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전쟁

French Revolution War, Great French War

1792년부터 1802년까지 진행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프랑스인들이 유럽에 전파시키기 위하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혁명 이념이 유럽에 전파되는 것이 두려웠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군주들이 팀먹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불전쟁'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시기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시기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나누는 기준은 참 애매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전쟁이 끝난 시기를 1802년 아미앵 화약 체결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1]

그리고 이 시기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제패하게 될 먼치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1 배경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부르봉 왕조가 뒤집어진 뒤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1년에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했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바렌느 도피사건) 이것은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레오폴트 2세의 지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어그로를 끌었다.[2] 레오폴트 2세는 당시의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프랑스의 망명 왕당파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필니츠 선언을 함으로써 프랑스가 선빵을 날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혁명을 일으켜 새롭게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절대왕정국가들과는 서로 가지고 있는 이념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고, 혁명 전까지 대부분 프랑스로 넘어간 알자스 지방[3]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제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2 전개 과정

2.1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2~1798)

1791년, 유럽의 위대한 전제군주국이었던 프랑스가 그들이 무시하던 시민들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국왕 일가 전원이 연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사태를 지켜본 많은 유럽의 왕들은 이를 위태위태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이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프로이센의 왕 프레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필니츠 선언[4][5]을 통해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국왕의 명령으로 국외 도피를 하는 망명 왕당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선언은 프랑스에 남아있던 왕정주의자들과 귀족들에게 그리 큰 어필을 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프랑스 혁명정부에게 있어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다. 거기에 첨언하자면, 앞서 말한 신생 프랑스 공화국과 유럽의 왕국들과의 이해관계도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결국, 안 그래도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뒤무리에즈 장군앞으로 무수한 민원이 올라오게 되자 프랑스 의회는 1792년 4월 20일에 부쳐진 투표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뒤무리에즈 장군은 오스트리아가 점유하고 있는 네덜란드 지방[6]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으로 인해 군대는 지휘계통에 혼란이 생겨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거의 다가 귀족출신이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 후 (구 체제를 따르는) 귀족이란 꼬리표가 붙은 대다수의 장교들은 죄다 숙청당하거나 도망가버린 탓에 지휘할 사람이 텅 비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7][8]완전히 제멋대로가 되어버렸고, 인재가 부족해서 제대로 지휘할 사람이 없자 부대의 전력이 유지되지 못하는 등의 역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이 집단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어떤 부대에서는 병사들이 상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9]

게다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라인강 근처의 코블렌츠에 집결했고, 7월에 프랑스 본토로 침공을 시작, 롱위와 베르뎅을 점령,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성명[10]이란 걸 발표해서 프랑스 공화국을 "국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역도의 무리"로 규정, 전 유럽이 프랑스의 적이라고 허세를 부렸다협박을 했다. 게다가 그 브룬스윅 성명에 쓰인 것은 "우리들은 왕정복고를 위해 신성한 의무를 다하려 출정한 군대이며, 만일 우리에게 대항한다면 그 어느 누구라도 군법에 회부해서 죄다 사형때리겠음"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기세등등하여 망명간 귀족들이 콩드 대공의 지휘하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하자, 프랑스 공화국은 위기에 빠졌다.

일이 이쯤되자, 혁명정부에서는 마치 신병을 붕어빵마냥 찍어낼 기세로 미친듯이 징집하기 시작했고, 부대를 새롭게 예편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타개될 기미가 안보이는데다 슬슬 국민들이 염증을 내기 시작했고, 자코뱅파와 같은 과격주의자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10일, 시민들은 튀일리 궁으로 몰려가 루이 16세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의회로 도망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분노한 시민들에게 넘겨졌다(1792년 8월 10일 봉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계속해서 진군을 해 왔고, 이대로 프랑스 공화국은 끝나나 싶었다. 그런데 9월 20일, 발미에서 뒤무리에즈와 켈레르만이 이끄는 혁명군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했다(발미 전투). 발미 전투에서 승리한 혁명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졌고, 한창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발미 전투에서 승리한 그 날,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제1공화정이 수립되었다.[11] 제1공화정은 왕정제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유죄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전 유럽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이는 전 유럽으로 하여금 프랑스 공화국이 "국왕을 처형한 천하의 개쌍놈들의 나라"로 찍혀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는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그 해 1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만 있던 대프랑스 동맹에 스페인포르투갈이 참가했고, 2월 1일에 프랑스 공화국은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하여 프랑스는 국가적 정책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 가용병력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혁명군은 늘어나는 군인의 수에 그 보급량이 한참 못미치는 현상을 겪게 되었고, 혁명군은 결국 보급 방침을 현지에서 강제 징발하여 보급을 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1793년 플랑드르 전역이 시작되었으나, 혁명군은 생각지 못한 돌발상황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가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아예 쓸어버리려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비교적 지롱드파가 많았던 도시들인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던 와중에 툴롱의 왕당파가 이러한 틈을 비집고 다른 혁명파들을 죄다 쫓아내버리고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이자, 이것은 공화국에 있어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툴롱은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기지였는데, 그곳을 빼앗긴다는 의미는 사실상 제해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와 비슷했다.

결국 공안위원회에서는 라 발레트 두 바를 함락시킨 장 프랑수아 카르토와 장 프랑수아 코르누 드 라포와프[12]를 사령관으로 해서 툴롱을 다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13] 그러나... 카르토는 군인이 아닌 안팔리는 삼류 화가였고, 그런 주제에 공동 사령관이었던 라푸아프와는 전선의 지휘권을 두고 알력다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르토 같은 이가 군대의 고위장교로 있던 탓에 프랑스군은 툴롱에 주둔해 있던 대프랑스 동맹군보다 거의 두 세배나 많았음에도 절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14] 전과가 시원찮자, 11월 11일, 공안위원회에서는 카르토를 자르고 도페라는 이름의 장군을 보냈는데, 이 사람은 카르토만큼이나 군대와는 거리가 먼 의사양반이었다(…). 아니 그것뿐만이라면 뭐라안하겠는데[15]잉여인간이 피만 보면 식겁을 하는 피공포증 이 있다는것! 이새끠 의사는 어찌 된 거지[16] 때마침 영국군의 산탄포가 미처 준비되지 못했을때 나폴레옹이 "찬스닷!"을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돌격할때에 의사양반의 호위대가 영국군의 포격한발에 사람좀 죽자 도페는 식겁하며 철수명령을 내렸다.[17] 결국 그렇게 잉여도페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그 대신에 뒤고미에 장군이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실전파였던 뒤고미에가 이끄는 혁명군은 12월 18일 결국 툴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그 해 마지막에 군대는 더욱 증강되었고, 침략자를 격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공포정치는 한층 레벨을 올려서 더욱더 많은 반혁명분자(라 쓰고 정적이라 읽는다)들을 색출, 대거 참살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숙련치가 거의 만렙을 찍고 있던 혁명군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세작전을 감행했다. 1794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령 산세바스티앙을 접수했고, 플랑드르 전역에서는 플로이루스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벨기에와 라인란트를 떼어먹었다. 승세를 몰아 피에몬트까지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성과는 대략 좋지 않았다.

해상에서, 프랑스의 대서양 함대는 미국에서 오는 곡물 수송을 받는 해로를 영국 해군으로부터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공포정치의 시대는 가고 5명의 총재들이 집권하는 총재정부 체제로 전환되었다.

플랑드르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 공화국은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기습공격해 멸망시키고, 괴뢰정부인 바타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혁명군이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본 프로이센은 기겁했고, 프랑스 공화국과 1795년 4월 6일 바젤 평화조약을 맺고 먼저 리타이어 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프로이센이 영유하던 라인강 서안의 땅들은 프랑스의 것이 되었다.

혁명군은 스페인령 카탈루냐로 쳐들어가 빌바오와 비토리아를 뜯어갔고, 카스티야까지 진군했다. 역시나 놀란 스페인도 그해 7월 10일, 산토도밍고[18]를 떼어주고 리타이어했다. 그러나 그 대신 프랑스 공화국은 스페인 왕국의 원래 영토였던 땅들을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19] 안습.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서 싸웠던 혁명군 부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알프스 방면군과 연합, 피에몬트를 공격하러 갔다.

그러는 사이, 영국은 방데의 왕당파 반란군[20]을 움직여 퀴베론에 상륙, 공화국 정부를 뒤엎으려고 했지만 나폴레옹이 포도탄을 이용한 무자비한 진압을 하자 결국 실패했다.

라인 전선에서는 피셰그루 장군이 추방당한 왕당파 당원들과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 후, 피셰그루는 당장 만하임과 마인츠에서 강제적으로 철수할 것을 군대에게 명령했다. 그 결과 프랑스의 영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그런 반면에 북이탈리아의 혁명군은 로아노 전투에서 승리했고, 얼마 안있어 맺어진 조약으로 북이탈리아의 영유권을 얻어냈다.

1796년, 혁명군은 대담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주르당과 모로의 라인군과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움직여, 티롤리아로 진주시켜 빈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주르당과 모로의 라인군은 독일 남부를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고, 주르당과 모로는 목표한 지점에 거의 도달해 가고 있었다. 특히 모로가 이끄는 중앙군은 바이에른을 지나 9월에 목적지인 티롤리아에 거의 도달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 주르당은 카를 대공에게 신나게 털린 뒤 쫓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카를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모로의 군대까지 덮치자 모로도 역시 관광당한 뒤 도망가야 했다.

주르당과 모로가 개털리고 있을 그 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목적을 이루고 있었다. 우선 사르데냐와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합류하지 못하게 갈라놓았고, 점점 강도를 높히면서 사르데냐를 협박한 결과 만토바를 공격하고 있을때쯤 사르데냐로부터 평화조약을 맺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사르데냐는 리타이어 했다. 그리고 만토바를 공략하던 중인 나폴레옹을 찌르기 위해 뷔름저 공작과 알빈치의 오스트리아 군대가 치사한 뒤치기를 하러 오자 나폴레옹은 이들을 철저하게 작살냈다.

그 해에 벤데의 왕당파 반란군은 호셰에 의해 완전히 박살났고, 한동안은 조용했다. 그 후 호셰는 아일랜드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원정을 나갔지만 보란듯이 영국 해군에게 무참히 박살나고 끝났다. 호셰는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다.

1797년 2월 브레스트의 프랑스 해군과 합류하려는 호세 데 코르도바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 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존 저비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출진, 생빈센트 곶 해전이 벌어졌고, 역시나 영국 해군은 승리했다.

해상의 전투와는 상관없이, 육상의 전투는 선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만토바의 오스트리아군 1만 8천여명의 항복을 받고 입성했으며, 오스트리아를 안드로메다 관광 태울 기세로 티롤리아로 진군, 빈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군에 맞서러 나갔는데, 이 상황보다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4월에 모로와 호셰의 혁명군이 오스트리아를 샌드위치로 만들기 위해 진군하고 있다는 것.

오스트리아는 결국 이 이상은 털리고 싶지 않았는지, 나폴레옹에게 평화 조약을 맺자고 GG쳤고, 결국 1797년 10월 17일 캄포포르미오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리타이어 하면서 일단 유럽전선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1798년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점유하던 영국 해군과 인도에서의 영국의 입지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침공, 얼떨결에 오스만 제국도 대프랑스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시작한 이집트 정복사업의 전개는 이집트 원정을 참조할 것.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외에도, 프랑스는 스위스를 침공, 말 잘듣는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웠고, 혁명군은 비밀리에 아일랜드를 돕기 위해 마요 주에 혁명군을 상륙시켰다. 장 조제프 아마블 훔베르가 이끄는 혁명군 1천 명은 마요 주의 북서부에 있는 킬쿰민에 상륙했고, 다른 아일랜드 반란군 5천명과 연합했다. 캐슬바 전투에서 2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제라드 레이크가 이끄는 영국군 6천명과 대치하게 된 훔베르는 15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영국군 300명 가까이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코노트 공화국'을 세우게 되나, 9월 8일에 롱포드 주에서 일어난 발리나묵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훔베르는 미국으로 도망쳤고, 코노트 공화국은 세워진지 약 1달 만에 멸망했다. 이탈리아 방면의 혁명군은 로마로 쳐들어가서 교황 피우스 6세를 폐위시키고 로마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아직 영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2.2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9~1801)

1799년 영국은 다시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이고, 아예 프랑스를 제대로 밟아주기 위해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지만 8월이 되도록 별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탈출, 프랑스로 귀환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영국은 빨리 러시아를 불러 네덜란드 침공을 감행할 것을 요청, 요크 공작의 지휘하에 영국-러시아 연합군은 홀란드의 북쪽 끝단에 상륙했다.

그러자 놀란 프랑스 정부에서는 기욤 마리 안느 브륀을 파견, 네덜란드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혁명군과 바타비아 공화국군은 브륀의 지휘하에 방어전을 수행했고, 10월 6일에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영국-러시아 연합군을 쳐바르면서 방어전에서 승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 해 1월 혁명군의 공세가 펼쳐졌고, 혁명군은 나폴리 왕국군을 추격해서 끝내 수도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방면군을 지휘하던 셰레는 팔 크라이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되자 GG치고는 지휘권을 모로에게 넘겼다. 그러나 모로도 전황을 타개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여서 카사노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군대에 처절히 발렸고, 프랑스는 북이탈리아의 영토를 점점 상실하고 있었다. 6월에는 수보로프가 마크도날이 이끄는 혁명군을 트레비아에서 발라줬고, 도망가는 혁명군을 쫓아 알프스와 제노바로 각각 추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한창 승세를 타고 혁명군을 버로우시키면서 진군하던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7만여 명의 혁명군에게 분노의 고자킥을 맞고 제대로 작살났다. 제1차 취리히 전투에서는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게다가 카를 대공이 있었기 때문에 쪽도 못쓰고 한번에 끝났지만, 카를 대공이 잠깐 라인란트 중부로 진군하여 보급하고 있던 사이 병력을 증강한 마세나의 혁명군이 들이친 것.

이 때 심하게 데인 탓인지 러시아는 점점 소극적 자세로 나가다가 결국 리타이어했다. 결국 전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마지막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떠나서 프랑스로 귀환, 자기를 아예 떠나보내려 했던 총재정부를 싹 갈아버리고 3인 통령의 통령정부를 수립, 자기가 제1통령이 되었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1800년 나폴레옹은 모로에게 독일 공략을 지시했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디종에서 스위스를 지나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의 후미에 도착했다. 상황을 판단한 오스트리아군은 즉각 포위망을 뚫기 위해 군대를 집결, 마렝고에서 결전을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드제의 별동대가 다시 돌아와 스스로 오스트리아군 중앙에 닥돌하게 되자 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은 알아서 괴멸했다. 그러나 드제는 여기서 전사했다(마렝고 전투).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에서 다시 프랑스의 입지를 넓히고 있을 무렵, 모로는 바이에른을 침공,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그대로 빈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화평 제의를 받아냈다.

나폴레옹이 떠나간 이집트에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사령관으로 임명된 장 밥티스트 클레베르가 이 상태로는 원정을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프랑스로의 무사 귀환을 위해 영국 함대 소속의 시드니 스미스와 엘 아리시에서 쇼부를 쳐서 합의를 보지만 케이스 제독이 제대로 배신때리고 엿을 선물하자 빡친 나머지 진군해 오는 6만의 오스만군을 상대로 헬레오폴리스에서 개전, 오스만군 3천명을 전사시키고 30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저항하는 카이로를 재점령했고 잠시 업무를 보게 된다.

근데 그러다가 시리아 출신 대학생 솔레이만 엘 할라비에게 끔살당했고[21], 클레베르의 지휘권은 메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1801년 2월 9일 뤼네빌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루드비히 폰 코벤츨 백작의 서명으로 뤼네빌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가 (기존의 정부를 갈아엎고 새로 만든) 새로운 공화정 체제의 국가들에 대한 승인을 재확인 받았고, 프랑스의 라인란트 병합을 다시 한번 재확인, 게다가 오스트리아가 갖고있던 토스카나 대공국을 프랑스에게 넘겨줬고, 이탈리아에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여러모로 오스트리아에게 안습인 해였다.

그 반면 남겨진 이집트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던 클레베르가 암살당한 뒤 자크 프랑수아 메누가 그 지휘권을 잡았고, 알렉산드리아 공방전에서 병사들의 대부분이 병에 걸려 더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하고 영국 함대에 실려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대프랑스 동맹 회원들이 리타이어했지만 영국은 아직도 프랑스를 도발하고 있었다. 영국은 무장중립동맹 가맹국인 프로이센, 덴마크, 러시아, 스웨덴이 아니꼬왔고, 결국 호레이쇼 넬슨을 시켜서 덴마크 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 덴마크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코펜하겐 해전).

1802년 이도 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영국은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었고, 이로서 길고 길었던 혁명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미앵 조약의 결과로, 영국은 바타비아 공화국에게 남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돌려줬고, 서인도 제도 중 네덜란드 영토인 섬들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후퇴하게 되었지만, 대신 트리니아드, 토바고, 실론을 양도받았고, 말타와 고조, 코미노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보호령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결과로,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하게 되었고, 혁명전쟁기간 동안 보여준 프랑스 혁명군의 전적은 다른 나라들에게 프랑스는 절대 깔봐선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크게 어필했다.

3 뒷 이야기

4 관련 국가 및 인물들

  1. 1802년이 되기 전에 대프랑스 동맹의 일원들이 속속 떨어져 나갔지만, 유독 영국과의 싸움은 계속 질질 끌게 되었다. 제1차 대불동맹이 시작된 후인 1793년부터 1802년까지. 둘은 정말 진정한 앙숙인 듯 싶다. 아니면 둘은 이를 즐기고 있던걸지도; 영국까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시키려 한 모양이지만, 영국의 강력한 해군으로 인해 잘 되진 않은 듯 싶다. 아니 그전에 할 수가 없잖아(…).
  2. 왜냐하면 기존의 군주정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세력을 경계해야 하는건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사적으로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이며 루이 16세의 처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전쟁은 피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3. 이미 프랑스의 소유가 되었지만, 거기는 게르만계 언어인 알레만 독일어의 방언인 알자스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사실 스위스에서 쓰이는 독일어도 알레만 독일어고 아오스타 계곡같은 빼도박도 못할 이탈리아 영토에서도 쓰여서 이걸로 이 땅이 독일땅이다! 란 근거가 되긴 힘들지만...), 심지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알자스에는 아직 독일 제후국의 영토가 있었다!
  4. 이 선언은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너네들이 너네 국왕이랑 그 가족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너네들 싸그리 조져버릴겨!"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매우 애매한 표현이긴 했지만, 이 선언은 그 대상인 프랑스 공화국에게 아주아주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5. 사실 레오폴트와 프리드리히는 처음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일과 전쟁 확대 가능성으로 인해 신중하게 나가려 했지만 샤를 10세프랑스 침공해 달라고 해서 강경 자세로 나간다.
  6. "오스트리아 원쑤들의 압제에 고통받는 인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준비를 시작한 것. 안 그래도 지금의 벨기에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지역은 점점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7. 그로 인해 1793년 툴롱 공방전에서 지휘하는 사령관이 안 팔리는 삼류 화가출신 장군피만 보면 식겁하는 의사출신 장군이 임명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8. BBC에서 제작한 Heroes & vilains라는 다큐 드라마 나폴레옹편에서 나폴레옹 상관으로 페리윙클이라는 장교가 오는데, 대단히 수다스럽고 감상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전투가 시작되고 피를 보자 울먹이면서 벌벌떨며 스스로 모랄빵에 빠진다(...)
  9. 테오발드 디용이 이끌던 부대는 전투에서 패하게 되자 병사들이 "우리가 진 원인은 너님 같은 귀족이 우리 상관이라 그런거라능!"이라며 디용을 끌어냈고, 디용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끔살당했다(…).
  10. 이런 것을 쓴 사람이 다름아닌 망명한 콩드 대공 루이 조제프 부르봉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양반은 루이 16세 의 사촌이었다!
  11. 이 때부터 그 유명한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12. 귀족 장교 숙청당시 공화파를 지지해서 살아남았다.
  13. 이 때 나폴레옹도 툴롱 공방전에 포병 대위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다.
  14. 나폴레옹은 거듭 상관인 카르토에게 작전을 입안하여 신청했지만 무능한 카르토는 "한낱 대포 대위가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며 시원스럽게 나폴레옹의 작전을 씹었다(…). 그리고 오로지 무한 닥돌로 병사들의 희생만 잔뜩 늘리고 있었다...
  15. 의외로 뒷배경이 이런데 출세한 사람들이 혁명기에 꽤 됐었다
  16. 사실 내과의였다-_-a
  17. 이때 젊은 대위 나폴레옹은 대놓고 도페에게 나아가 "후퇴 명령을 내린 잉여 얼간이가 당신이오?" 라고 물었는대 도페는 무서워서 감히 뭐라 하질 못했다고(...)
  18. 대항해시대 플레이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카리브 해에 있는 그 동네다.
  19. 차라리 스페인 땅좀 받는게 나았을거다. 나중에 산토도밍고에선 반란이 일어나고 파견된 원정군은 괴멸하게 된다(...)
  20. 참고로 여기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 수준은 프랑스 혁명 뿐만 아니라 프랑스 역사 전체에서도 흑역사로 취급될 수 있을만큼 잔인했다. 방데반란 항목 참고.
  21. 그가 클레베르를 죽이게 된 이유는 세금을 못 내서 갇힌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재정적 부채를 탕감해 주는 대신 클레베르를 죽이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 클레베르를 죽인 후 그는 카이로 광장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22. 나폴레옹 전쟁 항목 참조
  23.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아일랜드에서도 독립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 때 만들어진 단체가 "아일랜드 독립 연합" 이었다.
  24. 1790년대부터 1810년대까지 프랑스군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폴란드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
  25.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유럽의 거의 모든 왕정국가들이 프랑스 공화국을 엎어버리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개중에는 오스만 제국(!)도 포함되어 있다. 그냥 대부분의 왕정국가들이 공화제를 타도하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고 보면 쉬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