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타 히데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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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나카타 히데토시 (中田 英寿 / Nakata Hidetoshi)
생년월일1977년 1월 22일
국적일본
출신지야마나시 현 고후 시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175cm
소속팀벨마레 히라츠카(1995~1998)
AC 페루자(1998~2000)
AS 로마(2000~2001)
파르마 FC(2001~2004)
볼로냐 FC 1909(임대)(2004)
ACF 피오렌티나(2004~2006)
볼턴 원더러스 FC(임대)(2005~2006)
국가대표77경기 / 11골
1997~1998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호다다드 아지지(바흐만 FC)나카타 히데토시(쇼난 벨마레)
나카타 히데토시(페루자 칼치오)알리 다에이(바이에른 뮌헨/헤르타 BSC)

1 소개

일본의 명실상부한 레전드.

1990년대 일본의 축구를 대표하던 미우라 카즈요시를 잇는 일본 축구의 상징으로 유명했다. 일본 축구의 축복이라 불리며 한때 일본 축구를 넘어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선수지만[1] 29세에 홀연히 은퇴해 더 큰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포지션은 공격형 중앙미드필더. 전형적인 클래식 10번으로 중앙에서 볼간수도 훌륭하고 시야도 넓어서 전진패스, 스루패스를 쫙쫙 뿌려댔다. 현대 축구의 빌드업부터 마무리패스까지 도맡아 했는데 활동량이 적은 수준은 아니지만 많은 편도 아니라서 중앙에서만 주로 활동했으며 수비가담이 그렇게 좋은편은 아니었다. 그냥 평균수준. 유럽진출전에는 그렇게 피지컬이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는데 유럽진출 후 벌크업하면서 몸빵에서도 딱히 밀리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특히 힘과 별개로 무너지지 않는 신체밸런스가 무척 뛰어났다. 종합하자면 훌륭한 몸빵을 바탕으로 중앙에서 버티고 볼간수를 하면서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패스를 시원시원하게 뿌려주는 공격형미드필더였다. 셋피스도 뛰어나서 일본국대의 셋피스를 도맡아했으며 나중에 오노신지, 나카무라 슌스케 등과 팀 내 최고의 키커를 두고 경쟁하기도 했다. 그 중 오노신지와 누가 프리킥을 찰 것인가 경기중에 가위바위보를 했던 것이 기사화 되기도 했다. 선호 등번호는 8번.

여담으로 이나즈마 일레븐 2에서 나오는 유명한 사기캐릭이자, 애니메이션 3기에서 본격적으로 나오는 히데 나카타는 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 히데 나카타의 모히칸 헤어스타일도 AS 로마때 나카타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따왔다. 한창 잘나갈때에는 위닝일레븐에서도 사기캐였다. 분명 스탯은 그정도가 아닌데 숨겨진 보정치를 쳐덕지덕지 발라서 실제 사용감은 지네딘 지단보다 낫다는 얘기가 나돌정도였다. 그정도로 일본축구계로부터 사랑받은 상징과도 같은 선수.

라이크 라이프에서는 구기대회와 관련해서 언급되기도 했다.(한글 패치판에서는 박지성으로 변경)

2 성장

9살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어린시절 이미 미우라의 뒤를 이을 스타선수의 재능을 보였다. U-17 대표로 93년 U-17 세계대회에 출전했고 95년엔 U-19 세계대회에 출전했다. 두 대회 당시 일본대표의 중심은 언제나 나카타였다는걸 생각하면 전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 95년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그해 벨마레 히라츠카(현재 쇼난 벨마레)를 통해 프로에 데뷔한다. 데뷔시즌을 치른 18살의 나카타는 26경기 8골을 터뜨리며 산뜻한 출발을 한다. 96년 올림픽대표에 합류,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 1차전 브라질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둔 멤버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당시 브라질 멤버가 디다, 카를로스, 주닝요, 파울리스타, 히바우두, 호나우두...지금 이 멤버면 월드컵 우승해도 안 놀란 선수들이다. 일본은 2승1패를 했으나 골득실에 밀려 8강진출에는 실패했다. 97년 5월 한국과의 경기에서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룬다.

3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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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첫 월드컵인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지역예선에 나카타는 맹활약했다. 도쿄대첩으로 회자되는 당시 지역예선에서 일본은 2위를 차지, 직행에는 실패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이란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일본은 3-2 승리를 거두고 본선에 진출했는데 3골 모두 나카타가 어시스트한 골이었다.

그 후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 대표팀은 3전 전패 떡실신 당했지만[2] 나카타는 월드컵 직후 세리에 A에 진출한다.


97년, 98년 AFC 올해의 아시아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98년 여름 세리에 A의 페루자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나카타는 J리그에서 단 4시즌밖에 안뛴 21살의 새내기 선수였으며 아무런 주변 지원 없이 혼자힘으로 나가서 활약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시즌 33경기에 출전해 11골을 놓으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자신의 패션 센스와 현지팬들의 감각이 일치했는데 현지의 반응도 엄청 좋았다고 한다. 이후 팀내 주전선수로 활약, 00/01시즌 세리에A의 명문 클럽 AS 로마의 러브콜을 받게되고 곧 이적하게 된다. 직접적인 AS 로마의 영입 이유는 토티의 대타, 당시 스쿠데토를 노리던 로마의 스쿼드를 생각하면 깜짝 이적인건 사실. 비록 주전/백업을 넘나드는, 현재로 말하면 로테이션 멤버였지만 실력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2001년 5월 6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지고 있던 상황. 토티와 교체된 나카타는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후반 24분 30m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기록했고 경기 종료직전 몬텔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00/01시즌 그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스쿠데토를 차지한다.

AS 로마의 베스트 11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잘못된 정보. 이즈음에 활약한 선수 중 카푸알다이르, 그리고 토티는 베스트 11에 들어가지만 나카타는 토티와 플레잉 타임을 나눠갖는 위치였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01년 일본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에 일조하는 등 국가대표내에서도 팀내 기둥역할을 한다. 01/02시즌 안정적 주전확보를 위해 파르마로 이적하게 되는데 당시 이적료가 1850만 파운드(약 2600만 유로)라는 세리에 최상급 선수 랭크. 당시 멘디에타가 이적료로 5천만 유로를 받는등 7공주 시대로 선수들 몸값이 펑펑뛰었던 때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이슈였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1골 1어시스트로 오노, 야나기사와, 이나모토와 함께 일본의 16강 진출에 기여한다.

4 하락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 나카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02/03시즌 파르마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지만 팀내에서 겉도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04년 볼로냐로 임대, 다음해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되고 얼마 후 볼턴 원더러스로 임대가게 된다. 몰락의 길을 걷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속사정을 살펴보면 파르마 시절 감독과 전술적 견해차로 인해 불화가 있었고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특히, 본인의 베스트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3]가 아닌 윙어로 올라오면서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 결국 점점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갔고 이는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5 은퇴

경기력 저하, 라이벌이자 후배인 나카무라 슌스케의 급성장 등은 나카타의 대표팀 내 입지도 좁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러다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7월 3일. 나카타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은퇴를 선언한다. 나카타의 은퇴 소식은 당시 일본 축구계를 뒤집어 놓았다. 갑작스런 은퇴로 인해 많은 팬들은 금방 다시 복귀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지만 그는 끝내 복귀하지 않았다[4]. 그 후 약 3년간 세계여행을 한 그는 현재 사업가, FIFA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은퇴 후에도 여러 자선 축구 경기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6 인맥

나카타는 인맥이 엄청난 선수로 유명한데 자신과 친한 선수들만 해도 대부분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이다.(예를 들면 루이스 피구,호나우지뉴,파비오 칸나바로,페르난도 이에로등등) 자신이 주최한 자선경기에 초청한 선수들 면면을 봐도 유럽생활을 성공적으로 보냈다는걸 알 수 있다.[5]

7 기타

22살 때 AS 로마로 이적한 후 전 소속구단인 쇼난 벨마레가 2부리그로 강등당하여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직접 벨마레의 스폰서가 되었고[6], 지금까지도 계속 스폰서를 해오고 있다.

홍명보J리그에 진출 했을 때 같이 벨마레에 있었는데 그때 영어책을 항상 끼고 다니면서 해외진출을 준비한 것을 보고 야망이 큰 선수라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칭찬했었다. 여튼 이러한 인연때문에 홍명보와 나카타는 서로 이름을 부를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7]

사실상 아시아 선수들이 '유니폼 판매원'이 된다는 개념을 만들어낸 시조급이다. 페루자 입단당시 일본에서 유니폼이 많이 팔리고[8] 경기마다 일본인이 찾자[9] 이에 고무된 구단 측에서 한국에서 안정환을 입단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작 한국인들이 유니폼도 안팔리고 경기장도 찾지않자 구단에서도 대놓고 안정환에게 한국인들이 왜 유니폼과 경기장을 찾지 않냐고 하기도 했다고.당시기사 물론 나카타가 현재 통용되는 유니폼팔이처럼 실력이 없는데 유니폼만 팔았던 선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래부터 유럽 관광을 잘 가며 즐기던 일본인들이 유럽 리그에 소속된 자국 선수가 활동하자 그 현장에서도 찾아가서 놀라운 구매력을 보여준 덕분에 유럽이 아시아 시장을 다시보게 되었으며 이후 실력이 조금 모자라도 일본선수들은 재정 수입을 바라고 영입하는 경우가 늘어서 덕분에 많은 일본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나모토, 스즈키, 다카하라, 니시자와

나카타는 자국 언론을 싫어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기자들이 자신의 발언을 자극적으로 바꿔서 보도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카타가 '기미가요는 촌스럽다'는 발언을 했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보도로 인해 나카타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우익들의 협박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카타는 아사히의 기사와 달리 기미가요는 촌스럽다고 발언한게 아니라 스포츠 경기 직전에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이었고 현역 시절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적도 없었다. 실제로 월드컵 등에서 그는 다른 일본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기미가요 잘만 불렀다.[10] 또한 일본측에서도 세계레벨의 선수가 등장한 경우는 흔치 않은 경우라 유럽축구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기자들이 에티켓을 몰라 동료선수들에게 무례하게 비칠만한 행동도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훈련 중인 훈련장에 뛰어들어가 다짜고짜 인터뷰를 요청한다거나 사전양해없이 개인시간을 보내고 있는 선수에게 막무가내로 나카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는 둥(...) 창피한 짓을 많이해서 싫어한 점도 있다.

본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왠지 일본에서는 게이라는 의혹을 강하게 받는 선수이다. 구글에 Is Hidetoshi 까지만 입력해도 "Is Hidetoshi Nakata gay?" 가 자동완성되거나, 남자와 함께 사진이 찍혀도 찌라시에 크게 실린다. 아무래도 늦은 나이까지 공개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게이들이 구독하는 잡지에 표지 모델로도 나오는 등 꽤 성소수자에 우호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

이름의 구성방식때문에 재일 논란이 있기도 했었다. 그렇다 히데토시를 우리식으로 독음하면 '영수'가 된다. 헤이 영쑤!

  1.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아시안이 보이면 나카타, 나카타 라고 하던 정도였다.
  2. 떡실신이긴 했지만 좀 과장이다. 3패이긴 했지만 아르헨티나, 크로아티아 상대로 1:0으로 패배했지만 당시 크로아티아는 슈케르, 보반 등 전설들이 활동하던 황금세대였다. 또한 경기내용도 그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서 마지막 경기인 자메이카는 충분히 이길 것이란 전망이었지만 결과는 자메이카조차도 못이기고 심지어 지기까지 하면서 좆망하긴 했지만 2014 브라질월드컵의 아시안팀처럼 개발린 수준은 아니었고 오히려 첫 출전치고는 선전했다고 봐야 한다. 특히 당시 한국은 98월드컵때 멕시코에 3:1로 발리고 네덜란드에 5:0으로 쳐발리면서 "이런 씨발! 일본이 자메이카 이기고 우리보다 먼저 본선 첫승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마저 가졌었다.
  3.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니다. 나카타는 그시절에도 상당히 클래시컬한 플레이메이커였다. 비교 대상이 한국 K리그의 윤정환이나 콜롬비아의 카를로스 발데라마 같은 선수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의 선수가 맨유에서 뛰었을때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4. 일설에 따르면 나카무라 슌스케가 주도한 파벌에게 왕따를 당하면서 국가대표팀에 넌저리를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은퇴는 국가대표 은퇴가 아니라 선수생활 은퇴이다. 이외에도 클럽에서도 서서히 기량이 내리막을 타던 중이었고 특히 06월드컵 예선에서 1무 2패로 탈탈 털리면서 한계를 느끼고 그만뒀다는 카더라도 있다.
  5. 심지어 자신이 주최한 자선경기에 주제 무리뉴 감독을 초청한 적도 있다.
  6. 유니폼 스폰서 계약(자신의 홈페이지 'Nakata.net')과 벨마레 후원회 계약. 전직 선수가 팀 스폰서가 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도 드물고, 일본에선 이 사례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후 J리그와 여자축구 리그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음으로써 대인배 인증.
  7. 일본식 이름 문화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일본에서는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웬만큼 친해지지 않으면 힘든 경우다. 나카타는 홍명보를 '명보상'이라고 부르고 홍명보는 나카타를 '히데'라고 부른다고 한다.
  8. 유니폼 7만장(약 84억원 어치)이 팔렸다고 한다.
  9. 2002 월드컵 당시 피파 월드컵 홈페이지에서 나카타의 소개문에 나카타 덕분에 페루자도 기존의 관광코스였던 로마, 피렌체, 베니스와 더불어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소개했었다. 페루자란 곳이 별볼일 없는 곳은 결코 아니지만 이탈리아의 다른 명소들에 비하면 이름값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할 수 없는 건 사실인데 이런 조그만 동네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대거 찾으니 구단과 주민들 입장에선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10. 아사히 신문의 나카타 기미가요 발언 왜곡 보도는 일본에서도 전형적인 날조 왜곡 보도의 표본으로 취급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