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아폴로 계획 | ||||||
아폴로 7호 | → | 아폴로 8호 | → | 아폴로 9호 |
APOLLO 8 | |
아폴로 8호 미션 패치 | |
발사일 | 1968년 12월 21일 12시 51분 0초UTC |
달 착륙일 | - |
귀환일 | 1968년 12월 27일 15시 51분 42초UTC |
미션 기간 | 6일, 3시간 42초 |
우주선 | 사령선 - 아폴로 CSM-103 |
사령관(CDR) | 프랭크 보먼[1] |
사령선 조종사(CMP) | 짐 러블[2] |
달착륙선 조종사(LMP) | 윌리엄 앤더스[3] |
196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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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든 B. 존슨 1967 | → | 아폴로 8호의 우주인들 1968 | → | 중산층 1969 |
1 불가능에 도전하다
아폴로 8호는 아폴로 11호 이전의 가장 괄목할 만한 미션미친 짓이었다. 이제까지 지구궤도 선회 정도까지만 성공한 상태에서, 아폴로 8호는 지구를 벗어나 달로의 비행, 달궤도 진입, 달궤도 이탈, 지구로의 귀환이라는 이제까지 인류가 해보지 못한 여러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몇 번의 미션으로 쪼개서 단계적으로 테스트해 가면서 진행해 나아가야 할 과정들을 모아 한 큐에 해버린 매우 위험성이 크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던 도박에 가까운 미션이었다.
원래 초창기 아폴로 8호 계획은 달 착륙선을 탑재하여 그 기능을 테스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사실 이 계획조차도 무리였던 것이 새로 개발된 새턴 V 로켓은 이제껏 한번도 유인비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달 착륙선을 테스트하기 이전에 새턴 V 로켓의 유인비행 테스트부터 먼저 시행했어야 한다. 하지만 1969년 안으로 인간을 달로 보내야 한다는 과중한 목표 때문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자신이 만든 새턴 V 로켓이 이미 세 차례에 걸친 무인 발사의 성공으로 로켓 자체의 신뢰성은 어느 정도 검증 받았다고 확신하여 유인발사 테스트 과정을 스킵하고 과감히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달 착륙선의 개발이 지연됨에 따라 달 착륙선의 탑재 및 테스트 계획은 아폴로 9호로 미루어지게 되었고, 아폴로 8호는 달 착륙선이 없는 새로운 미션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자칫 아폴로 8호 계획 자체가 목적없이 붕 떠버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폰 브라운은 사람을 태운 아폴로 8호를 아예 달까지 보내서 달 선회 비행을 시킨 후 지구로 귀환시키자는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제까지 인류는 지구궤도를 벗어나본 적조차 없었다. 달 선회 비행이라는 아폴로 8호 계획 자체의 무모함을 차치하더라도 아폴로 8호에 투입될 새턴 V 로켓은 이제 막 개발된 것으로 사람을 탑승시킨 유인우주비행은 한 번도 테스트해 본 적이 없었다. 폰 브라운이 제안한 이 아폴로 8호 계획이 언론에 새 나가자 무리한 계획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천명한대로 60년대 안에 달에 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촉박했다. 폰 브라운은 NASA의 기술력,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새턴 V 로켓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다. 또 브라운은 아폴로 8호가 성공한다면 소련 과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그들의 개발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브라운은 비판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아폴로 8호 계획을 밀어부쳤다. 때마침 CIA의 첩보 위성이 소련에서 개발 중이던 N-1 로켓을 촬영하여 미국 측에 위기 의식을 부채질했고, 결국 아폴로 8호의 달 선회 비행 계획은 브라운의 의지대로 추진되었다.[4]
아폴로 8호 미션은 준비도 부족한 가운데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결행한 도박행위지만,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8년 12월 21일에 발사된 아폴로 8호는 3일만에 성공적으로 달 궤도에 진입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이에 프랭크 보먼이 구토를 하며 NASA 관계자들이 단체로 감기 걸렸던 아폴로 7호를 떠올리며 충공깽에 빠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시국이 시국인지라 미션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2 메리 크리스마스
미션의 클라이맥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왔는데, 아폴로 8호 승무원들이 성경(정확히는 킹 제임스 성경)의 창세기 제1장을 돌아가며 읽었다. 읽은 후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아폴로 8호 승무원들로부터, 좋은 밤을 보내시길 빌면서 마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지구의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이 말을 듣고 NASA에 나중에 지원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아폴로 8호가 찍은 달에서 본 지구라는 사진은 아직도 유명하다.[5]
1968년 12월 24일, 지구돋이(Earthrise).[6] 인류가 최초로 지구돋이를 촬영한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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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본 지구. 착륙선 조종사 윌리엄 앤더스가 촬영하였다. |
달 착륙선도 없이 감행한 비행이었기에 사고가 났다면 우주비행사들은 모두 죽었겠지만[7] 이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탑승한 우주비행사는 프랭크 보먼(사령관), 짐 러블(사령선 조종사), 윌리엄 앤더스(달착륙선 조종사)로, 이 중 짐 러블은 아폴로 13호 사령관이 된다.
3 의의
아폴로 8호의 성공은 유인 달착륙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약 중 하나였다. 아폴로 8호를 통해 미국은 소련과의 치열한 우주 경쟁에서 결정적으로 우위를 점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애초에 여러 번에 나누어서 수행되었어야 했을 중요한 미션들을 한큐에 성공시킴으로써 달착륙 일정을 크게 앞당길 수 있었고 이후 케네디의 계획대로 1969년 안에 달착륙 후 귀환시킨다는 계획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미디어의 영향을 십분 활용했던 폰 브라운의 영향으로 TV 카메라를 싣고 간 아폴로 8호는 달 선회 비행 동안 달에서 본 지구의 모습, 인류가 보지 못하는 달 뒷편의 모습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아 생중계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일반 대중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일반 대중들은 아폴로 8호가 달 상공에 생중계로 촬영한 달 표면의 화면들을 보면서 인간이 달 상공까지 갔다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고, 인류의 달 착륙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타임 지에서 68혁명의 젊은이들 대신 올해의 인물로 아폴로 8호의 우주인들을 실은 것처럼, 68혁명의 좌절과 보수파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