문서
2 후한 말의 인물
오의 군권 1인자 | ||||||||||||||||||||
주유 | → | 노숙 | → | 여몽 | → | 육손 | → | 주연 | → | 제갈각 | → | 손준 | → | 손침 | → | 주적 | → | 정봉 | → | 육항 |
『오서』 「주유노숙여몽전(周瑜魯肅呂蒙傳)」 | ||
주유 | 노숙 | 여몽 |
呂蒙
(178 ~ 219)
후한 말의 인물. 손책, 손권 휘하의 무장. 자는 자명(子明). 여남군 부판현 사람.
강동에서 손꼽히는 지용겸비의 장수. 하지만 현대의 평가는 약간씩 갈린다. [1]
2.1 생애
2.1.1 오하아몽
어린 시절 남쪽으로 강을 건너 매부 등당에게 의지했다. 등당은 손책의 부하 장수가 되어 수차례 산적을 토벌했다. 여몽이 15~16세에 등당을 몰래 따라가 도적을 공격하니 여몽의 존재를 알아챈 등당은 꾸짖었으나 여몽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등당은 집에 돌아가서 여몽의 어머니에게 그것을 알렸다. 여몽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여몽을 벌주려고 했는데 여몽이 말한다.
가난하고 천한 것에는 머물 수 없고, 잘못을 벗겨내 공을 세우면 부귀가 오게 될 것입니다. 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습니까?
여몽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론한 것으로 여몽의 어머니는 애달프게 여겨 용서해주었다.
이때 등당의 관리가 여몽의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며 말했다.
저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기를 호랑이에게 먹여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날, 이 사람이 여몽과 만났는데 또 모욕을 주니 화난 여몽은 칼로 그를 죽이고 달아나 동향인 정장(鄭長)의 집으로 도망쳤다. 후에 교위 원웅에게 자수했는데 원웅이 여몽을 위해 변론해주었다. 이 사건을 들은 손책은 여몽을 불러 보고 그의 비범함을 기이하게 여겨 측근으로 삼았다.
몇 년 뒤에 등당이 죽자 장소의 천거로 여몽이 등당을 대신하게 하여 별부사마에 임명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고 그의 동생인 손권이 뒤를 이었다. 곧 손권은 군단의 통폐합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여몽은 외상까지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병사들에게 진홍색 옷과 행전을 구비해주고 열병식에 임했다. 손권은 여몽 군단의 훌륭함과 잘 훈련된 것에 기뻐해 여몽 군단의 병사를 늘리게 했다. 이후 단양을 토벌하는데 종군하여 가는 곳마다 공적을 세워 평북도위가 되었고 광덕현의 장(長)에 취임했다.
208년, 황조와의 전투에서 여몽은 선봉을 맡았는데, 황조가 수군을 이끌라고 출진시킨 도독 진취를 직접 목을 베었다. 장수와 병사들이 승세를 타고 그 성을 진공해 들어갔고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병사들이 추격해 사로잡았다. 손권은 이번 일의 승리는 여몽이 진취를 죽인 공적 덕분이라고 하며 여몽을 횡야중랑장으로 삼고 돈 천만을 내렸다.
이렇게 크고 적은 공을 많이 세웠으나 16살 때부터 싸움질 밖에 한 게 없는지라 학식이 부족하여 상소를 할 때 글이 아닌 말로 할 정도로 지식이 부족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과 장흠에게 그대들은 큰 임무로 새 임지로 떠나니 공부 좀 해서 견식을 넓히라고 말한다. 여몽은 '문관이나 공부하지 싸우는 무관인 내가 왜 공부함?'이라고 생각하여 부대의 일이 바빠 공부할 여유가 없다고 답한다. 손권은 특별히 박사까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과거의 것을 많이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는 너보다 바쁘지만 어렸을 때 주역 제외하고 다 읽어봤고 군주가 된 후에도 삼사와 병서를 정독해서 아는게 많음ㅋ"라며 자기 자랑질도 한다(...). 손권이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 립서비스도 해주고 옛 위인들의 독서 습관까지 알려주니 설득을 받은 여몽은 주위 사람들 중 누구도 여몽에게 학문으로 이길 수 없는 수준까지 공부에 힘썼다.
2.1.2 남군 공방전
적벽대전 이후 주유군과 유비군은 남군(강릉)에서 조조군의 조인을 포위했다. 이때 익주의 습숙이라고 하는 인물이 병사를 이끌고 투항해 왔다. 주유는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려고 했으나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만하다고 칭찬하고 오나라를 사모해 먼 나라에서 귀화해 온 것을 평가해 의리상 오히려 병사를 늘렸으면 늘렸지 빼앗으면 안된다고 했다. 손권은 이를 칭찬하며 습숙에게 병사를 돌려 주었다.
주유는 감녕에게 명령해 따로 이릉을 점거하게 했는데 조인이 군을 나눠 이릉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감녕은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한다. 모두 병사가 적어 군대를 둘로 나누어 구원하기엔 어렵다고 주장하나 여몽만은 주유와 정보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 감녕을 구원하여 포위를 푸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으니 당연히 가야합니다.
- 하지만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여도 본진의 방어는 해야하나 능통이 본진을 지킨다면 능히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해지니 3백의 군사를 또 나누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어버리면 적이 패주할 때 적의 군마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이릉으로 향해 그 날 전투로 적의 절반 이상을 죽이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도주하던 적은 땔나무에 막힌 길과 조우하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고 아군은 말 300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아군은 기세를 얻어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싸워 조인을 남군에서 퇴각하게 만들었다. 손권군이 남군을 점거하자 여몽은 편장군과 심양현령에 임명되었다.
2.1.3 괄목상대
주유가 죽고 노숙이 주유를 대신하게 되어 육구로 가던 길에 여몽의 군영 아래을 지나가게 되었다. 노숙은 평소 여몽을 얕보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여몽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니 만나보라고 하여 만나서 술을 마셨다. 노숙은 여몽과 이야기를 하다가 달라진 여몽의 식견에 '옛날 오나라에 있을 무렵의 어린 여몽이 아니다(非復吳下阿蒙)'라며 놀라워했고 여몽은 '선비와 헤어지고 3일이 지나면(士別三日) 곧 마땅히 눈을 비비고 상대해야 한다(卽當刮目相待)'라고 답했다. 이것이 고사성어의 유래로 오하아몽(吳下阿蒙)은 학식의 진보가 없음을 뜻하게 되고 괄목상대(刮目相待)는 크게 학식이 진보함을 뜻하게 되었다.
술에 취하자 여몽이 노숙에게 노숙이 인접하게 된 관우에 대해 이야기 한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고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상대하게 된 관우에 대한 대책을 묻는다. 노숙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답한다. 김대기? 여몽이 말했다.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이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노숙을 위해 3~5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그것을 경청한 노숙은 비밀로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 그의 발전한 식견에 감탄한 노숙은 여몽의 모친에게 절하고[2] 우의를 맺은 다음 헤어진다.
손권은 항상 학문에 힘쓴 무장으로서 여몽과 장흠을 예로 들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차피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향상해 가는 것이지만, 여몽, 장흠 정도로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몽만 기억되고 장흠은 잊혀졌다.
2.1.4 동오의 명장
여몽은 성당, 송정, 서고라고 하는 자들과 주둔지가 가까웠는데 이 세 사람이 죽고 그들의 자제가 유약해서 손권은 그들의 병사를 여몽의 군단에 편입하려고 했다. 여몽은 손권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서고 등이 모두 나랏일을 부지런히 애썼는데, 자제들이 어리다고 폐할 수 없다고 하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들어주었고 세 사람의 자제에게 스승을 붙여주었다.
조조는 여강의 사기(謝奇)를 기춘의 전농(典農)에 임명했고 환현(환성)의 들판에서 둔전을 행하려고 했다. 그 둔전병이 손권의 영토에서 수차례 약탈을 행하자 여몽은 그들에게 귀순을 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틈을 노려 습격했다. 적군은 사기가 떨어져 퇴각하니 그 부하인 손자재(孫子才), 송호(宋豪)는 노약자를 업고 여몽에게 가서 항복했다.
그 후 212년~213년 유수구 전투에서 조조와 손권이 장강을 끼고 싸우자 여몽은 수차례 뛰어난 계책을 내었다. 오록에 따르면 손권이 보루를 만들려고 하자 부장들이 말했다.
해안 위로 올라가 적을 공격하고 나서 물을 건너 배로 들어오면 되는데, 보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몽은 손권에게 강물 입구를 끼고 둑을 세우라고 권했다.
같은 병기에도 날카로운 것과 둔탁한 것이 있으며, 싸움에 있어서도 백 번 이기지는 못합니다. 만일 만에 하나 적의 보병과 기병이 육박하여 와서 물가까지 퇴각할 틈이 없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배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손권이 그렇다고 그것을 만드니 이 보루가 바로 유수오다. 방비가 철저하니 조조는 퇴각했다.
조조가 여강태수 주광을 보내 환성에 주둔하며 농지를 개간하고 첩차를 시켜 파양의 도적 무리를 회유하여 내통하게 하려고 했다. 여몽은 환성의 토지가 비옥해 몇 년 정도 지나면 군세도 증강되어 손을 쓰지 못할 것을 걱정해 지금 멸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손권은 이것을 받아들여 214년 5월에 환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진했다. 손권은 제장을 모아 계략을 묻자 여몽은 감녕을 승성독으로 추천해 감녕을 선봉으로 삼고 여몽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 공격한다고 하는 작전을 세웠다.
오서에 따르면 이 때 다른 제장들[3]에게서 공성을 위해 토산을 만들고 병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 신중론이 나왔다. 여몽은 그러면 시간이 흘러 적이 성의 방비를 갖추고 외부에서 원군이 올 것이라며 적이 준비가 부족할 때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것을 물리쳤다. 또한 빗물을 이용해 들어가도 만약 지체되어 시간이 지나면 물이 말라서 귀환하는 길에서 고생할 것이라고 보았다.
새벽에 진군하는데 여몽이 스스로 큰 북을 쳐 병졸들을 고무했고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도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솔선수범하니 사병들이 모두 펄펄 뛰었고 밥 먹을 때 쯤 적을 격파했다.
이때 조조의 원군으로 장료가 협석(夾石)까지 왔는데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퇴각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태수인 주광을 사로잡았고 수만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은 전과를 올렸다. 여몽은 이 공적에 의해 여강태수에 임명되었고 노획한 인마, 심양의 둔전민 6백 명과 관속 3백 명이 내려졌다.
여몽은 심양으로 돌아왔는데 1년 후에 여릉에서 반란이 발발했다. 여러 장수들이 공격했으나 누구도 토벌하지 못하자 손권이 말했다.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물수리 한 마리만 못하구나.
손권이 여몽에게 토벌을 명하자 반란을 진압한 여몽은 우두머리만을 주살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해방해 평민으로 돌아가게 했다.
2.1.5 익양대치
215년, 유장의 익주까지 얻은 유비가 손권의 형주 삼군 반납 요청을 거절하자 화가 난 손권은 여몽에게 선우단, 손규, 서충과 병사 2만 명을 주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빼앗으라고 명하며 여대, 손무(孫茂) 등 장수 10명도 추가적으로 더 보낸다. 여몽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세 군에 귀부하라고 편지를 보내니 장사와 계양은 냅따 항복한다(...). 단 영릉태수 학보만은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장사태수 요립은 도망치고 안성현, 유현, 영신현, 다릉현의 관리가 음산성으로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이들은 여대에게 즉시 격파되고 여대는 남아서 장사를 지킨다.
처음 여몽이 장사를 평정하고 마침 영릉으로 가는 길에 영현을 지나면서 학보의 옛 친구 등현지를 수레에 태워 주었는데 여몽은 그를 이용해 학보를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비가 공안까지 와서 관우를 지원할 움직임을 보이자 손권은 여몽에게 영릉을 포기하고 귀환하여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하고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손권에게 돌아오라는 메세지를 받자 일단 이것을 비밀로 하면서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일러주었다. 새벽이 되자 성을 공격하는데 여몽은 등현지에게 거짓말을 전하게 한다.
-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다.
- 관우는 번성에서는 손규에게 격파되고 남군에서 손권에게 발이 묶인 상태다.
- 내 정예병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우리 원군도 끊임없이 오고 있다.
- 성이 함락될 것은 빼박캔트이니 너의 노모 죽이기 싫으면 항복해라.
등현지가 이 거짓말을 학보에게 전하자 겁을 먹은 학보는 여몽에게 항복할 뜻을 전한다. 등현지가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자 여몽은 곧바로 네 장수에게 백 명의 병사를 주고 학보가 나오면 성문을 점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잠시 후 학보가 나오자, 여몽은 환영하며 그의 손을 잡고서는 그와 같이 배에서 내렸다. 말이 끝나자, 여몽은 지금 유비와 관우가 쳐들어오니 영릉의 학보는 내버려두고 빨리 되돌아와 익양에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손권의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선 손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학보는 그 편지를 보고 여몽이 전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자 부끄러워 땅 속에 숨고 싶어 했다. 여몽은 손교를 남겨 영릉을 맡기고 그날로 군대를 이끌고 익양으로 갔다.
관우와 노숙의 회담 이후 장로의 한중을 조조가 점령하면서 급박해진 유비와 손권은 결국 형주를 분할하고 화친을 맺게되었다. 유비가 동맹을 청하니 손권이 학보도 영릉과 함께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게 된다. 여몽은 이 공으로 심양과 양신을 봉읍으로 획득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학보 관련 일화는 아예 사라져서 그냥 관리를 보냈는데 관우에 의해 거부당하자 손권은 발만 동동구르다가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니 제갈량이 "저들이 합비를 공격하는 대신에 세 현을 주죠."라는 발언에 의해 넘겨진 것으로 변경되었다.
2.1.6 능력 위주의 인사 기용
같은 해인 215년 손권은 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여 2차 합비 공방전이 일어나게 되나 결과는 참패. 퇴각 때 장료 등에게 추격을 받았으나 여몽과 능통이 죽을 힘으로 막아냈다.
216~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유슈로 진출해 장료, 장패를 선봉으로서 손권군을 공격했다. 손권은 여몽을 독에 임명해 이전에 건설해둔 제방 유수오를 먼저 점거하고 그 위에 강노 1만 대를 배치해 대항했다. 조조군의 선봉 부대가 진채를 세우기도 전에 여몽이 이를 공격해 격파했고 조조는 퇴각했다. 여몽은 호위장군, 좌호군이 되었다.
감녕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아버지 능조의 원수를 갚겠다고 칼춤을 추는 능통과 그에 대항하여 쌍극무를 추는 감녕의 사이에서 칼과 방패를 들고 둘의 싸움을 말린 일도 있었다.
항상 부곡(部曲)에 대해서 강하태수 채유는 여몽의 잘못을 고자질했는데 여몽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후에 예장태수 고소가 죽자 손권이 후임으로 쓸 만한 자를 물었더니 여몽이 직무에 열심히라는 것을 이유로 채유를 추천했다. 그의 인성에 감탄한 손권은 웃으며 여몽을 기해(祁奚)에 비유하고서 채유를 등용한다.
감녕은 난폭하고 살생을 좋아해서 여몽의 신임을 잃고, 때때로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해서 손권이 분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몽은 번번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감녕같은 얻기 힘든 장수는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고 청하여 손권이 감녕을 후히 대하도록 했다.
2.1.7 번성 공방전
애초에 노숙은 조조가 살아있으니 촉과 오는 서로 도우며 원수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몽은 노숙과 다르게 촉에 대해 강경론적 입장으로 형주에서 땅을 나눠 접한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오를 공격할 것 같고 나라의 상류에 있어서 형세가 오래가기 어렵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여몽은 양주 북부와 서주를 둘러싸고 조조와 싸우고 있는 중인 손권에게 몰래 계책을 말한다.
정로장군(손교)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 장흠은 유격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면 됩니다.
손권은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였지만 얼마 후 여몽과 또 서주를 공격할 것을 의논했다(...). 얘기를 콧구멍으로 들었나 여몽은 조조는 원가를 격파해 북방에 있어서 동오를 신경쓸 겨를이 없고 서주가 수비병이 부족해 일단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합비를 넘어 서주로 진출해도 이 지역은 여러면에서 공격을 받기 쉬운 평지이며 기병의 땅이라 남쪽 병사에겐 익숙한 곳이 아니니 포기하고 차라리 유비의 형주를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여몽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4]
엄준전에 따르면 217년에 노숙이 죽자 처음에 후임 예정이었던 엄준이 사퇴해서 여몽은 노숙의 후임으로서 그의 뒤를 이어 육구에 주둔한다. 노숙의 군대 인마 1만여 명이 모두 여몽에게 속하게 되었고 한창태수가 되고 하준(下雋), 유양(劉陽), 한창(漢昌), 주릉(州陵)이 식읍으로 주어졌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 4현은 원래 주유의 봉읍으로, 주유가 죽은 후 노숙에게 속했고, 노숙이 죽은 후 여몽에게 속하게 된 것이다. 여몽은 처음으로 육구에 갔을 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만 관우와 우호를 맺는다.
오록에 따르면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많은 군사기물을 태우고 관우가 미방을 질책했던 적이 있었다. 미방은 내심 두려움을 품었다. 219년에 관우가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게 된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는데 동오를 경계하여 공안과 남군에 병사를 남겨 수비하도록 했다. 손권은 위나라로 사자를 보내 비밀 동맹을 맺는다.
관우전에 따르면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사인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후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관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마땅히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들을 꾀어내자 미방은 몰래 사람을 시켜 손권과 내통하고 있게된다.
여몽은 상소를 올려 관우가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자신의 뒤통수 치기를 경계하는 것이니 늘 병이 있는 자신이 병 치료를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그리하여 관우가 이를 들으면 수비병을 양양으로 철수시킬 것이라 예상했다. 손권은 여몽을 소환한다는 격문을 공개하고 몰래 같이 계획을 도모했다. 여몽의 계책에 속은 관우는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오범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과 함께 관우를 습격할 일을 미리 모의하고, 신임하는 가까운 신하들과 상의하였는데,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에 관해 오범에게 질문을 하였다. 오범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관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시의전에 따르면 여몽이 관우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손권은 시의에게 의견을 물었다. 시의는 여몽의 계획을 칭찬하고 손권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
전종전에 따르면 219년, 유비의 장수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자, 전종은 상소를 올려 관우를 토벌할 수 있는 계획을 진술했다. 손권은 당시 벌써 여몽과 관우를 습격할 일을 은밀히 의논하고 있었으므로 일이 누설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전종의 표를 받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육손전에 따르면 여몽은 병이라 칭하고 건업으로 돌아온다. 방문한 육손이 관우와 국경을 접하고서 걱정해야 하는데 왜 내려왔냐고 따지자 여몽은 육손의 말이 옳지만 자신의 병이 심해서 돌아왔다고 답한다. 육손은 갑자기 관우를 까댄다.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관우는 시작하자마자 큰 공을 세워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손은 여몽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하면 관우는 더욱 방비를 게을리 할 것이라고 계책을 낸다. 여몽이 답했다.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여몽이 손권에게 도착하자 손권이 누가 여몽 그대를 대신할 수 있냐고 묻자 여몽은 육손이 뛰어난 인재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 관우가 방심할 것이라며 육손을 추천한다. 손권은 곧 육손을 불러 편장군 우부독으로 임명하고 여몽을 대신하도록 했다. 육손이 육구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
조조는 우금, 방덕 등으로 하여금 번성의 조인을 구원하게 했으나 마침 내린 비 때문에 관우에게 패하여 방덕은 참수되고 우금은 항복했다. 관우는 3만에 이르는 우금의 포로 병사와 말 때문에 군량이 부족해져 손권군의 영역권 안에 있는 상관 지역의 곡식을 맘대로 강탈했다. 이를 듣고 명분이 생긴 손권은 마침내 형주 공격을 실행하기로 하고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손교전에 따르면 여몽이 남군을 습격하려고 할 때 손권은 손교를 여몽과 함께 좌우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몽이 강릉을 공격할 때 주유와 정보가 서로 좌우독으로 임명되어 생겼던 어려움을 생각해보라고 하자 손교는 후속 부대로 임명되어 종군하게 된다. 군의 전권을 맡은 여몽은 육손, 장흠과 함께 형주를 공격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이 때 여몽은 우번이 의술에도 두루 정통하다는 이유로서 우번도 자신을 따르도록 할 것을 요청했는데 사실 이걸 핑계로 좌천된 상태였던 우번을 풀어주려한 것이다.
여몽은 심양까지 왔을 때 관우가 설치한 관측소의 감시를 경계하여 장병들은 배 안에 숨기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모습을 하게 하고 노를 젓게 했다.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도착하자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관우 등은 여몽의 진군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서에 따르면 공안(公安)의 장군 사인이 막아 지키니 여몽이 우번에게 명하여 그를 설득하게 했다. 우번이 성문에 도착하고 수비병에게 "나는 너희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라고 했으나 사인이 서로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우번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 적이 공격하는데도 척후가 행해지지 않고 봉화가 오르지 않으니 분명 관우군 내부에서 내응이 있는 것이다.
- 여몽 장군이 곧 남군을 향해서 육로를 끊을테니 살아날 길이 모두 막히고 이곳의 지형은 달아나기 힘들다.
- 장군 그대는 죽도록 싸워봤자 일족이 멸해져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니 현명하게 항복하라.
서신을 읽어본 사인이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 우번이 여몽에게 이는 기만일 수도 있으니 사인을 데리고 가도록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하라고 말했다.
여몽은 우번의 말에 따라 사인을 데리고 남군으로 갔는데 남군태수 미방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몽이 사인을 그에게 보여주자 미방은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여몽은 아직 군의 성을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성 밖의 광장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우번이 여몽에게 말했다.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 뿐입니다. 성 안의 사람들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습니까?
진짜 성 내부에서 어떤 자가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여몽이 우번의 진언을 듣고 관악을 장악한 탓에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여몽이 점령지에서 관우군의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보호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약속했다. 심지어 자신과 동향인 휘하 병사가 관품인 갑옷을 덮기 위해 백성의 삿갓을 빼앗았는데 여몽은 군령을 어겼으니 동향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 엄격함에 군사들은 무서워서 길에서 흘린 것이라도 줍지 않았다.
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노인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쇄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오주전에 따르면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번성에서 서황에게 격파된 관우는 돌아오는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 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 받아가게 한다. 관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자기네 가정이 무탈하면서 옛날보다 더 대우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미방과 사인의 항복으로 근거지를 잃은 관우는 맥성에서 농성하는 처지에 이른다.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오범전에 따르면 관우는 맥성에 있으면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청하였다. 손권은 오범에게 질문했다.
그는 결국 본심으로 투항하려는 것이오?
오범이 말했다.
그에게는 달아나려는 징후가 있습니다. 투항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입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서쪽으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10여 명의 기병만이 관우를 따랐다. 여몽은 반장, 주연에게 그 지름길을 끊게 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오범전에 따르면 정찰하는 자가 돌아와 관우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오범이 말했다.
비록 떠났을지라도 모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손권이 관우를 체포하게 될 시간을 묻자, 오범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정오입니다.
손권은 해시계와 물시계를 장치하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정오가 되었는데도 관우가 붙잡혀 오지 않자, 손권이 그 까닭을 물었다. 오범이 이에 대답하였다.
시간은 아직 정오가 안되었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 휘장을 움직이자, 오범은 손을 치며 말했다.
관우가 붙잡혀 왔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밖에서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고 관우를 붙잡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반장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손권이 관우를 살려주어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대적하려고 했으나 좌우에서 반대하며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손권은 좌우의 말을 듣고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혀 이에 관우와 관평을 참수했다. 배송지는 여몽과 손권이 각각 위치해있던 임저에서 강릉까지 200~300리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며 이 일화의 사실성에 의문을 표했다. 그렇다면 현장 지휘자인 여몽의 결단으로 참수를 했다는 이야기(!)
의외로 관우의 후손 관중진의 족보에 따르면 관평의 아들 관월을 성을 문(門)씨로 개명시켜 보호해줬고, 서진에 의해 오가 멸망한 뒤 다시 관(關)씨로 관우 집안의 성이 복귀됐다고 한다. 족보의 특성상 조작일 수도 있지만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어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은 아니라고 단정내린 상태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태수로 삼고 잔릉후로 봉하였고, 1억 전과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공안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여몽은 질병으로 사양하였다. 손권이 웃으며 말했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은, 자명의 모책이었는데, 지금 대공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경사스러운 상이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즐겁지 못한 모양이란 말인가?
이에 여몽에게 크게 수여하고 여몽이 군영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악단이 눈부셨다. 손권은 여몽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금전을 하사했다.
2.1.8 죽음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와의 대결에서 이긴 다음 다음 연회 자리에서 관우의 귀신이 들려 손권에게 욕을 하다가 칠공분혈을 하면서 호러스러운 장면으로 최후를 맞지만 이는 당연히 허구다.
여몽은 공을 세우고도 봉작이 채 내려지기 전에 지병이 도졌다. 공안에 있던 손권은 여몽을 내전에 두고 여몽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내린다고 모집하였다. 여몽에게 침을 쓰면 손권이 아파했고, 여몽의 안색을 보고 싶어도 여몽이 불편할까봐 벽을 뚫어 들여다보았다. 관음증이 아니다. 여몽이 조금이라도 음식을 넘기면 기뻐하여 주위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하고, 그러지 못하면 탄식하며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병이 좀 낫자 손권은 그를 위해 사면령을 내리고 신하들은 하례를 올렸다. 하지만 다시 병이 심해져 손권이 직접 가서 살폈다. 주연전에 따르면 호위장군 여몽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권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병상에서 대답한다.
주연은 대담함과 지조에 있어서 남음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를 임용할 만합니다.
또한 손권은 도사들에게 명을 내려 성신 아래서 여몽을 위해 천명을 청하도록 했다.
부질없게도 219년 말, 여몽은 42세의 나이로 내전에서 죽어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몽은 죽기 전에 하사 받은 여러 금과 보물을 모두 관부의 창고에 넣어 자신이 죽는 날 모두 상부에 돌려주고 초상은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손권은 매우 애통해하며 그를 위해 먹는 반찬 수를 줄였고(...) 생색 갑 여몽의 유언을 듣고 더욱 비통해했다.
2.1.9 사후
여몽의 사후에는 어째서인지 장남이 아니라 여몽의 차남인 여패가 잔릉후를 계승했다. 그에게 식읍 3백여 호를 주고 전지 50경(頃)의 조부를 면제시켜 주었다. 여패가 죽자 직계가 잇지 않고 여패의 형이자 여몽의 장남인 여종(呂琮)이 후작을 이었다. 여종이 죽자 또 직계가 잇지 않고 여몽의 삼남인 여목(呂睦)이 후계를 이었다.
여몽은 죽기 전에 후임으로 주연을 추천했지만 사실상 형주에서의 전투에서 활약한 육손이 이후 오의 군사상 책임자가 되었다.
여몽전에 따르면 손권이 황제가 된 후 육손과 함께 주유, 노숙, 여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 주유 : 조조 이기고 형주 개척해서 가장 짱짱맨. 노숙도 데려와주고 한 사람이 만능되라고 바라지 않아서 좋았음.
- 노숙 : 처음 만난 날에 나 황제되라해서 좋았음. 조조에게 항복하는 거 반대하고 주유 불러오라한 것도 좋았음. 근데 유비한테 땅 빌려준 거 실망. 또 관우 이길 방법도 없었으면서 허세부린 것도 실망. 그래도 행정이나 군령이 엄격했음.
- 여몽 : 언변만 빼고 주유 다음임. 여몽이가 젊은 시절 무력만 높은 지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지력도 높아졌네? 우왕ㅋ굳ㅋ 관우 공격하라 한 건 노숙보다 나음.
- 육손 : 주유만한 인재 없었는데 육손이 드디어 주유를 이었음. 개이득.
782년, 당나라의 안진경이 뽑아 무성왕과 함께 배향한 역대 명장 64명에 뽑혔다.
1123년, 송나라에서 배향을 지낼 때 뽑은 역대 명장 72명 중에도 이름을 올렸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관우가 신으로 모셔지자 관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여몽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근대에 일본군이 중국 난징(건업) 인근을 점령했는데 삼국지연의의 관우를 매우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일본군 장교가 명하여 여몽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되고 완전히 폭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2 평가
2.2.1 긍정적 평가
손권이 주유나 노숙과 같은 급으로 두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몽의 이른 병사는 손오에게 있어선 참으로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여몽이 군권을 잡았을 때 손오에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번째 선택지는 촉과 함께 지속적인 북벌로 위를 흔들리게 해 1강 2약의 구도를 깨뜨려버리는 것, 두번째 선택지는 촉이 점거한 형주를 먹고 양번까지 노려 장강의 방어선을 굳건히 하는 것. 전자 노선이었던 전임 노숙과는 달리 여몽은 후자를 선택했다.
여몽은 일찌감치 손권이 죽어라 꼬라박던 합비 대신 형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했는데, 이는 장강 상류 지역인 형주 없이는 결과적으로 손오의 근거지인 양주를 방어할 수 없다는 전략적 식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여몽 말따라 설령 얻는다해도 8만 대군으로도 수비가 어려운 합비보단 남군을 비롯한 형주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이 이득이었다는 것. 결국 이를 바탕으로 이릉대전에서의 승리와 조위의 파상 공세를 막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타당한 대국적 시각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보면 여몽은 주유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천하이분지계를 완성시키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몽이 죽은 이후 손오는 적극적 진출을 꾀하기보단 이전같이 실익이 없는 합비전에 병력을 계속 꼬라박았고 여몽의 요절은 대국적인 전략의 불완전한 종결을 의미했다.#
2.2.2 부정적 평가
여몽의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축들도 꽤 있다. 촉, 오 양쪽에서 공동전선을 펼쳐서 위나라 자체의 국력을 갉아먹어 위와의 국력차를 최소화하는 방책도 생각해 볼 만했다. 후대 남조 왕조들이 합비를 소유하고 그 위로 진출한 적이 있다는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면에서 촉과의 명목 뿐인 동맹이라도 일단 공공의 적이 눈앞에 있는데 장강 방어선에 집착한 것이 과연 합리적이기만 했느냐는 점은 논쟁의 대상이 될 법도 하다. 또한 여몽은 단순히 형주를 먹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촉의 영안, 위의 양번까지 노리고 있었는데 형주의 관우조차 함부로 치지 못하여 기습을 가할 수 밖에 없던 전력으로 어떻게 이 둘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소유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일 수 밖에 없다. 결국 형주의 핵심인 양번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고, 그나마 형성된 장강의 방어선도 훗날 촉한이 멸망한 이후 익주와 양양을 통해 쳐들어온 진나라에게 가볍게 뚫리고 말았다.
오나라는 형주 점령 이후,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촉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유지하게 된다. 형주가 넘어갈 때, 유장과 그의 아들 유천도 오나라로 덩달아 넘어갔는데, 이 유천을 익주자사로 임명하는 한편, 사섭을 통해 옹개 등의 남중의 호족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남중에서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부추겨 놓고는 그 사이에 오와 촉이 동맹을 회복했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또 주태는 촉 땅인 한중태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여몽의 형주 진수와 관우의 죽음에 지속적인 촉을 향한 도발은 그나마 명목상이라도 동맹이었던 촉을 완전 적으로 돌려버렸고 아무리 촉이 신의 없게 굴었다고 해도 오는 그것을 대놓고 뒤통수로 갚았다. 거기에 촉과 싸우는 동시에 촉과의 대전 이후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위와도 결전을 펼쳐야 했다는 점에서 손오에게 엄청난 소모를 강요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위오촉의 1강 2약 체제가 고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2.3 미디어 믹스
- 여몽/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