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현
- 젊은 처자를 높이는 말. 한자로는 음차해서 阿氏로 표기한다.
아 씨X의 자체검열
2 드라마
1970년 3월 2일부터 1971년 1월 9일까지 동양방송에서 일일극으로 방송되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였던 드라마. 이미자가 부른 드라마의 주제곡도 유명해서 1970년에 음반이 발매되기도 하였다.[1] 해당 드라마는 같은 해에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1997년 10월 11일부터 1998년 3월 29일까지 KBS 2TV에서 주말극으로 리메이크되어 방영되였다. 38회까지는 9시, 39~50회는 8시에 방영. 97년 11월 15일은 11~12회 연속으로 방영되었다.[2] 참고로 아씨 리메이크작은 원래 KBS 1TV 인기 아침 TV 소설 초원의 빛 후속으로 기획되었지만 주말드라마로 편성이 바뀌는 바람에 296회(원작)를 주말드라마 성격에 맞게 50회로 축소시켰다.
<아씨> 리메이크작의 캐스팅은 난항을 많이 겪었다. 일단, 주인공인 아씨 역은 당초 김혜수, 심은하, 이영애 등에게 제안이 갔지만 모두 개인사정으로 고사하자[3] (결국, 김혜수가 장희빈 역으로 발탁되었다.) 김혜선이 아씨 역으로 확정됐으나 노역까지 하는 역할에 대한 부담감 탓인지 캐스팅 제안을 뿌리쳤으며 사족으로 수만의 아내 미순 역으로 나온 장서희도 KBS 2TV 장희빈의 장희빈 역으로 거론이 되었는데 그녀는 장희빈 대신 인어 아가씨를 선택하였다.
이와 함께, 아씨의 못된 남편 긍재 역에는 물망에 올랐던 이재룡 손창민 등이 모두 능력 부족을 이유로 고사하였고 최재성이 긍재 역으로 최종 확정되는 듯 했지만 아씨 소작인의 아들인 수만 역으로 거론됐던 허준호[4] 대신 수만 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아씨>의 담당 PD 김재현씨는 새 인물들을 찾는 것에 초점을 두어 캐스팅을 진행하여 이응경이 아씨 역으로, 선우재덕이 긍재 역으로 발탁되었으며 수만 역으로 낙점된 최재성은 1990년 KBS 사태 이후 한동안 타 방송사 드라마에 출연해 오다가 <아씨>로 KBS 복귀를 했다.
1997년 10월 11일 첫 회부터 38회(1998년 2월 15일)까지 9시 주말극으로 방영된 아씨는 좋은걸 어떡해[5]가 그랬던 것처럼 끝이 좋지 않았는데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에는 25%대의 높은 시청률로 인기몰이를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여성단체로부터 "시대에 맞지 않는 인고의 여인상만 강조한다"는 항의를 받자(신문에 헤드라인으로 실릴 정도였다.) 방송국측에서는 "주말극이 너무 많다",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명분 아래 제작진측에 당초 50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를 34회로 조기종영하거나 드라마 자체는 시청률이 높으니 4편 늘린 38회까지 9시 주말극으로 방송하다가 그 이후에는 시간대를 옮겨 계속 방영하는[6] 두가지 안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업무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즉, 조기종영과 시간대 변경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아씨>는 39회(98년 2월 21일)부터 <웨딩드레스> 후속으로 바뀌어서 방영되었는데[7] 당시 5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던 그대 그리고 나에 대적하기 위해 <아씨> 제작진은 너무 일찍 늙어버린 아씨(이응경 분)와 그 주변 인물들의 로맨스와 질투, 삼각관계란 선택을 했다. 초반에는 갑자기 과도한 분위기의 변화로 전보다[8] 16%대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지만 시청자들로부터 "2TV의 공영성 강화에 가장 적절한 드라마다" "IMF 시대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1998년 3월 초부터 20%대로 시청률이 상승했다. 이에 <아씨>는 후속작 캐스팅 문제로 어러움을 겪어 연장방송을 결정했던 <그대 그리고 나>와 종영시기를 똑같이 맞추기 위해 애초 기획된 50부작에서 8편 늘린 58회로 끝낼 계획이었으나 KBS 측에서 "시청률이 오르는 시점에서의 연장방영은 자칫 시청자들에게 시청률 상승에 따른 연장이란 오해를 살 수 있는 등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라 판단하여 처음 기획(50회)된 대로 막을 내렸다.
게다가, 옮기기 전 25%대를 유지하던 것이 시간대를 변경하면서 억지스런 설정들이 드러나며 16%대로 떨어졌다가 시청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98년 3월 초부터 20%대로 올라간 '시청률 널뛰기' 현상이 담당 연출자한테 있다고 해서 <아씨>의 담당 PD 김재현씨는 드라마가 종영된 직후 98년 4월 드라마국 제작위원에서 심의평가실 심의위원으로 발령이 났다.[9]- ↑ 아울러, 리메이크작에도 이 곡이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는데 같은 방송사 월화사극 장녹수 주제가를 부른 전미경이 불렀다.
- ↑ 97년 11월 15일 11회, 다음 날(16일) 12회 예정이었으나 97년 11월 16일 오후 9시 40분부터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위 결정전 '이란 VS 일본' 중계가 편성되어 그 날 10시 10분 방송 예정이었던 '추적 60분'이 8시 40분, 'KBS 2TV 스포츠뉴스'가 8시 55분에서 8시 35분으로 이동하면서 전날인 97년 11월 15일에 11~12회 연속 방영되었다. 97년 11월 16일은 결방.
- ↑ 공교롭게도 이 여배우들은 모두 KBS 2TV 장희빈 캐스팅 제안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김혜수를 제외한 모두가 능력 부족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 ↑ 허준호는 97년 9월 28일 올린 결혼식 스케줄과 드라마 촬영일이 겹쳐 해당 배역을 고사하였다.
- ↑ 당초 드라마의 기획의도는 '재혼녀와 초혼남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 참 사랑의 모습을 그린다.'로 보도되었지만 새 남편이 전남편의 친구인 데 이어 재혼녀가 뒤늦게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하는 막장 드라마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드라마 구성상 당초 말하고자 했던 ‘참 사랑’ 부분이 덜 그려졌다"는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이 쏟아졌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 자체는 시청률이 30%를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방송사에서는 2000년 10월에 종영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을 높은 시청률과 후속작인 '우리가 남인가요'의 캐스팅 난항으로 두 차례나 연장하였고 또다시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을 샀다. 결국 막판에는 20%대로 시청률이 떨어졌고 급기야 경쟁작인 온달왕자들에 시청률이 역전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종영되었다. 온달왕자들의 작가인 임성한(본명 임영란) 은 온달왕자들의 전작인 보고 또 보고가 일일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인 최고시청률 57.3%를 기록하고 인어 아가씨의 성공으로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르게 되었다.
- ↑ 아씨의 앞시간대 연속극이자 좋은걸 어떡해의 집필자인 최윤정 작가의 전작 웨딩드레스가 15%대의 저조한 시청률에 머무르다 22회(98년 2월 15일) 만에 조기종영당한 상태였다. 참고로 <웨딩드레스>는 정말 여러모로 운이 안 좋은 드라마로 이승연, 김희선, 김민종, 신현준 등 화려한 스타 캐스팅과 로맨틱 코미디의 가벼운 분위기를 내세웠고 전작의 비판을 의식하여 대본의 완성도도 높았다. 그런데 제작이 미뤄지면서 경쟁사인 MBC에서 같은 컨셉의 그대 그리고 나가 먼저 방영을 시작하였고 <웨딩드레스>는 방영되기 직전에 하필이면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져서(...) 시청자들로부터 "IMF 시대에 역행하는 사치성 드라마"로 낙인찍히며 15%대의 저조한 시청률에 머무르다 22회(98년 2월 15일) 만에 조기종영 당했다 .참고로 <그대 그리고 나>는 <웨딩드레스>의 사례를 보고 최진실 박상원의 사랑이야기에서 최불암 박원숙 등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변경하여 50% 이상의 시청률로 승승장구한다.
- ↑ 원래 이 시간대의 후속작으로 정해진 드라마는 야망의 전설이었다.그러나 이 드라마는 '현대사 속에서 한 가족이 겪게 되는 아픔과 사랑 이야기'라는 기획의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이미 한번 제작이 무산될 위기에까지 올랐던 작품이고 KBS 측에서도 "대본 캐스팅을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조건"으로 드라마의 제작을 허락한 것이었기에 야망의 전설을 방송시간에 맞춰 내보내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라고 판단한 KBS측에서 중장년층 여성 시청자가 많이 보는 시대극인 <아씨>를 39회부터 <웨딩드레스> 후속으로 옮겨심었다.
- ↑ 시간대를 옮기기 전에는 25%대를 유지.
- ↑ 90년 1월부터 91년 3월까지 예능국 차장으로 재직했다가 91년 4월 드라마국으로 돌아온 뒤 <TV 문예극장> 위주로 연출을 맡아오다가 93년 4월 드라마국 부주간으로 발령되면서 현장을 떠났으며 97년 4월 드라마국 제작위원으로 발령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