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바그라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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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ётр Иванович Багратион(1765 ~ 1812)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

1 개요

나폴레옹 전쟁러시아군을 이끌었던 장군이자, 조지아 바그라티온 왕가의 왕자이다. 러시아 원정 당시 러시아 2군을 이끌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쿠투조프, 베니히센, 톨리 등과 함께 당대의 러시아군을 대표했던 이름난 장수이다. 다만, 앞서 언급된 다른 세 장군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른, 맹장, 용장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던 장군이다.

2 생애

2.1 나폴레옹 전쟁 이전

바그라티온은 1765년, 키즐랴르(지금의 다게스탄)에서 조지아의 왕자이자 러시아군의 대령이었던 이안 바그라티온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여 17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군에 종군, 아스트라한 보병 연대 휘하 캅카스 척후병 부대의 중사로 복무하였으며, 이후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체르케스[1]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이 때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키예프 기마 추격병 연대의 부사령관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의 타데우쉬 코시치우쉬코가 일으킨 봉기(코시치우슈코 반란)를 진압하며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겪게 되는데... 바로 러시아의 명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지휘를 받게 된 것. 바그라티온은 수보로프의 지휘 하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맹렬히 싸워 공을 세웠고, 이 때 수보로프의 눈에 들어 공을 인정받아 소피아 중기병 연대의 연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수보로프를 따라 1799년의 이탈리아, 스위스 원정에 종군,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선봉장이 되어 이탈리아 전선의 프랑스 공화국군을 상대로 맹활약하며 브레시아를 점령하는 등, 러시아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원정이 끝나고 그가 러시아에 귀국했을 때, 그는 어느덧 근위대대의 대대장이 되어있었다. 군복무 17년만에 중사에서 근위대장까지 포풍승진

2.2 나폴레옹 전쟁

2.2.1 오스트리아 전쟁

나폴레옹이 황위에 등극하고 전 유럽의 어그로를 끌어 기어이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 러시아가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자 이미 러시아군의 대표적 지휘관이 되어있었던 바그라티온 역시 자연스럽게 이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그는 역시나 러시아군의 선봉대를 담당하였으며, 쿠투조프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게 되자 쿠투조프는 군대를 퇴각시켜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고자 하였는데, 나폴레옹은 쉬지 않고 맹진, 쿠투조프에게 군대를 퇴각시킬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에게 7,300명의 병사를 맡겨 프랑스군의 저지를 지시한다.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된 홀라브룬 전투. 영상 후반부에 우라를 외치며 돌격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그라티온은 부대를 이끌어 홀라브룬 북쪽의 고지에 진을 치고 장 란조아생 뮈라가 이끄는 약 20,000의 프랑스군을 맞이한다. 병력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나머지 바그라티온은 거짓으로 뮈라에게 휴전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 때 뮈라는 바그라티온이 러시아의 모든 부대를 지휘하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 미스에 빠져(...) 란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시 휴전을 승낙하고 만다. 이 사이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주력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질 수 있었으며, 바그라티온 역시 자신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을 정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또 나를 실망시키는군 뮈라 나의 실망감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라는 말과 함께 뮈라에게 즉각 공격할 것을 명령, 이에 뮈라는 란과 함께 러시아군을 상대로 출진한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맹렬히 저항하며 최대한 프랑스군을 잡고 늘어졌고, 결국 쿠투조프의 본대가 성공적으로 오스트리아군 및 러시아 증원군과 합류할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1,200명, 러시아군은 약 2,600명의 병력 손실을 내었으며, 바그라티온은 남아있는 5,000 가량의 병사들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본대와 합류한다.

하지만 이런 바그라티온의 활약도 무색하게, 이어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트스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나폴레옹에게 말 그대로 개발살이 나버린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우익을 담당해 13,000의 병사를 이끌었던 바그라티온 역시 뮈라와 란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맞서 리턴매치 무참하게 박살나며 겨우 후퇴, 그나마 뮈라가 추격하자는 란의 제안을 무시하고 그의 부대를 추격하지 않은 덕분에 전멸은 면할 수 있었다.

2.2.2 독일.폴란드 원정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로 나폴레옹에 의해 3차 대불동맹이 깨어짐에 따라 전쟁은 대략 일단락되는듯 보였으나, 곧이어 프로이센이 참전해 4차 대불동맹이 결성, 다시금 전 유럽이 나폴레옹 까기에 참여하게 된다. 바그라티온 역시 다시금 전쟁에 종군하여 이번에는 레온티 베니히센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어진 나폴레옹의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프로이센군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처절하게 깨지고, 카멘스키가 이끄는 러시아군 역시 프랑스군에게 패퇴하고 있을때 베니히센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의 모룽겐에서 원쑤베르나도트 휘하의 프랑스군을 격파(모룽겐 전투)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군이 너무 깊숙하게 진군해버린 나머지 좌익의 방비가 허술해지게 되는데,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베르나도트에게 러시아군의 좌익을 공격해 퇴로를 막아버리라는 명령서를 보낸다.

그러나 운 좋게도 바그라티온 휘하의 카자크 기병대가 이 명령서를 가져가던 전령을 생포, 명령서는 고스란히 바그라티온에게 전달되었고 바그라티온이 이를 베니히센에게 보냄에 따라 나폴레옹의 계획이 탄로나게 된다. 베니히센은 이 사실을 알자마자 황급히 부대를 후퇴시켜 좌익을 재정비하였고, 절호의 기회를 놓친 나폴레옹은 아쉬운 대로 추격을 계속하였다. 마침네 두 군대는 1807년 2월 7일, 아일라우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바그라티온은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아일라우의 고원에서 분전하였으나, 다음날 이어진 저 유명한 뮈라의 기병돌격으로 러시아군의 중앙이 뜷려버리게 되면서 전세가 기울어지게 되자 베니히센이 후퇴할 때 함께 후퇴하게 된다. 다만 그의 부대를 포함한 러시아군 전체가 프랑스군과 워낙 백중세로 싸워주었던 덕분에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군을 추격할 수 없었고, 이에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은 같은 해 6월 24일 프리트란트에서 다시금 충돌, 여기서 러시아군이 완패를 당하고 틸지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4차 대불동맹은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패전만 거듭하기는 하였으나 바그라티온은 이 때의 전공 덕에 러시아군을 이끌 새로운 장군으로 주목받았으며,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얻고 북스게브덴(Buxhoevden, 1750 ~ 1811)휘하에서 다시금 핀란드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2.2.3 핀란드 전쟁

스웨덴과 러시아는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고,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여러 차례 충돌해 왔었지만 틸지트 조약과 대륙봉쇄령 선포 이후 스웨덴이 적대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된 이후로 안 그래도 나쁘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리게 된다. 이후 영국과 러시아간의 전쟁이 발발[2]했을때 스웨덴이 영국을 지지하고 나서며 핀란드에 병사를 집결시키자 러시아 역시 스웨덴과의 충돌에 대비해 스파이를 대규모로 파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한편 프랑스 역시 반나폴레옹의 기치를 고수하던 스웨덴의 버릇을 이 기회에 고치고자 하였으며, 러시아를 지원해주게 된다.

결국 핀란드에 스웨덴군이 집결하기 전에 선빵을 날려야겠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전쟁을 결의, 1808년 2월 21일 북스게브덴을 사령관으로 하는 24,000의 러시아군이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게 되면서 핀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당시 바그라티온은 북스게브덴 휘하에서 21사단을 이끌고 아직 집결하지 못한 스웨덴군의 집결을 방해하는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때 총사령관 북스게브덴의 판단 미스로 고립되어있던 스웨덴군이 성공적으로 후퇴해버리면서 스웨덴군을 각개격파할 기회는 날아가버리고 만다.

핀란드에서는 밀려나왔다지만, 스웨덴은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4세는 직접 최전방에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고, 러시아군이 점령한 투르쿠에 대한 상륙작전을 명했지만 약 5,000명으로 이루어졌던 선발대가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에게 패퇴하게 되자 올란드 섬을 요새화하여 방어를 굳히는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하게 되었으며, 이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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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드(Åland) 섬의 위치. 핀란드와 스웨덴을 잇는 요충지였다.

전쟁이 시작된지 1년만에 핀란드 전역을 접수하는데 성공한 러시아는 의기양양해져 스웨덴 본토까지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핀란드의 러시아군은 각각 세 개로 쪼개져 톨리, 슈발로프, 그리고 바그라티온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며, 바그라티온이 통솔한 병력은 약 20,000에 달했다고 한다.

이 때 바그라티온은 올란드 섬을 공략하기 위해 아주 대담무쌍한 전술을 내놓는데, 바로 겨울이 되어 꽁꽁 얼었을 보트니아 만의 바다를 행군해 건넌다는 것. 이는 당연히 무모한 짓으로 여겨졌지만, 놀랍게도 바그라티온은 꽁꽁 언 겨울의 북방 바다를 가로질러 성공적으로 올란드 섬에 대한 공성전을 수행해내고 만다. 당시 올란드 섬의 스웨덴군을 지휘하던 되벨른 장군은 압도적인 숫적 열세로 인해 바그라티온에게 휴전 협상을 청했으나 자기가 해봐서 아는 바그라티온은 이를 계략이라 판단하고 협상을 거절, 결국 되벨른의 부대는 올란드를 버리고 후퇴해버렸고, 올란드 섬이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된다.

이렇듯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핀란드 전쟁은 조금 허무하게도 스웨덴의 왕이었던 구스타프 4세가 쿠데타로 폐위를 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3]. 바그라티온은 이 전쟁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2.2.4 러시아 원정과 죽음

다들 알다시피,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틸지트 조약을 맺을 때야 나폴레옹이 워낙 무지막지했으니 찍소리도 못했고, 핀란드 전쟁이 진행중일 당시에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해 주었던만큼 참고 있었지만, 핀란드 전쟁이 끝난 뒤 1년 가량이 지나자마자 러시아는 다시금 대륙봉쇄령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된다. 마침 터진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나폴레옹의 위장이 쓰라린[4]발목이 붙잡힌데다, 핀란드 전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던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대륙봉쇄령을 일방적으로 파기,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한다. 당연하게도 이를 고깝게 여긴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1812년, 700,00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정대(일명 대육군)를 조직하여 러시아 원정을 단행한다.

당시 쿠투조프의 휘하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 종군하고 있었던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을 상대하기 위해 급히 귀환되어 러시아 제2군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전선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1812년 7월 23일,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모길레프 전투에서 참패한 뒤 스몰렌스크에서 제1군 휘하로 재편성되어 톨리의 지휘를 받게 된다. 그러나 한 성깔 하는 맹장이었던 바그라티온은 신중하게 청야전술[5]을 펼치는 톨리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프랑스군과의 결전을 외쳤고, 결국 바그라티온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톨리가 경질, 그 후임으로 쿠투조프가 러시아군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바그라티온 역시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쿠투조프 역시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막상 사령관이 되고 보니 러시아군은 청야전술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그라티온을 대표로 하는 결전파들의 극렬한 반발 속에 + 자기 스스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당당히 말해버렸던 바[6]가 있어서(...) 1812년 9월 7일, 보로디노에 진을 치고 나폴레옹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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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디노 전투에서 피격당한 바그라티온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보로디노에서 바그라티온은 러시아군의 좌익을 지휘하였다. 보로디노 전투는 양 군을 합쳐 약 300,000에 달하는 병력이 맞붙어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좌익 역시 맹렬히 싸우며 프랑스군과 호각을 보였으나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기병대에게 후방을 급습당하며 전세가 역전당하고 말았고, 열세 속에서 위치를 고수하던 바그라티온은 유탄에 맞아 부상당하고 만다.

보로디노 전투는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부상을 당한 바그라티온은 후방으로 이송되어 급히 치료를 받았으나 상처가 괴저로 악화되어 호전에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1812년 9월 12일[7],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3 평가

러시아에는 좋은 장수가 없지만 딱 한명, 바그라티온이 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일찍부터 크고 작은 군공을 세워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이에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더 적은 병력으로도 압도적 규모의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홀라브룬 전투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전공이며, 얼어붙은 보트니아 만을 건너 스웨덴군의 요충지를 공략한 올란드 전투는 그의 대담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 홀라브룬에서 뮈라를 상대로 기만책을 사용했던 전적을 보면 머리를 쓰는 쪽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대담함과 과단성은 루이 니콜라 다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비롯한 당대의 '강적'들, 즉 그의 과감한 공격에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역량이 뛰어난 장군들을 대적했을때 패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하일 쿠투조프, 레온티 베니히센 등의 신중하고 책략이 뛰어났던 장수들의 휘하에서 싸울 때면 자신이 맡은 임무를 항상 훌륭하게 수행해 내었으나, 자신이 직접 한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종군했던 러시아 원정에서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는 점에서 최전선에서 병사를 통솔하며 적군과 직접 맞서 싸우는 전술적 역량은 뛰어났으나, 이에 반해 전략적 역량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바그라티온은 뛰어난 장군으로 그 역량을 타고났지만, 뛰어난 사령관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술트?

4 기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동부전선 대공세였던 바그라티온 작전의 명칭이 바로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
  1. 동계올림픽으로 유명해진 도시인 소치주도로 하는 지역이다.
  2. 영국-러시아 전쟁(Anglo-Russian War). 양국간의 전면전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고, 발트 해에서 산발적인 해상 충돌이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3. 여담으로, 이 때 구스타프 4세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칼 13세는 훗날 자신의 후계자로 어떤 사람을 지명하게 되는데...
  4. 나폴레옹은 위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때맞추어 터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대하여 '저게 내 위장을 더 쓰리게 한다'라는 말을 한 바가 있다.
  5.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건 러시아 원정 문서 참조.
  6. "한번도 안 싸우고 모스크바를 나폴레옹에게 내주지는 않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7. 24일이라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