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암스트롱

Neil Alden Armstrong

1 개요

500px-GEMINI-TITAN-8_-_PRELAUNCH_ACTIVITY.jpg
1966년, 제미니 8호의 발사 준비. 요새 찍은 사진마냥 선명하다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제미니 8호를 무사히 귀환시킨 덕분에 훗날 역사적인 아폴로 11호의 선장으로 발탁된다

neil_armstrong_dead_a_82.jpg
1969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가기 직전에 찍은 사진. [1]

600px-Neil_Armstrong_Hall_of_Engineering.png
퍼듀 대학교 닐 암스트롱 공학관에 있는 암스트롱의 동상.

512px-Neil_Armstrong_at_50th_anniversary_of_John_Glenn%27s_first_spaceflight.jpg
프렌드십 7호의 미국 최초 지구 궤도 비행 50주년 기념식 연설 장면.

Neil Alden Armstrong
닐 올든 암스트롱
은혼에 등장하는 이것과는 관계없다.
사실 노래도 잘 하고 자전거도 잘 탄다
팔이 튼튼해

1930년 8월 5일 ~ 2012년 8월 25일

미국우주 비행사이며,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인류 최초로 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다.

2 생애

Neil_Armstrong_boy.jpeg
보이스카웃 시절. 평생 이어지는 쿨시크한 관상이 인상적이다
450px
어릴때 졸업사진
2270539.jpg
군복무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 워퍼코네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는 의외로 항공기 기술자의 꿈을 꿨다. 즉, 켈리 존슨처럼 신묘한 외계인 고문 기술자로 살 수도 있었던 것. 하지만 비행기를 만들다보면 결국은 조종사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가용 조종 면허를 땄다. 일설에 따르면 항공 조종 면허를 자동차 운전면허보다도 먼저 땄다고... 흠좀무. 19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합중국 해군 장학생으로 MIT퍼듀 대학교를 붙었는데, 집안이 그리 학구적인 집안은 아니었던지 가문에서 두번째로 대학에 가는 사례였다. 엔지니어였던 지인이 걍 가까운 곳에 가라...는 조언을 해줘서 MIT를 쌩까고 가까운 인디애나주의 퍼듀에 들어간 암스트롱[2]은, 장학금 조건에 따라 1949년 휴학하고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 조종장교로 임관하여 1950년에는 F9F-2B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성진 일대를 정찰하던 중 대공포에 격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 3년간 의무복무를 한 뒤 1952년 8월 21일 예비역 중위로 예편, 1955년 항공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그는 NACA(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스푸트니크 쇼크 이전 NASA의 전신)와 노스 아메리칸 등 여러 항공우주산업체에서 테스트 파일럿 겸 항공 엔지니어로서 활약했다. 당시 이야기가 좀 있는데, 척 예거가 최초의 초음속 비행을 성공시킨 뒤 그 뒤를 이어 마하 2를 돌파한 테스트 파일럿 스캇 크로스필드가 X-15 프로그램이 발족하자 평소에 상업용 기체만 대량생산하던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게 이걸 맡기는 것이 영 못미덥다고 NACA에서 노스 아메리칸에 파견근무를 하려던 차에 X-15 엔지니어에게 파견근무 지원을 거절당하자 아예 리 앳우드 사장[3]의 허락을 받아 NACA에서 노스 아메리칸으로 이직[4]해버리자 NACA의 전속 테스트 파일럿 자리가 비어서 뽑힌 것이 20대 중반의 암스트롱이었다.

사실 이 시절의 커리어를 감안하면 초창기 우주 비행사들 중 테스트 파일럿 경력으로는 최고였다.[5] 1958년 이미 NACA/미합중국 공군/노스아메리칸/더글러스 등의 군수산업체에서 뽑은 Man in Space Soonest, 이른바 MISS 프로젝트에서 최연소로 뽑힌 바 있으며, 이전에 노스 아메리칸 사에서 X-15의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수십킬로미터의 고도까지 초음속으로 비행하며 요단강에 몇번씩 발을 담그기도 했다. 또한 X-20 다이나 소어 프로그램에서 선발되기도 했으며, X-20 프로그램에서 나온 1962년에 NASA의 우주비행사가 되어[6] 1966년에는 제미니 8호의 사령관으로서 인류 최초의 지구 궤도상 우주선 도킹에 성공했으며 그 이후 갑자기 심한 스핀에 빠지며 NASA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서의 끔살(...) 위기에 빠졌던 제미니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귀환시켰다.[7] 이후 제미니 11호의 백업 멤버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69년, 39세의 나이에 아폴로 11호의 사령관 자격으로 동료 우주비행사인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달을 향한 우주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대망의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한국 시각), '고요의 바다'로 명명된 달 표면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달 착륙을 다룬 다큐멘터리 Rocketmen에 의하면, 달 착륙 전에 착륙 예정지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하고 코드 1201 에러가 반복해서 일어났는데 이때 휴스턴에서는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연료가 1분치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이때 닐 암스트롱이 실력을 발휘, 착륙선을 수동으로 제어하여 무사히 안착한다. 그는 달에 첫 발을 내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아폴로 계획 항목에 자세히 적혀져 있지만, 아폴로 11호는 지금 우리가 집에서 쓰고 있는 컴퓨터는커녕 1세대 아이폰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컴퓨터와 계산기를 갖고 우주공간을 며칠이나 돌아서 결국 달 착륙에 성공하였다. 1969년 당시에는 그 정도 기술조차 미국이란 나라가 국가 예산의 몇 %를 때려박아가며, 전국에서 최고의 영재들을 갈아서 에밀레종 만들 기세로 퍼부어야만[8] 우주선 1대의 공간 안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수준의 컴퓨터를 탑재하고 인류 최초로 태양계를 벗어난 탐사선 보이저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지만, 보이저는 그냥 우주 공간 직선으로 쭉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고 착륙하는 것과는 그 난이도는 비교할 수도 없다!

여하튼 이때 그가 해치에서 내려가면서 남긴 명대사로,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가 있다. 한때 이 말에서 'a'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음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약하게나마 'a'가 발음된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참 별걸로 싸운다.

그의 달 착륙 장면은 지금처럼 인터넷 같은것이 막 보급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5억 명 이상이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으며, 온두라스엘살바도르벌이던 전쟁도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잠시 중단될 정도였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소련에 뒤처져 있던 미국의 우주개척 분야에서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아폴로 계획 항목의 '아폴로 11호' 단락을 참고바란다.

달 착륙 이후 닐 암스트롱은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공학 교수로 재직하는 등 꾸준히 우주개발 분야에서 활동한 바 있다. 한편 달 착륙에 성공한 뒤인 1969년 11월에 당시 비행을 같이한 두 우주비행사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바 있으며, 이어 1971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문위원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 것에 큰 압박감을 느끼고 대학 교수로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640px-RIAN_archive_837790_Valentina_Tereshkova_and_Neil_Armstrong.jpg
1970년 소련의 스타 시티에 있는 유리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 방문. 암스트롱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여성은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암스트롱은 2011년 ~ 2012년 사이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경제위기 등의 이유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우주개발 관련 예산을 축소했던 것과 관련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비판하는 등 미국 정부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2012년 8월 25일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외신에 따르면 닐 암스트롱은 관상동맥 협착 증세가 발견돼 수술했지만 노환으로 인해 몸이 버티지 못하여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영결식 영상.

624px-Neil_Armstrong_burial_at_sea_%28201209140008HQ%29.jpg
장례식은 9월 13일 워싱턴 국립 대성당(성공회 성당)[9]에서 치뤄졌으며, 워싱턴 현충원 국립묘지에 봉분을 만들어 매장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하여 미국 해군에 의해서 대서양 바다에 유골이 뿌려졌다. 산골은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필리핀 시'함이 담당하였다. 한국전에 참전하여 수십차례 소티를 기록했던 참전용사이기도 했기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역시 유족에게 태극기를 보내며 조의를 표했다.[10]

3 기타

두번째로 달에 내린 사람은 버즈 올드린이다. 해당 항목 참고.

697256main_ECN-151FRCpilots1962-cropped.jpg

X-15 1기 테스트 파일럿들의 단체 사진. 앞줄 좌측부터 밀트 톰슨(Milt Thompson), 잭 매케이(Jack McKay), 빌 데이나(Bill Dana). 뒷줄 좌측부터 암스트롱, 브루스 피터슨(Bruce Peterson), 스탠리 버처트(Stanley Butchart), 조 워커(Joe Walker). 암스트롱의 얼굴은 척 봐도 다른 이들보다 대여섯살은 어려보인다.[11]

500px-Pilot_Neil_Armstrong_and_X-15_-1_-_GPN-2000-000121.jpg

524px-Apollo_11_LLRV_1.jpg

우주비행사로서의 커리어 외에도 엘리트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역사에 남은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NASA 초창기 역사에서 암스트롱의 이름은 우주인으로서의 기록 못지 않게 NACA 시절부터의 X 실험기 시리즈 연구에서도 자주 보인다. X-15의 최고 속도 기록(물론 이후 경신되긴 한다)을 세우기도 했고, 아폴로 11호 훈련 도중 달 착륙선의 조종연습을 위해 개발된 VTOL 항공기 LLRV(Lunar Landing Research Vehicle) 1호를 조종하다 조종 불능에 빠져 끔살당할 뻔했지만 기체에서 급히 사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또한 X-20의 탈출 절차로 RTLS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 또한 암스트롱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우주왕복선이 사람 환장할 정도로 컸다는 거지만... 어쨌든 이 시절의 공로 덕에 STS-51-L 챌린저 참사에서도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로저스 위원회의 부위원장에 임명되기도 했고, 2014년에는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파입된 NASA 드라이든 비행시험센터가 암스트롱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암스트롱의 그 시절 이야기 : The Real Right Stuff

음모론자들은 달 착륙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러한 음모론은 이미 수없는 검증을 통해, 그리고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였던 본인들의 증언을 통해 논파된 지 오래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 이후 43년을 더 살았으며, 동료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는 아직 살아 있다. 사실 음모론자들은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끝나는 줄 아는데,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13호를 제외하고는 총 12명의 우주비행사가 달을 밟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버즈 올드린은 자기 바로 앞에서 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한테 죽빵을 날리고 정당방위로 판결받았다.

달에 외계인이 산다는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이나, 영화 등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약...'이란 가정을 하게 하는 사람이다. 여담으로 달 뒷면에 외계인이 산다는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의 경우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과 그 동료 일행들이 달 착륙 직후 달을 탐사하다가 당시 착륙한 곳이 달 뒷면은 아니었는데 그 넓은 달에 언제 달에 뒷면까지 가봤는지는 묻지 말자 달에 거주하는 인류보다 훠얼씬 뛰어난 먼치킨급의 외계인과 마주쳤으며 그 외계인이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인간들이 보아하니 이젠 우리 나와바리에(달) 올 정도로 많이 큰(기술력이 발달한) 모양인데 그래봐야 니들보다 더 앞선 기술력을 가진 우리한테 디지기 싫으면 좋은 말 할때 달에서 빨리 나가라 응?" 이런 우주급협박을 듣고 외계인들의 UFO와 수정(크리스탈)구조물 등 외계인들의 문명을 일부 보게 되고 겁을 먹어서 허둥지둥 급하게 지구로 귀환으며 암스트롱 본인도 그 충격때문에 이후 죽을때까지 달에 갔다온건 얘기해도 그 다음에 달에서 있었던 자세한 얘기는 꺼려한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엄청난 외계문명을 봤고 협박당해서 돌아왔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을거 같아서 물론 믿으면 골룸. 어디까지나 음모론이다. 영화 트랜스포머 3에서는 그와 버즈 올드린이 사실 불시착한 오토봇의 잔해를 찾으러 달에 간 것이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격 달에 가서 고철 수집

광수생각 1권의 첫편을 보면 알 수 있듯, 달에 갔다가 거기 사는 달토끼와 조우한 뒤 달토끼가 닐 암스트롱으로 둔갑해 지구로 내려왔고 진짜 닐 암스트롱은 달에 살고 있다는 유머도 있다. 그럼 그 이후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들은?

찰스 다윈처럼 죽기 전에 '달 착륙은 거짓이었다'라고 고백했다는 얘기가 있다. 여러분 이딴 고인드립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하여간 음모론자의 고인드립은 답이 없다. 더욱 웃긴건, 정작 이 음모론은 닐 암스트롱이 사망하기 전에 돌아다녔다(...).

영화 아폴로 13에서도 살짝 단역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폴로 13호의 급박한 상황이 세계에 알려지며 핫이슈가 되자 올드린과 함께 짐 러블의 치매 투병 중인 노모를 찾아가 힘이 되어드리는 역할. 며느리가 "이쪽은 암스트롱씨고 이쪽은 올드린씨에요. 짐의 직장동료(...)에요." 하는데 러블의 어머니는 이들이 누군지 못 알아보고 "댁들도 우주 다녀왔수?" 하고 암스트롱은 급 당황한다(...)

그는 중년 무렵 1980년대에 챌린저호 참사가 터지자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와 함께 NASA를 대표하여 진상조사위원회에 포함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에서는 역시 최고의 물리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 택시기사에게 듣보잡 취급을 받으면서 택시기사가 암스트롱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며, 파인만은 그런 사소한 부탁을 기억해서는 사인을 받고[12] 택시기사를 끝끝내 찾아내서 사인을 전해준다(...)

미 해군은 차기 해양관측선 시리즈의 이름을 닐 암스트롱급(Neil Armstrong-class oceanographic research ship)으로 이름지어 1번함 R?V Neil Armstrong을 진수했다.[13]

심슨 가족의 할로윈 에피소드에서는 호머 심슨에 의해 살해되기도 한다.

닐 암스트롱이 독실한 기독교도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는 이신론자였다. 독실한 기독교도 기믹은 오히려 올드린에 해당되는 편. 오히려 이슬람권에서는 암스트롱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는 사실과 다른 설이 불거지며 미 국무부가 공식 부인하기도 했다.

한편 암스트롱은 우주개발 역사에서 달 착륙이 아니더라도 작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NASA에 소속된 '민간인' 신분으로서 지구 궤도에 올라간 기록은 암스트롱이 최초이기 때문.[14][15] 6.25 전쟁 이후 예비역 중위가 되었지만 그나마도 곧 때려치고 민간 테스트 파일럿이 된 케이스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 유리의 복수에서 그의 명대사를 소련서기장님께서 다시 발언하셨다.

평생 우주에서의 경험이나 자신이 인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일부러 이야기하기를 꺼렸던 암스트롱이지만, 베트남 전쟁기에 미군 포로들이 월맹군의 회유와 구타, 세뇌를 견뎌낸 것이 자신 덕분이라는 일화를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미국으로 오고가는 월남전 미군 포로와 가족의 서신에서 포로들에게 전해준 것은 당연히 미국은 포로들을 버렸고 오히려 학살자로 취급한다, 미국은 끝내 패배할 것이다 등의 내용으로 조작 내지 검열삭제된 내용들이었지만 무심코 검열에서 발각되지 않고 전해진 아폴로 11호 달 착륙 우표가 포로들에게 전해지자 미처 문 레이스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잡혔던 포로들이 해냈다 해냈어 천조국이 해냈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16]

  1. 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뻔 했다. 자세한 건 아폴로 11호 항목 참조.
  2. 비슷하게 버즈 올드린은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에 간다고 MIT를 쌩깠다. 아아 미국 지잡대 지못미. 그러나 오늘날 MIT는 사관학교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우주비행사 동문을 배출한 대학이 되었다(...) 뭐, 올드린도 석사는 MIT에서 공부했으니...
  3. 이 사람은 훗날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4. 노스 아메리칸은 이 시절부터 초고고도, 초음속 항공기 개발 노하우를 쌓아가며 XB-70을 만들고 아폴로 사령선, 새턴 2단 로켓, 그리고 우주비행기의 상징이 된 우주왕복선 오비터 제작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보잉보잉...
  5. 미군이 테스트 파일럿을 많이 양성하고 써먹는다고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전투비행대에 순환배치되는 원칙이 상존하기 때문에 전업 테스트 파일럿만큼의 기량과 경력을 쌓기엔 힘들다. 오늘날에는 민간 산업체에서도 공군 경력 꽤 있는 베테랑을 선호하기 때문에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이 시절에는 암스트롱처럼 큰 전쟁에의 참전 경력으로 검증된 경우 군생활 때려치고 일찍 전업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도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다. F-4의 개발과정에서 크게 활약했던 존 영짐 러블 역시 제미니를 앞두고 함께 선발된 9인 중에서도 특히 암스트롱이 원탑이라고 여겼을 정도.
  6.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기도 전인 1958년에 조직된 MISS의 멤버들 중 유일하게 NASA의 35세 이하라는 우주 비행사 지원 자격을 만족하였다. MISS에서 함께 활약했던 동료들은 암스트롱보다 최소 6살은 많은 이들이었던지라 암스트롱을 제외한 이들은 1961년 머큐리 계획이 발표될 적에 이미 35세가 지났다. 이들은 테스트 파일럿으로 계속 활약하다 XB-70 사진 촬영 후 허무하게 사망한 조셉 워커처럼 젊은 나이에 창공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우주에 나가지 못한 채 연구에 전념하다 은퇴한 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채로 작고하였다. 결국 2010년 사망한 로버트 화이트에 이어 마지막 생존자였던 암스트롱마저 2012년 타계하며 MISS의 멤버들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7. 이 미션 직전에 제미니 9호 승무원 엘리엇 시와 찰스 배셋이 T-38 사고로 순직하여 여론이 뒤집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암스트롱은 자신과 데이비드 스콧의 목숨을 구한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의 우주계획 전체가 좌초될 위기에서 NASA를 구해낸 것이다.
  8. 당시의 코딩컴퓨터를 보고 싶다면 다음의 영상을 참고하자. #코딩, #컴퓨터. 코딩 부분 영상은 자기 코어 메모리에 프로그램을 이식하는 장면이다. 자기 코어 메모리는 1960년대 당시 내구성과 집적도가 가장 우수했지만 프로그램의 1비트마다 전자석의 극성을 맞추고 (극성을 반대로 맞추면 비트가 반전되므로 당연히 오작동을 일으킨다.) 전선으로 꿰는 노가다를 통해서 제작되었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SRAM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기였다.
  9.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 달 착륙 5주년에 맞춰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 월석을 기증하였고, 그 월석이 중앙에 놓인 남쪽 방향 스테인드 글라스는 스페이스 윈도우로 불리고 있다.
  10. 2010년 한국전 발발 60주기에 맞춰 한국에 초청할 계획도 있었지만 건강 문제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11. 다른 이들은 전부 이 시기에 30대 이상의 나이였으며, 이후 NASA가 우주비행사를 뽑을 때도 너무 나이가 많다고 지원이 반려되었다.
  12. 조사위원들은 파인만이 딸에게 전해주려는 거라고 생각하며 허허허 웃기만 했다.
  13. 미군은 배가 너무 많다보니 병참선이나 관측선 같은 비전투 함정들에는 역사적/영웅적 탐험가나 선지자, 개척자들의 이름을 따오고 있다. 예를들어 루이스 앤 클락급 병참선의 루이스와 클락은 아메리카 서부를 처음 탐험했던 이들이며 해당 클래스의 2번함은 여성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이들의 가이드를 맡았던 사카가웨아다. 3번함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 앨런 셰퍼드이고, 7번함은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심해잠수사로서 영화 맨 오브 오너의 실제 주인공인 칼 브래시어 원사의 이름을 땄으며, 9번함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 에도 막부의 개항을 이끌어낸 매튜 페리 제독의 이름을 땄다. 심지어 5번함에는 로버트 피어리까지 있다(...) 그리고, 닐 암스트롱급 해양 관측선 2번함은 당연히 샐리 라이드.
  14. 당장 버즈 올드린만 해도 공군 현역이었고,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 미션의 군인들은 별을 단 인물도 꽤 있다.
  15. 우주에 올라간 기록으로는 MISS 시절의 동료 조셉 워커가 앞선다. 소련의 민간인 여성 발렌티나 테레시코바(후일 소련 공군 장성이 되긴 하지만 당시에는 민간인 신분이었다.)의 우주 비행 한 달 후에 X-15의 플라이트 90, 플라이트 91에서 고도 100km를 돌파하며 미국에서 인정하는 '우주 비행사'의 자격을 만족하였다. 사실 살짝 만족한 것이긴 하나, 어쨌든 우주 비행을 여러 번 다녀온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MISS의 멤버들 중 암스트롱을 제외하면 우주를 실제로 경험한 유일한 인물.
  16. 이 때문에 달에 갔다온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은 대통령이나 국무부의 특사로 활동하며 자주 베트남에 파견되어 포로 교환에도 큰 수고를 했다. 물론 포로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달에 갔다온 우주인들이 온다는 소식은 달 탐사 경쟁의 결말을 알기도 전에 카페베네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던 포로들에게도 여러 경로로 스포일러 전해지며 큰 희망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