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婚
remarriage / deuterogamy
1 개요
-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결혼하였다가(초혼) 이후 다른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과 공식으로 다시 결혼 및 혼인을 맺게 된다는 말.
재혼의 사유로는 초혼 때부터 생활했던 배우자의 사망, 상호간의 이혼, 여러가지 사정 등으로 다시 한 번 결혼을 하였다거나 바람둥이 근성과 기질 등으로 초혼자를 버리거나 아예 초혼자와 이혼도 하지 않은채로(왕실상에서는 사실상 후궁맞이나 다름없는 것)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초혼 배우자와의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인해서 재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2 절차
재혼의 절차는 초혼자가 이혼을 하였거나 사망 또는 별거 등으로 동거가 어려워졌을 때 또는 상대방이 새로운 사람과 생활을 하고 싶은 의사가 적극적으로 밝혀지거나 혼인 의사가 진정적인 경우 재혼이 성립되는 편이며 초혼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방 부모 또는 직계가족의 동의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만약 배우자가 이혼이나 사별 등을 하지 않고 아직 배우자 관계로 있는데(즉, 기존 배우자와의 혼인관계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재혼을 해 버리면 중혼(重婚)이 된다. 한국의 경우 일부일처제로, 법적으로도 중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법 제810조)
배우자의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인해 혼인관계가 종료되었을 경우 한국의 경우 예전엔 민법 제811조의 규정에 의해 남자는 바로 재혼할 수 있지만 여자는 혼인관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재혼하려면 혼인관계 종료 후 해산했거나 임신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이는 민법 제정 때 일본의 법을 참고해서 정한 규정으로, 6개월 이내 재혼 후 바로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재산 상속 등의 문제에서 그 자녀를 누구의 자녀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이 규정은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 규정이라는 지적에 의해 사문화가 되어가다가 2005년부터 폐지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남자나 여자나 혼인관계 종료 후 바로 재혼할 수 있다.
본인이 전 배우자와의 자식이 있는 상황에서 재혼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출산하게 되면 그 아이들의 관계는 '이복형제 / 이부형제' 관계가 된다. 또한 당사자 뿐만 아니라 재혼자도 이미 전 배우자와의 자식이 있었고 그들이 모두 가족으로서 같이 살게 된다면 그 아이들의 관계는 (표준어는 아니지만) '의붓형제' 관계가 된다.
본인이 재혼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재혼자와 전 배우자와의 자기 자식은 입양을 하지 않는 이상 법적으로는 서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다. 연장선상에서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등록부에도 단순한 인척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거인으로 기재되거나 기재되지 않는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입양을 하든 하지 않든 자녀의 성씨 변경이 불가능해서, 여성이 전 배우자와의 자식을 데리고 재혼했을 경우 엄마와 아빠 자식의 성이 전부 다른 가족이 되기 때문에 자녀에게 상처가 되는 등 문제가 컸었다. 현재는 법개정으로 (입양과는 별개로) '자녀의 복리를 위한 경우에 한해서' 성씨 변경 신청이 가능하다. 또한 '친양자 입양'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전 부모와의 관계를 지우고 성도 바꾸고 완전히 그 부모의 자식으로 들어갈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혼을 하게 되었을때 이 친양자입양의 파양을 원하는경우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한번 입양 혹은 친양자입양이 성립되는경우 각종서류에 자녀로 기재됨을 물론이고 이혼시 양육비지급의무가 발생되고 최우선상속인으로서의 지위와 최우선부양자로서의 의무가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를 진행하기 전 혹시라도 만약에 재혼한 배우자와의 혼인관계에 변동이 생기더라도 의붓자녀를 마음속에서 끌어앉을수 있을지 충분한 숙고의 시간을 거치고 그 절차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을경우 자기 자신과 그 의붓자녀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길이 될 것이다.
3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여담이지만 자식들에게는 참 미묘해지는 상황이다. 꼭 갈등이 생긴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어렸을 땐 몰라도 다 크고 나서 새아빠나 새엄마가 생기면 이분들을 호부호모해야할지 애매해져서 심히 뻘쭘해진다. 특히 재혼 전부터 아는 사람들이라면... 게다가 정도가 심해지면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스트레스가 되고, 어른의 사정을 이해하기 힘든 아이들 입장에서는 꽤나 큰 심리적/내적 스트레스가 된다. 지속되면 애정결핍 등으로 발전될 수 있으니, 두 부모 모두 가능하다면 사랑으로 보듬어주자.
당연컨대, 새아빠나 새엄마가 생기게 되면 이에 대해 아이들이 반감을 갖게 될 확률이 높다. 한창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새 배우자에게 관심을 빼앗기게 되는 꼴이니, 어떻게 보면 안습. 커가면서 이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 수도 있지만, 어렸을 적에 자신의 부모의 사랑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새아빠 혹은 새엄마를 한평생 증오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게 "증오심을 갖는 정도"로 그치면 별로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심하면 성격장애가 생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식도 아닌 "남"한테 잘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습성은 야생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고양이들의 삶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고양이들은 냄새로 자신의 새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데, 수고양이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다른 수고양이의 냄새를 맡는다면, 임신하고 있는 암고양이의 새끼가 자신의 새끼가 아니라고 판단하고서는 새끼를 죽이려 드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고, 다른 이들의 유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사랑하는 재혼자의 자식일지라도, 결국 일개 "남"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재혼자 앞에서는 잘해주는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심으로 잘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생각해보자. 자기 자식을 사랑해주고 잘해주는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재혼자가 자기 앞에서 자기 자식에게 잘해준다고 하여, 자신이 없을 때에도 잘해줄 거라는 편견은 버려라. 이런 편견 때문에 지금 현재 아동학대를 당하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재혼으로 인해 생긴 대표적인 아동학대 사례는 김보은 양 사건, 우영진 실종사건과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있다. 우영진 실종사건 같은 경우, 계모가 당시 6살 밖에 되지 않은 우영진군을 살해한 후, 직접 방송에 나와서 거짓울음까지 흘리며 실종된 우영진 어린이를 찾고 있다고 한 적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물론 인간은 이성의 존재라 모두 저렇게 험악한 관계는 아니다. 특히 자녀의 연령이 높으면 높을수록 관계는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확률이 높다.
단 피는 물보다 진하다 괜찮아보인다고 방치하면 금세 험악한 관계가 되거나 서로 어색함에 휩싸여 데면데면한 '남' 이 돼 버릴 확률도 높다.[1] 특히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했을 때 재혼할 경우, 가족은 커녕 부모님의 남편/아내 정도로만 인식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명심하자. 재혼자와 당신의 자녀와의 접점은 당신 뿐이다 중간에서의 관계 조율은 꼭 필요한 과정중 하나다.
그리고 前혼인관계해소의 사유가 무엇이든 자녀에게서 친부모의 지위를 부정하는 행태의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 이미 자녀에게는 친부모의 존재가 마음속에 잡혀있는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부정시키고 단절시킨다면 그 자녀는 새로운 가정에 더 어울리지 못하고 반발감이 커지고 커져 갈등의 소지가 될 것이다.
4 여담
고려 시대까지는 과부의 재혼에 별로 제한이나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 과부의 '재혼', 고려시대에는 신경도 안썼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부부간의 정절을 매우 강조해서 재혼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커졌다. 특히 여성은 재가한 뒤의 후손이 영구히 관직에 나갈 수 없도록 하는 등 법적으로 재혼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남성의 경우 법적으로 재혼이 가능했고 실제로 재혼한 사례가 많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한동안 재혼 자체를 꺼린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 것. 심지어 90년대말~200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재혼한 사실이 동네에 퍼지게 되면 '첩년' 이라며 욕을 먹기도 했다.
재혼의 이혼은 초혼의 이혼과 큰 차이가 나지 않으나 삼혼이 되면 갈라서는 경우가 크게 줄어든다 카더라.
5 참고항목
- ↑ 이경우 한 지붕 아래에 산지 몇년이 지났음에도 제대로된 호칭을 정하지 못해 '저기요'라고 몇년이나 부를 가능성도 있다.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모른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