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융

孔融
(153 ~ 208)

1 개요

후한 말의 관원. 삼국시대 초기의 인물. 자는 문거(文擧).

노국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는 공자의 20대손으로써 명망이 높았다. 더불어, 그의 작품은 전하여지지 않지만, 그는 몹시 뛰어난 문재를 지녔으며, 건안문학을 빛낸 건안칠자 중의 한 명이었다.조비와 <후한서>에 남겨진 평에 따르면 '논리를 전개하고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부족했지만, 그는 창의적이었고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유년기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4살 때였다. 형과 함께 배를 먹는데, 그가 언제나 작은 조각을 먹자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어린 사람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도성으로 가게되었는데, 그가 도성에서 만난 당시 청류파의 수장이자 하남윤[1]을 지낸 이응(李膺)과의 대화는 유명하다.

10여 세의 공융은 이응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다. 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
이응이 공융을 만나서 이렇게 물었다.
"고명하신 그대의 선군께서 일찍이 나의 가문의 조상과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李老君)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공융의 가문과 이군의 가문은은 대대로 서로 통하는 집안입니다."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기이한 동자라고 했다.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나중에 도착했다. 같이 앉아 있던 사람이 공융과 이응의 대화를 알렸더니, 진위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총명한 애가 커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답니다."
그러자 공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하셨겠습니다.”
당돌한 어린 공융의 말에 진위는 결국 꼬리를 내렸고, 이응은 크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명하고 장대하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공융은 13세때 아버지를 여의어 삼년상을 지냈는데,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덕분에 그는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똑바로 서지 못할 만큼 건강을 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융의 대단한 효심에 감탄했다. 유가적인 관념이 절대적이었던 당시에도 삼년상은 육체적으로 힘들어 후한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약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삼년상을 지내던 상주가 그 고행에 지쳐 죽어 줄초상이 나도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만큼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삼년상을 유가의 규율대로 철저하게 지내는 사람은 덕성을 갖춘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다. 더욱이 공융의 나이가 겨우 13세였기에 그가 지낸 삼년상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가 16세가 되는 169년에 공융의 형인 공포(孔褒)의 친구인 장검(張儉)[2]이 당대의 권력자였던 중상시 후람의 비리를 고발했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고 공포에게로 도망쳤는데, 당시 공포는 부재중이었고 공융이 집에 있었다. 이 사건은 곧 2차 당고의 금과도 연결되었던 엄청난 일이었는데, 장검은 공융이 어렸으므로 상황을 모르리라 생각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떠나려 했지만 공융은 이를 눈치채고 형 대신 장검을 숨겨주었다.

나중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자 장검은 도망쳤지만, 공융과 공포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체포될 적에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공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이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니 공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나아가 공융 형제의 어머니는 집안의 주인이자 연장자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지 두 아들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토록 서로가 책임을 지려고 다퉜기 때문에 결국 군국에서는 판결을 못 내려 끝내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왔고 공융은 살아남았다. 이와 같은 일화로 공융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2.2 관리 출사

사도(司徒) 양사가 추천하여 공융은 사도부의 속관으로 재직했는데, 관리들의 부정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산더미만큼 적발해냈다. 공융의 보고서를 받자 상서는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 결재해주지 않고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지만, 공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채 환관들의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하진이 하남윤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했을 때, 양사는 공융을 시켜 그에게 축하인사를 보냈지만, 공융은 하진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공융은 그 즉시 사도부로 돌아가 하진을 탄핵한 뒤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하남윤 시절 하진의 부하들은 이 일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자객을 고용해 공융을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하진은 사대부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공융을 포섭하려 했기에 공융은 무사할 수 있었다. 왕윤이 예주에서 황건적을 격파할 때 공융은 그를 따르는 부장으로써 종군했다.

이후 하진은 공융을 시어사로 천거했지만, 공융은 어사중승(시어사의 직속상관) 조사(趙舍)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뒷날 다시 사공부에 벽소되어 중군후에 임명되었다가 재직한 지 3일 만에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동탁이 집권했다. 공융은 황제를 폐위하려는 동탁에게 늘 바른 말로 반박하여 동탁의 심기를 건드렸기에 그는 의랑으로 좌천되었다. 이 즈음 황건적이 다시 일어나 여러 주에서 위세를 떨쳤었는데, 그 중에서도 청주의 북해국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자, 동탁은 공융을 북해상으로 삼아 그를 북해로 보냈다.

본디 공융은 약간의 군무를 맡은 경력이 있었으나, 그다지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부의 모든 관리들이 공융을 추천했으니, 동탁의 압력이 작용한 듯하다. 사실상 칼을 휘두르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보낸 셈이다.

2.3 북해상

북해에 도착한 공융은 북해상으로써 백성들을 수습하였고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한편에는 청주의 각 군현에 격문을 보내어 세력을 집결시켰고 방비를 굳게 했다. 덕분에 황건의 수령이었던 장요(張饒)는 식량을 약탈하지 못했고, 20만의 무리를 이끌고 기주로 돌아갔다. 이를 안 공융은 역습에 나서 황건적을 패주시키고 각 현을 수복했다. 또한 흩어져 있던 관리와 백성들이 점차 모이자 황건적으로 오인되었던 4만 명의 남녀 백성들을 중심으로 다시 성읍을 조성했다.

황건이 다시 침략해 왔을 때, 공융은 군사를 이끌고 나와 도창(都昌)에 주둔하다가 관해에게 포위되어 위기를 겪게 되었지만, 당시 평원의 상을 지내고 있던 유비의 구원으로 관해를 격파했다.

황건의 잔당을 모두 격파하고 성읍을 수복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들을 천거하여 유학자들을 세상에 진출시켰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지어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그 밖에도 한 가지라도 선행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대함으로 유가적 덕성의 회복을 장려했다.

죽으라고 보낸 곳에서 멋진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공융의 정치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면에 치중돼 있던 모양인지 왕수전에 의하면 호족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듯하다. 더하여 현실적인 감각이 빠졌다는 비판이 많았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그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비록 법치에 기반한 정치를 잘 펼치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실행되는 법은 없었으며, 단지 문제를 끌어다 망라하는 것에 능할 뿐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보좌해야 할 측근들을 임용함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 좌승조와 유의손이라는 인물들이 책모에 뛰어나 준재라는 평판이 있었지만, 공융은 이들의 명성이 높았기에 어쩔 수 없이 높은 자리에 앉혀만 뒀을 뿐, 절대로 이들을 중히 쓰지 않았고 그들의 진언도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대신 그저 빈말을 잘하고 별 재주가 없던 왕자법과 유공자라는 인물들을 총애하며 중용했다고 한다.

구주춘추의 기록들은 공융의 군사적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모로 비판을 하고 있다. 유주의 군사 수만 명이 북해를 공격하자[3] 청주 전역이 모두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공융은 기습공격을 통해 이들을 대파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모조리 배반한 뒤 본국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한, 그가 황건적 잔당과 재차 싸울 때, 공융은 승리를 과신했는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친히 지휘했지만, 황건군은 중군은 공융과 맞붙으어 견제하는 와중에 좌우익은 우회로 기동하여 강을 건너 공융의 본성을 함락시켰다. 공융은 그 해가 지나도록 성을 되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자 북해를 버리고 서주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다시 북해로 돌아갔고, 유비의 추대를 받아 영청주자사가 됐다(195년?)

당시 원소조조가 두각을 드러내지만, 공융은 이들과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좌승조는 공융에게 충고를 했는데, 원소와 조조가 강하니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붙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충고를 무시하며 공융은 좌승조를 죽여버렸고 이에 유의손은 공융을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공융은 원소와 조조를 장차 왕실을 뒤엎을 만한 가장 유력한 후보들로 생각했는데, 좌승조의 말을 시류와 권력에 영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대노하여 좌승조를 처형했으며, 유의손은 공융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구주춘추처럼 세세하게 좋지 않은 내용은 넣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일화를 소개하며 공융은 높은 뜻이 있고 왕실을 보좌하며 난세를 평정하려는 뜻을 가진 충신이었지만, 그의 기질이 너무 올곧았기에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했다고 그의 저서에서 공융을 평가했다.

범엽의 평이나 공융이 이전부터 좌승조 등을 싫어했다는 점, 원소조조에게 붙으라고 권유했던 점을 감안하면, 좌승조 등은 비록 냉철한 안목은 있었지만, 공융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산동을 귀부시키고 밖으로 요동과 맞붙어 군사적 이득을 얻고자 하였으며, 한 구석에 홀로 기초를 세워 (원소, 조조와)함께 하지 않았다'는 구주춘추의 기록을 생각하면, 공융은 청주를 평정한 뒤 요동의 공손도와 결전을 벌여 요동-청주를 아우르며 원소, 조조와는 독립된 세력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196년 1월에 서서히 세력을 넓혀 가던 원소의 세력권과 충돌하여 마침 전해를 격파하여 기세를 타던 원담을 맞아 전투를 하였다.

계절이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수 개월 교전한 끝에 공융은 거듭 패배하여 끝내는 불과 수백 명의 군사만 남은 채로 농성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성을 잃었다. 성이 점령당하는 날, 공융은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그의 바로 옆에까지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책을 읽으며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는 등 무척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평소에 정무를 내팽개친채 책이나 읽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이 구주춘추가 묘사하는 공융이다. 태도만 의연하게 허세를 부렸기에 망한 한심한 인물이라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후한서에서 묘사되는 그는 그렇게까지 한심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 별다른 방도가 없던 상황에서 보였던 공융의 초연함과 당대의 다른 군벌들과 달리 매사에 사소한 일로 공치삿거리를 만들지 않았던 것을 칭찬한다.

저렇게 초탈한 모습을 보인 것치고는 붙잡히지 않은채 탈출에 성공했으나, 정작 공융의 가족들은 모조리 원담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마침 이 무렵은 조조헌제를 막 옹립했을 때였고, 헌제 또한 자신을 충심으로 보필할 인재가 필요했기에 직접 조서를 내려 공융을 불렀다. 이에 공융은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2.4 조정의 야당

허도로 간 공융은 장작대장에 천거되었다가 다시 소부로 전임되었는데, 장작대장으로 재임하던 197년, 원소조조가 대장군 직을 두고 대립한 끝에 조조가 대장군의 자리를 내놓았을 때, 공융은 지절을 받아 업으로 가서 원소에게 대장군의 작위를 수여하는 칙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무렵 공융은 순욱과 설전을 벌였는데, 그들이 논한 주제는 원소군의 상장인 안량문추의 자질이었다. 순욱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장수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소평가를 한 반면, 공융은 안량과 문추에 대해 삼군을 이끌만한 장수라며 극찬했는데, 나중에 순욱의 안목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삼국지연의순욱의 의견을 반영했다.[4]

공융은 결코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며, 조조를 매우 비판적으로 대했는데, 조정에서 조회를 열 때마다 그는 늘 정론을 펼쳐 의견을 주도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연의에서도 그의 이런 면모를 반영했다. 대표적인 예는 양표를 문초하지 말고 낙향시키라는 그의 진언과, 장수의 투항을 진언하는 대목이나, 유비에게 패하여 사로잡혀 설득 당한채 돌아온 유대왕충 처형을 말리는 대목 등이다.

하지만 공융 역시 조정의 무력함에 대하여 꽤나 한탄했던 듯하다. 이를테면, 유표가 조정에 보내는 공물을 끊고 복식이나 가마를 천자와 똑같이 하며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등 은근히 제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드러냈을 때, 헌제가 조서를 내려 유표를 책망하려 하자, 공융은 유표는 백번 죽여도 시원찮을 역적이지만 어차피 유표가 황제 행세를 해도 조정에서는 그를 징벌할 역량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를 굳이 비난해 봤자 대중의 비웃음만 사 황제의 위엄을 잃을 테니 유표의 전횡을 모르는 척 덮어두는 것이 낫다는 상소를 올렸다. 더불어 헌제가 어려서 죽은 자신의 아들들인 남양왕 유풍과 동해왕 유지를 위해 매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자, 공융은 겨우 한 살짜리 젖먹이가 죽은 것 때문에 그런 호들갑을 떨면 도리에도 어긋날 뿐더러 그런 전례는 없다는 상소를 올려 헌제를 만류했다.

뒷날 원소가 죽고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즉 거짓임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는 정도를 넘어서 역사와 고전도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까댄것을 알았다.

이후 하북을 평정한 조조가 오환 원정을 계획하자, 나서는 김에 옛날 숙신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정령족이 소무의 소와 양을 훔친 것까지 다스리지 않겠느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 말인즉, 내부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밖으로 돌테면 나서는 김에 아예 옛날옛날부터 있던 온갖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처리하고 오라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조조가 정벌하지도 못할 곳까지 생각없이 함부로 나서대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비웃는 말장난이기도 하다.

또한 오환 원정 당시 군량이 모자랐기에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리며 조조와 논쟁하기도 했다. 식량난은 곧 자신의 치세가 그만큼 좋지 못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조조는 "옛 암군들이 술에 빠져서 나라 망쳤다"는 구실을 댔다. 공융은 "여색때문에 나라 망친 일도 적지 않으니 여자도 금합시다."라며 허를 찔렀다. 물론 공융이 반대한 이유는 극히 사적인 이유도 포함되었으며, 그것은 곧 자신이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일화는 세설신어에서도 언급되는데, 공융이 제례를 지내기 위해서 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공융의 인기가 높아졌으며, 세설신어에서는 조조가 공융을 죽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공융의 금주령 반대에 대해서는 여론이 좋았던 듯 하다.그야 그렇겠지

중국의 근대 학자인 노신은 이에 대해 "그때 내린 조조의 금주령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가라는 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조조는 그때 '현실'을 책임진 조정의 경세가였으므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융은 야의 방관자 입장이었으므로 자기 멋대로 함부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2.5 최후

208년 8월, 조조는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라는 인물을 높은 관직에 임명했고 치려 또한 조조에게 영합되기 위해 관직을 이용해 공융의 죄를 날조해 고발했다. 공융이 파직되자, 실질적인 배후에 있던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치려와 공융 사이를 중재해주는 척 하며 회유에 나섰지만, 공융이 고분고분하게 따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른 일로 트집을 잡아 공융의 목을 날리고 삼족을 멸해버렸다. 이 때의 죄목이 가관인데 공자의 후손에게 불효죄(...)의 죄목을 내린 것이다.

공융이 죽기 10개월 전에 원상이 죽었고, 전 달에는 유표가 죽었으며, 조조는 막 삼공을 폐지하고 승상에 오른 시점이었다. 양대 주적이 모두 박살났으니 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공융은 효(孝)라는 개념을 타산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정작 공융이 효자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데, 이와 같은 그의 효의 해석은 당시 유가적 미덕으로 칭송받던 청렴이나 효행이 본질은 없어진 채 오로지 과시적인 허례로 악용되던 사회상을 비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 말 영제의 철권과 극심한 정치적 부패에 대한 반발은 유가적인 미덕인 청렴함과 효행을 극단적으로 과시하는 원리주의적 풍조로 이어졌는데, 이는 효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당연한 고마움의 감정이 아닌 단순히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런 분위기에서 몇몇 인간들은 일부러 자기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통해 명성을 얻는 등, 효를 정치적 출세에 악용했다.

그러한 고행을 실행한 당시의 인물로 원소가 대표적이다. 원소는 6년상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원소의 출생배경을 생각했을때 정작 그 대상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양부와 아예 혈연관계가 없는 계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3년상 자체만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로 어렵고 힙들었는데, 원리주의적 풍조가 강했던 만큼 복상 과정에서 보인 사소한 흠결이 곧바로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질 만큼 당시의 정계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런 시국의 형편에 양부와 계모를 위해 6년을 연이어 복상한다면 누구라도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원소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6년동안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기에 누구라도 그가 효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명성을 얻어 출세한 원소는, 그러나 정작 친어머니와 친누이를 비롯한 낙양의 원씨 일족들이 동탁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몰살당할때 이를 관망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친족 60명이 몰살당한 사건을 정치적인 명분으로 이용하는 등 피도 눈물도 없는 행보를 보였다. 이렇듯 변질된 효의 개념을 증빙하는 인물은 원소다.

원소처럼 극단적인 예는 아니더라도 이런 위선적 행동양상은 후한 사대부 전체에 만연했던 풍조인 만큼 조조 진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시대인 위진시대까지도 이런 기풍이 이어졌다. 본질을 살펴보면 공융은 과격한 언사를 통해 변질된 효를 실천한 인사들의 위선성을 비판한 것이다.[5] 다만 공융을 죽이려고 벼르던 조조는 한이 충과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이념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는데, 공융은 효에 대한 개념을 단순히 타산적으로 해석했으니 국가이념을 뒤흔드는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며 처형한 것이다.

연의에서는 공융이 예형을 조조에게 추천했다가 예형이 조조의 안전에서 막말을 내뱉자 화가 난 조조가 예형을 죽일까봐 조조를 말리기도 한다. 더불어 여포가 죽은 뒤 한동안 조조에게 진언을 하며 순욱과 조금 대립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후로 비중이 다시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는 아들이 둘(후한서에서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 형은 6살, 동생은 5살이었는데, 세설신어에는 낮에 공융이 잘 때 동생이 술을 훔쳐 먹었더니 이를 본 형이 어찌하여 배례를 않느냐고 묻자, 동생은 훔쳐 마시는데 무슨 예를 행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으며, 언어라는 책에 종회 형제와 관련해 비슷한 고사가 실려있어 이 고사가 와전된 내용으로 추측된다.

아버지인 공융이 죽임을 당할 당시에 형은 9살, 동생은 8살로 두 사람은 바둑[6]을 두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도망가라고 급히 알려주니 둥지가 깨졌는데 그 안의 알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더니 두던 바둑을 계속 뒀다고 한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마치 다 큰 어른처럼 느낄 텐데, 사실 어린아이들이었다. 큰 애가 아홉 살이고 작은 애가 여덟 살(후한서에서는 딸이 일곱 살)로 이거야말로 부전자전이리라.

세설신어에서는 저 일화가 못치기놀이로 나온 것 말고도 조비가 원희의 처를 받아들인 뒤에 조조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대접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의 아들과 딸이 연약한 어린아이였므로 그들의 목숨을 보전시켜 다른 사람의 집에 기거하게 했는데, 그 집의 주인이 고깃국을 보내주어 아들이 그것을 마시자 딸이 오늘 같은 화를 당했는데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냐면서 무슨 믿는 구석이 있다고 고깃국 맛을 알겠어요?"라고 질의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그 말을 알리자 그들은 체포되어 여동생이 오빠에게 "만약 죽어서도 지각이 있어서 부모님을 뵐 수 있다면 어찌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어요?"라고 말한 뒤에 당당히 목을 길게 내밀었다고 한다.

공융은 권세를 잃고 실각한 뒤부터 처형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집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날마다 빈객이 그의 문하에 가득했다고 한다. 공융 자신은 인재를 아끼고 선비를 좋아해 늘 부족한 듯이 여겼는데, 그러면서도 매번 좌중에 상객이 늘 가득하고 술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라 탄식했다고 한다.

3 평가

공융에 대한 사가들의 평가는 양극으로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공융의 전기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최염전의 말미에 부록으로 공융의 행적을 매우 간략하게 언급하며 오만하게 굴다가 죽었다고 적었다. 더불어 사마표는 구주춘추에서 공융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특히 청주에서의 공융의 행적을 두고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하는데, 대체로 말만 앞섰지 제대로 실행되는 게 없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고, 재주는 얕은데 이상만 가득한 인물로 표현한다.

후한서를 지은 범엽은 공융을 순욱, 정태와 더불어 후한의 마지막 충신으로 평가해 세 사람을 같은 열전에 묶었다. 공융에 내린 범엽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공융은 다른 사람의 선행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부연해서 완성시켰다. 상대의 면전에서 단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했으나 뒤에서는 그 장점을 칭찬했다. 현명한 선비를 좋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발탁하여 명예를 얻게 했다. 선한 사람을 알고 있으면서 추천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잘못과 같이 여겼다.'

(중략) 마찬가지로 공문거의 높은 뜻과 외곬적인 행동은 사람들의 정의감을 불러일으켜 효웅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조조도 살아있는 동안에 한의 천하를 빼앗지 못하고 아들의 대에 한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본디 곧은 성품의 사람은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숙명으로, 원만하게 다스려지도록 허리를 구부려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공문거는 순수한 백옥과 같아 준열(峻烈)함의 표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범엽 또한 공융이 청주에서 할거할 당시의 행적을 모르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사마표처럼 세세하게 따지지는 않은체, 공융의 성품이 너무 올곧다 보니 시야가 좁았다고 그의 장점을 높이 사는 동시에 그의 단점을 지적하였다.

당대 사가들 평가부터 이렇다보니 후대의 평가도 극단적이다. 같은 행적을 두고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죽을만해서 죽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입만 산 인물이라 폄하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후한의 키케로,실제 정치력도 쩔어서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 했던 키케로와 입 터는 게 짜증나서 죽인 공융을 비교하는 건 좀 심한데 시대의 마지막 양심으로 평가하는 등 평이 심하게 갈라진다.

다만 당시 혼란스러운 곳이였던 청주에 좌천성으로 부임해서는 황건적을 몰아내고 통령체계를 회복했다는 자체를 감안하면 그는 절대로 가볍게 생각될 인물이 아니다. 그는 권력자들과 상성이 극단적으로 나빴는데, 십상시하진동탁원소조조로 이어지는 당대 최대의 권력자 계보에서 공융이 비판하지 않은 인물은 없다. 다만, 원소와 공융의 관계는 직접적인 기록이 많지 않고 오히려 관도대전 무렵 공융은 그에 대한 비관론을 펼쳤기에 친원소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공융이 원소를 최대의 역적이라 여긴 것은 후한서에서 확인되고, 원소도 조조에게 공융을 죽이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조는 여론을 의식해 거절하였다.

처형하기 직전 임종시(臨終詩)를 지어 죽는 순간까지 조조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그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로써 세상을 교화한다는 유가적 이념을 끝까지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조가 불효죄로 삼족을 멸했기에 건안칠자의 1명으로 꼽히면서도 다른 6명과 달리 전혀 언급되지 않는 등 조조의 시대에 거론되는 대상은 아니었으나, 조비가 공융의 시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7] 그는 조조가 죽은 뒤에 공융의 시문을 모은 공북해집을 출간했다. 하지만 조조 시대를 거치며 공융의 글이 많이 사라진 탓에 조비는 남아있는 공융의 글을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황금과 비단을 내리며 포상했다고 한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 13

흔히 삼국지 관련 작품에서는 공자의 자손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꼬장꼬장하고 깐깐한 정통 유학자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당대나 현대의 평가로는 공융은 유학자로서는 이단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불효죄'라는 명분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공융의 학설 가운데 이런 이단적인 부분이 꼬투리를 잡혔기 때문이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군웅할거 등의 시나리오에서 북해를 차지하는 군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능력치가 전투적인 측면에서 약한 편이고, 부하도 없어 난관이 많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상당히 능력치가 좋은 무장인 태사자가 부하인 일이 많지만, 주변에 워낙 강성한 군주들이 많아서 헤쳐나가기 어렵다. 그리고 무안국이 고정 부하로 있지만 썩 좋은 무장이 아니다.

엄백호한복 등 하드코어 진영에 밀리지만, 이쪽도 사실 하드코어 플레이를 펴야한다. 삼국지 11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태사자가 부하장수로 있지만, 주변에 도겸, 여포, 원소, 장각 등 수많은 적들이, 그것도 공융보단 센 존재들이 매의 눈으로 북해를 바라보니, 그냥 했다간 얼마 못 가서 쓸린다.

삼국지 2에선 지력 82, 무력 35, 매력 87로 능력치는 눈물나는 무력 빼곤 그럭저럭 괜찮게 나왔다. 근데 문제는 바로 옆이 그 조조. 거의 100% 조조에게 개털린다. 거기다 콘솔판은 방랑시스템이 없어서 100% 끔살당한다.

삼국지 3에서는 더 답이 없다. 공융 본인의 능력치는 육지 67/수지 63/무력 58/지력 83/정치력 76/매력 64로 B급 군사 정도는 되는 편이지만, 부하라고는 무안국[8]뿐이고 재야도 북해의 인구도 적기 때문에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거기다 조조랑 떨어졌어도, 바로 옆이 문추, 안량, 장합을 가진 사기 군주긴 한데 부하가 너무 많아서 굶주리는 원소라는 게 문제. 거의 100% 원소에게 망한다.[9] 이래저래 삼국지 3은 공융과 원소의 악연(?)이 시작된 첫 작품. 다만 그나마 다행인 건 바로 아래의 도겸군이 먹고 있는 하비태수 차주의 충성도가 70이라서 운 좋으면 등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무력 37/지력 89/정치력 75/매력 72로 무력을 제외하곤 나쁘지 않지만, 무력이 바닥이라 전장에서 쓰기가 힘들고 진형, 특기들도 사실 좋은 편이 아니다. 시나리오2에서는 수하에 무안국밖에 없으며, 시나리오3에선 아예 본인 혼자뿐. 재야인 태사자, 예형이 북해로 굴러들어오기만을 바랄 뿐. 예형 같은 경우 재수가 좋으면 아예 시작하자마자 부하로 삼아달라고 찾아오기도 하며 상성이 잘 맞아서 일단 북해로 오기만 하면 등용하기 쉬운 편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3/무력 7/지력 69/정치력 64. 병법도 매도 하나 있다. 공융이 실전에서 활약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당대의 명사 였는데 지력은 물론이고 정치도 60대라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지경. 일러스트도 안습하기 그지 없다. 영웅집결 기준으로 부하장수에 왕수와 무안국이 있는데 이걸로는 당연히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영웅집결에서도 청주 출신 인재들이 재야로 있으니 세이브 - 로드 신공으로 등용해서 전력을 채우도록 하자. 북해 지역에 등윤, 즉묵 지역에 동명이인 왕기 2명, 별로 좋은 장수는 아니지만 임치 지역에 오질 등.
이렇게 장수를 빨리 등용하고 세력을 키워 주변의 도겸이나 장각, 원술 등을 무너뜨리고 확장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면, 서주를 사이에 두고 있는 조조의 확장도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갈수록 희망이 없어진다.

삼국지 10의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딱 1년 지나고 컴퓨터들이 정복을 시작할 때 십중팔구 2월 이내에 멸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삼국지 10에서는 왠지 모르지만 '유비를 칠 것을 요청하다 처형' 당했다고 나온다. 거기다 능력치는 눈물이 날 지경. 통솔력 30/무력 11/지력 74/정치력 78/매력 60의 문관형 능력치에 특기가 6개인데, 문제는 내정 쪽으론 보수, 치안 등 본인의 능력치랑 전혀 무관한 특기를 가지고 있고, 군주임에도 통솔력이 30인지라 여러 모로 거지같다. 명사 특기와 반박, 반론 특기가 있어 길거리에서 산적 정도는 발라 줄 수 있어 위안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0/무력 5/지력 72/정치력 75/매력 65이며 군주로서는 전형적인 약체군주. 하지만 영웅집결의 경우에는 태사자, 태사향, 무안국, 왕수가 휘하에 있고 재야장수로 창장이 있는 왕기둔전이 있는 국연이 있어 문, 무의 균형이 잡혀 있다. 재야에 내정셔틀 등윤오질도 숨어 있어서 초반 장수 걱정은 확실히 덜하다. 그러나 여포가 비교적 초기부터 정면으로 러시를 오는 편이며, 반대편의 원소 또한 평원 점령 이후 북해의 양 항구나 내정건물을 건드리러 오니 매우 귀찮다. 장각도 임제항 또는 직결 육로로 러시를 오는데, 황건의 특성상 통솔병력이 워낙 많아 주의를 요한다. 전체적으로 별 5개에 비해서는 특급 기준으로도 할 만한 군주.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북해 옆 도시인 평원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부하로 무안국과 왕수 이외에도 국연, 최염, 최림, 허유, 허정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에서는 태사자가 손책의 부하로 있고 옆 도시인 업에 그 등애가 있기 때문에 영웅집결보다 더 어렵다. 다행히 평원에는 장각과 주령 등 재야가 많이 있는 편이므로 빨리 등용하도록 하자.

삼국지 12에서는 태사자가 엄청나게 세서 원소에게 빨리는 안 털린다. 빨리는.... 황건동란, 군웅할거는 그런 것 없다. 전법은 방어약화. 수성전이라면 방어약화 쓴 뒤 태사자가 강용 키고 때리면 어지간해서는 다 막는다. 공격 나가는 게 문제지....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0/무력 5/지력 73/정치력 75.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북해 바로 옆에 제북 하나만 가지고 있는 조조만 먹으면 다음부터 쉬워진다. 물론 말이야 쉽지, 아무리 땅이 1개라도 능력과 인재면에서 공융을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조조라 어렵다. 전작과 다른점은 조조를 등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 조조를 혐오하는 마씨 일가도 조조의 편에 들어오는 모습이 나오는 게 삼국지 13이다. 조조 세력을 먹은 후에 원소랑 동맹 맺고 유비랑 여포를 차례대로 멸망시키면 중원을 장악하게 된다. 그 이후는 유비와 조조, 여포 할 때와 동일하게 원소보다 만만한 손책을 먹으면 된다.

관도대전 이후엔 조조의 부하로 나온다.

영웅집결에서는 역시 태사자 하나만 믿어야 하는데, 주변에 평원과 낭사가 비어 있고, 제북의 포신은 장수가 우금뿐이라 태사자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으므로 이 네 도시를 먹고 물량빨로 버텨야 한다.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북해 전투에서 등장하며, 레벨 8의 단병으로 나온다. 연의의 내용을 반영했는지 지력이 83으로 준수한 수준이며, 나머지 능력치는 무력 58, 통솔력 67. 성 안에 계속 짱박혀 있다가 일정 시점 이후에 성문을 열고 도우러 오는데, 큰 도움은 안 된다.애시당초 해당 전투의 난이도가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움 없이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다. 전투가 끝난 이후에는 사례금으로 금 500을 주며, 이후에는 등장이 없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잼아저씨로 등장하는데 뱅글이 안경을 쓰고 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송문거(宋文擧), 공수(孔秀) 등으로 나오는데, 송문거는 호뢰관에서 앞에서 동탁을 죽이는 것이 녹의랑 같은 벼슬아치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면서 반동탁연합에 참가하는 유비 일행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나온다. 공수는 조조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보낸 편지에서 여태까지 조조가 없앤 적들을 언급하는데, 낙양에서 공수를 생포했다는 언급으로 나온다.

화봉요원에선 은근 음흉하게 나온다. 서주를 구원하러 갔다가 유비만 서주를 얻자 자기 몫이 없었다고 아쉬워하거나, 나중에 태사자에게 여차하면 유비를 제거하라고 한다.

영화 적벽대전 1편에서는 헌제를 반협박하며 유비를 죽이겠다고 출정하는 조조를 욕하다 초반부에 헌제가 보는 앞에서 뎅겅하고 목이 잘린다.
  1. 속한서에는 하남윤이지만 세설신어에는 사례교위다.
  2. 강하팔준 중 한 명이다.
  3. 산동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공손도와 대립한 것으로 보인다.
  4. 연의를 보면 저수의 입을 빌려 안량과 문추를 보낸 원소의 안목을 까는데 실제 정사로는 그렇게까진 아니고 '안량의 성품이 급하고 좁아, 비록 용맹하다 하더라도 혼자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만 했다.
  5. 어찌보면 가히 예수의 성전 정화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다.
  6. 위씨춘추에서는 바둑, 세설신어에는 못치기놀이로 나오며, 위씨춘추에는 공융이 손권의 사자를 모욕해 기시형을 겪은 것으로 나온다.
  7. 공융의 글을 볼 때마다 늘 양웅, 반고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8. 초기작이라 그런지 능력치도 매우 구리다. 게다가 시나리오 2에서는 얘마저도 없는 데다가 재야도 없다.
  9. 원소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초반 적자를 메워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쳐내야 하는데, 그 중에 제일 만만한 게 공손찬, 공융이기 때문에 원소의 공융 침공은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