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마누일 1세 | ← | 알렉시오스 2세 | → | 안드로니코스 1세 | |
콤니노스 왕조 | 콤니노스 왕조 | 콤니노스 왕조 |
생애 : 1169년 ~ 1183년
재위 : 1180년 ~ 1183년
로마 제국의 황제. 어린나이에 제위에 있다가 야심있고 나이많은 친족한테 찬탈·살해 당했다는 점에서 조선 단종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1 출생
마누일 1세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누일은 전 황후와의 사이에서 딸만 둘을 보았고 그 외에는 사생아 아들 하나뿐이었기에 적자의 탄생은 큰 기쁨이었다. 게다가 당시 콤니노스 100년 중흥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제국의 입장에서는 후계자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한 셈이었고, 황후의 친정인 안티오키아 공국과 제국의 동맹인 예루살렘 왕국의 입장에서는 더 강한 연결고리가 생긴 셈이었으며, 로마인 황제가 서방인 황후 사이에서 포르피로예니토스인 후계자를 본 통합의 상징이 생긴 사건이기도 했다.[1]알렉시오스야, 네가 태어나던 날 온 유럽이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2 어린 황제
그러나 아버지인 마누일의 나이가 이미 50여세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누일은 황자를 본 이후에도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이어갔는데, 1176년의 미리오케팔론 전투를 전후하여 건강이 악화되자 문제는 수면으로 떠올랐다.
결국 죽음을 예감했는지 마누일은 어린 아들을 위해 온갖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밖으로는 그의 장기인 외교술을 발휘하여 주변의 정세를 안정시켰고, 아들을 프랑스 왕국의 공주 아녜스와 약혼시키는 등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1177년 룸 술탄국이 침공하자 Hyelion-Leimocheir 전투에서 이를 대파하고 1179년에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친정을 감행하여 쫓아 내는 등 거꾸로 제국이 압박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안으로는 황후를 필두로 한 섭정단을 꾸렸으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힘세고 강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고명대신으로 붙여주었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2세의 자리는 불안했다. 어린 황제는 단독황제가 되었음에도 놀이나 각종 경기 구경에 관심을 보였고, 황제를 대행할 섭정단은 서방인들이 많았기에 썩 지지받지 못했다. 결국 알렉시오스 2세 이전의 황위 계승권자이던 마누일의 장녀 마리아가 남편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고 섭정단은 여론의 압박에 진압을 흐지부지 끝낸 상황이었다. 결국 이 틈을 파고든 당숙 안드로니코스 1세가 여론을 업고 황태후를 비롯한 섭정단을 모조리 잡아 죽임은 물론이요 잠재적인 경쟁자인 마리아 황녀 부부까지 제거해버렸고, 어린 알렉시오스 2세는 당숙과 공동황제가 되어 선임황제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