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생년월일 | 1969년 3월 21일 |
국적 | 이란 |
출신지 | 아르다빌 주 아르다빌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92cm |
유소년팀 | 에스테그랄 아르다빌 (1983~1988) |
소속팀 | 에스테그랄 아르다빌 (1988~1989) 타시라니 (1989~1990) 뱅크 테자라트 FC (1990~1994) 페르세폴리스 FC (1994~1996) 알 사드 (1997) 아르메니아 빌레펠트 (1997~1998) FC 바이에른 뮌헨 (1998~1999) 헤르타 BSC(1999~2002) 알 샤밥 (2002~2003) 페르세폴리스 FC (2003~2004) 사바 배터리 FC (2000) 사이파 FC (2006~2007) |
감독 | 사이파 FC (2006~2007)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2008~2009) 페르세폴리스 FC (2009~2011) 라 아한 (2011~2013) 페르세폴리스 FC (2013~2014) |
국가대표 | 149경기, 109골 |
1999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 |||||
나카타 히데토시(페루자 칼치오) | → | 알리 다에이(바이에른 뮌헨/헤르타 BSC) | → | 나와프 알 테미야트(알 힐랄) |
1 개요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막의 여우 사미 알 자베르, 일본의 미우라 카즈요시, 한국의 황선홍과 더불어 90년대 아시아를 4등분하던 대형 스트라이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필두.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 득점왕, 1994년 AFC 아시안컵 예선 득점왕, 1996년 AFC 아시안컵 득점왕 등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려한 기록의 현역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109골로 축구 역사상 역대 A매치 최다 득점자.
2 선수 시절
2.1 클럽
이란 리그를 휩쓸고 28살의 나이인 98년에 분데스리가로 진출해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이란의 선구자격인 선수. 헤르타 베를린에서는 1999~2000시즌에 챔피언스리그 32강전인 1999년 9월 22일에 가진 첼시FC전에서 혼자 2골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에 기여했다. [1]또한 밀란 원정에서도 선제골을 넣으며 1:1 무승부(홈경긴 팀이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서 분데스리가 및 여러 유럽 빅리그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첼시는 지금처럼 돈다발 구단으로 강호가 아니라고 해도 당시에도 유럽 강호급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첼시는 1997/98 시즌에는 2번째 컵위너스 컵 (현재 유로파리그 전신 중 하나)우승 및 UEFA 슈퍼컵 우승까지 차지했다. 1999-2000시즌에는 리그에서 맨유를 5:0으로 이기기도 했으며 그 해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진출(덜미를 잡았던 게 FC 바르셀로나)했던 팀이었다. 반대로 헤르타 베를린은 항목에서 나오듯이 그리 중하위권팀이었다가 이해 알리 다에이 활약으로 오랫만에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2]
#!HTML<iframe width="640"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2xihXRGEMFk"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분데스리가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독일 최고의 명문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기도 했지만, 독일 국가대표 공격수인 얀커에 밀려 주로 교체요원이었다. 유연함과 힘을 갖춘 장신 타겟맨이라는 평가였지만 독일의 주전 공격수인 얀커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2.2 국가대표
국가대항전에서 109골을 넣어 이 부분에서 독보적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역 공격수들이 100골은커녕 70골도 넣을까 말까하니 아마 알리 다에이가 죽을 때까지도 깨지기 어려울 기록이다. 이는 잡대회가 많았던 당시 아시아 특성 및 올림픽에 아직 나이가 제한되기 전에 출전함으로 많은 A매치를 치룰 수 있었고, 아시아 최강급 스트라이커면서도 해외에서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있던 당시 사정, 그리고 약체들이 다수 포진한 아시아 특성 등 제반 조건에서 알리 다에이의 유리함은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때문이다.
96 아시안컵 8강 한국전 한 경기에만 내리 4골을 넣으며 한국을 6-2로 뭉개며 토너먼트에서 탈락시키며 한국인에게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남겼다.
1998 방콕 아시안 게임과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참여해 각각 8골[3],3골을 득점해서 이란의 금메달 획득에 큰 공을 세웠다.
3 지도자 생활
선수 은퇴이후에 축구 지도자를 거쳐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이 와중에 이란 축구계에서 말이 많았다.FIFA 위원이 되면서 이란 축구계에서 상당수 힘을 가지면서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은퇴하기 전에는 후배 공격수들에게 자리를 안내줘 세대교체 실패의 원인이 되었고 은퇴하고 나선 감독이 되어 알리 카리미 같은 에이스들과 불화를 일으켜 성적 하락 원인이 되었다. 더불어 이란축구협회 중요한 요직도 차지해놓고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 스폰서도 알리 다에이가 직접 만든 회사 유니폼을 쓰게 했으며 선수 선발에도 자신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선수들은 철저히 배제했고 다른 이란 축구계 인사들이 한국에도 친숙한 이란계 미국인이자 당시 이란 리그를 제패했던 페르세폴리스 감독이었던 압신 고트비를 감독으로 올리자 자신이 직접 압력을 넣어 고트비를 자르고 감독을 역임했다.
그러나 국대팀이 부진하면서 2009년 국대감독에서 해임당했고 고트비가 국대감독이 되었으며 이 뒤로 이란 국대 축구계에서 퇴출되었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축구팬들 지지가 많아서인지 프로리그에서 여전히 꽤 입지를 다지고 있는 편. 2013년 12월까지 페르세폴리스를 리그 1위로 이끌며 우승 가능성을 보였으나 막판에 역전당해 풀라드에게 승점 2점차로 리그 우승을 넘기며 무관으로 시즌을 끝냈고 감독에서 물러났다.
- ↑ 다만 첼시 원정은 0-2로 설욕패당했다. 첼시는 조 1위,헤르타가 2위로 16강에 올랐으며 갈라타사라이가 3위로 유로파리그 전신인 UEFA컵에 나가 우승까지 차지한다. 반대로 밀란은 4위 꼴지로 탈락했다.
- ↑ 당시만 해도 16강 진출팀은 2차 예선 풀리그를 가져 6경기를 치줘 8강 진출팀을 겨뤘다. 헤르타 베를린은 FC 바르셀로나, FC 포르투, 스파르타 프라하랑 16강 리그예선을 치뤘는데 32강 예선과 달리 최약체인 스파르타에게 1-0,1-1으로 1무 1패를 당했고 바르셀로나와 홈경기를 1-1로 비긴 거 빼고 나머지 3경긴 모두 패해 2무 4패로 꼴지로 탈락했다.
- ↑ 득점 2위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