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에 꼽히는 역대급 경기[1]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흑역사로 꼽히는 경기 중에서 역대급으로 꼽히는 경기다. 어쩌면 다시는 재현되어서는 안 될 경기 이자 동시에 한국 축구 팬들에게는 영영 잊지못하게 만든 최악의 경기다.
사실,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한국이 이란을 5-0으로 이긴 적도 있었다. 참고로 이 기록은 이란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 중의 하나이다. (1950년 터키 친선경기에서 당한 1-6 대패도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올드팬들과 다른 축구팬들에게도 회자되는 참사로 기억되는 이란 쇼크는 아시안컵과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던 한국 축구에게는 커다란 충공깽을 시전하였고 동시에 다가올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참사여서 말들이 많은 경기 이지만.. 이보다 더한 참사를 맞이한걸 생각한다면 이 참사도 어느정도는 약과로 볼듯 싶다.
1 개요
1996년, 대표팀은 아시안컵이 열리는 개최국 아랍 에미리트에 도착해 아시안컵 준비에 나섰다. 당시 감독은 박종환 감독 일명 빠따박 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짜여진 대표팀 선수들은 대체적으로 K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인 선수들이어서 기대감을 더했다. 특히 선수들 상당수는 2년전에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에 까지 나설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고 여기에 그라운드의 여우 라는 별명을 가진 신태용과 노상래, 김도훈 등도 합류하면서 공격진에 힘을 실어주었다.
조 편성도 아주 좋았다. 중동팀 이라는 껄끄러운 점도 있지만 그래도 한수 아래의 실력을 갖춘 개최국 아랍 에미리트와 쿠웨이트가 있었고 최약체로 평가받는 인도네시아라 쓰고 승점자판기라 읽는다까지 포함되어서 우리로써는 조 1위도 무난 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젹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는 달리 대표팀은 오히려 부진한 모습을 선보이며 대회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우선 첫 경기이자 대회 개막전 이었던 아랍 에미리트전[2] 에서는 전반 9분만에 황선홍이 선제골을 터트려 앞서가는듯 했지만 전반 40분 경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어 열린 최약체 인도네시아와의 경기[3]에서는 김도훈과 황선홍[4], 고정운의 릴레이 골에 힘입어서 4-2로 대파해 자존심을 세웠지만 이미 2승을 챙긴 아랍 에미리트에 뒤지며 조 1위 탈환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운명의 3차전에서 모든것을 걸어야 했던 대표팀은 쿠웨이트를 맞이해서 나섰지만...
오히려... 0-2로 패하는 굴욕을 맛봤다. 그리고 이 패배의 영향으로 대표팀은 1승1무1패의 성적으로 조 3위로 추락 하였고 쉽게 넘어갈 것이라던 8강 진출은 커녕 오히려 조3위 팀에게만 주어지는 진출권 제도에 눈여겨 보는 상황이 되면서 위기감을 고조시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운건지 아니면 대표팀은 극적으로 말로는 극적이지만 현실은 운빨 8강행 티켓을 따내는데 성공하며 8강진출을 이뤘는데 앞에서 나온 극적이라는 말이 왜 나왔냐에 대해 다소 어리둥절 하겠지만 그 과정을 본다면 어느정도는 이해가 될 것이다.
순위 | 국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1 | 30px | 이라크 | 3 | 2 | 0 | 1 | 6 | 3 | +3 | 6 |
2 | 30px | 대한민국 | 3 | 1 | 1 | 1 | 5 | 5 | 0 | 4 |
3 | 30px | 시리아 [5] | 3 | 1 | 0 | 2 | 3 | 6 | -3 | 3 |
당초 대표팀의 8강행은 거의 기적 그자체 였다고 볼 수 있었다. 자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조1,2위 자리를 탈환하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조3위 팀들중 2팀에게만 주어지는 것에 집중하였지만, 골득실차가 0[6]에 불과해 유리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표에 나온대로 진출권을 놓고 경쟁하였던 팀이 이라크와 시리아였고 그 가운데 이라크가 2승1패, 승점 6, 6득점 3실점[7]을 기록해 진출권 경쟁에서 1위를 차지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3위를 차지한 시리아의 골득실차가 -3으로 된것이 우리에게는 행운중에 행운이었고 그 영향을 받은 우리로써도 진출권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리면서 8강행 막차에 합류하게 된다. [8]
하지만, 바로 앞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보여준 실력과 새로운 선수들로 구성된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무난한 8강행을 이루지 못한 것도 모자라서 조3위 결정전에서까지 아슬아슬하게 진출 한 것을 본다면 차라리 탈락해서 다시 재정비 하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대표팀의 체면은 이로 말할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쯤되면 빠따 박의 지도력이 얼마나 한계인지를 보여준 듯하다.[9]
그리고 이 모습은 곧 펼쳐지는 충격적인 대참사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데...
2 운명의 12월 16일, 그리고.. 대.참.사
아 씨바 할말을 잃었습니다망했어요
그렇습니다, 대표팀은 망했습니다
본격 뒷목잡기 시전 경기
빠따 박의 운명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틀렸어 이제 아시안컵이고 뭐고 없어
12월 16일, 어렵게 8강전에 오른 대표팀은 중동의 강호 이란[10]과 8강전에서 맞붙는다. 그리고 대표팀은 이란에게 탈탈 털리는 대 굴욕을 맞이하게 된다.
일단 시작부터 우리나라는 이란에게 탈탈 털린 것은 아니었다. 전반전 부터 조별예선에서 보였던 부진한 경기력을 만회하고자 노력하였던 대표팀은 전반 11분만에 김도훈이 선제골을 터트리며 앞서갔다. 그러자 이란도 31분에 바게리가 동점골을 터트려 승부의 균형을 맞추었지만 4분뒤에 신태용이 역전골을 터트리면서 전반전을 2-1로 앞선채 마쳤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경기력에서나 내용면에서도 좋았고 대재앙이 올것이라는 징조도 없이 잘 나갈 정도로 경기에서 이란을 압도하는듯 보였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급 달라졌다고 하는거 자체가 말이 안될 정도로 경기 양상이 이란쪽으로 쏠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후반 51분... 아지지가 동점골을 터트리면서 대 참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66분에는 알리 다에이가 역전골을 터트려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하였고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한 다에이는 내리 3골(76,83,89[11])을 성공시켜 순식간에 점수차를 4점차로 벌려 놓았다. 순삭도 모자라 완전히 학살해주시는 다에이 형님 (Feat. 박종환) 다에이의 만루 홈런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대표팀은 이란에게 거의 개처럼 끌려다닌채 경기를 해야했고 지켜보던 코칭 스테프들도 박종환 박빠따 감독도 할말을 잃은채 경기를 봐야 했다. 그리고 경기 결과는 예상대로(?) 2-6 이라는 처참한 스코어와 함께 끝이 났고 끝이 나자마자 한국 축구는 환호에 잠긴 이란의 모습과 대비된채 아랍 에미리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미래도 뭐도 없어요
3 경기 이후...
졸전끝에 겪은 대패를 그것도 아시안컵에서 겪게 되자 국내 팬들은 일제히 대표팀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특히 감독인 박종환 감독을 향한 비난은 더더욱 거셌다. 그동안 한국 축구를 빛냈던 감독이자 19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12] 4강 신화를 작성한 점과 K리그에서 보여준 지도력이 한 경기에서 완전히 무너진 것은 물론 성장은 커녕 제대로 된 모습 조차 보이지 못한 졸전을 펼친 감독이라는 점 때문에 팬들의 원성은 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박종환 감독은 이같은 책임을 근거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반전에 미쳐 날뛰었던 이란 선수들을 걸어다니면서 막은 것이 논란이 되어 집중포화 식으로 강도높은 비난을 퍼부었고 특히 태업 논란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면서 대패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물론 태업이 있었는지 여부는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당시에 뛰었던 선수들과 감독인 박종환 감독 모두가 여전히 이 논란이 있었는지 여부에 말을 하지 않았고 사실상 의혹만 있을뿐 실질적인 증거나 다른 여러가지 말들이 나오지 않아서 아시안컵에서 있었던 태업 논란은 단순한 썰에 불과한 것으로 현재까지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선수들과 잦은 충돌을 부르게 만든 박종환 감독의 지도 방식을 놓고 본다면 논란이 크게 번질 소지를 나타내준 예시가 된 만큼 이 경기가 낳은 태업 논란은 대회가 치뤄진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야기를 낳게 하고 있다.
사실 오래전부터 박종환 감독의 지도방식과 논란은 대회 전부터 말들이 많았었다. 선수들에게 강압적으로 나온 것은 기본이고 못하면 욕설과 폭행까지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며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대로 최악의 감독으로 부르던 인물이었다. 실제로 1984 LA 올림픽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당시, 대표팀의 핵심 선수들(최순호,최인영,이태호,변병주.박경훈)이 무단으로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다른 선수들도 아닌 핵심 선수들이 무단이탈을 감행했다는 사건은 조금씩 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4강으로 탄력받은 축구협회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다주었고 대중들에게도 많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면서 박종환 감독에 대한 평가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물론, 축구협회에서는 후속조치로 무단이탈한 선수들에게 3년 출전 정지 징계를 주었지만 이미 대중들 사이에서는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소통조차 안되는 감독 이라는 인식이 자리잡히면서 논란의 시발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지만 태업 논란과 상관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었던 한국 축구가 아시아 무대에서 무참히 깨지고 돌아온 모습과 다가올 2002년 한일 월드컵과 바로 코앞으로 온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본다면 이번 대패가 낳은 문제점은 대표팀의 불투명한 미래를 판가름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되어서 성장세를 보이려 했던 한국 축구에게 커다란 위기를 부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기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드러난 마르세유의 치욕으로 재현되며 한국 축구는 위기의 수렁에 빠지는 시련을 겪게 된다.
4 축구협회의 병크?!
하지만 태업 논란 외에도 또다른 요인이 있다. 바로 축구협회의 어마무시한 병크짓이다.
그 시발점으로 자리잡은것이 바로 전임 감독에 대한 축구협회의 안일한 자세, 지금이야 전임 감독이 떠나면 후임 감독을 빨리 뽑아 대표팀을 이루게 만들지만 당시에는 대회가 끝나면 전임감독도 끝난다는 인식이 너무나 강해서 감독직은 오랫동안 공석인 채로 갔었다. 어느정도 였냐면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지휘하였던 김호 감독이 물러난 이후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을 선임하며 새로운 준비에 나서는듯 보였다. 하지만 비쇼베츠 감독이 물러난 1995년 2월 26일 이후 대표팀은 무려 2달동안 대표팀 감독을 임명하지 못하였고 2달뒤에 박종환 감독을 다시 불렀지만 역시나 1~2경기 식에 불과한 초단기직이어서 장기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에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실제로 95년 한해동안 대표팀은 박종환을 시작으로 허정무[13], 정병탁, 고재욱을 임명해 초단기 감독직 수행에 나섰고 다시 말하지만 몇년동안 릴레이로 맡은게 아니라 95년 한해에 맡은 감독 들이다 그덕분에 선수들은 완전히 자리잡혀야 하는 전술운영과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 지경에 이르면서 대표팀은 겉만 대표팀이지 속은 엉성함 그자체인 팀으로 전락한채로 아시안컵에 나서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을 대회가 치뤄지기 10개월전인 2월달에 다시 불러들여 늦게 임명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그것도 모자라 대표팀 소집을 리그가 완전히 다 끝난 이후에 소집하여서 준비 기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무슨 아시안컵 우승이 냉장고를 부탁해 처럼 뚝딱 이뤄지나... ㅂㄷㅂㄷ
물론 유럽처럼 시즌 다 끝나고 소집해서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였지만.. 완전히 초 단기적인 감독들을 뽑아다가 활용하는 모습과 장기적인 플랜은 커녕 대회가 임박하면 바로바로 뽑는 자세를 선보인 상황에서 소집한 것이야 말로 기본적인 자세를 다듬는데에 완전한 실패를 거두었고 동시에 시즌이 끝나자마자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체력 문제에도 소홀함을 드러내면서 진정한 병크의 향연을 보여주었다.[14][15]
이로 인해, 축구협회는 참사 후 펼쳐진 언론들의 비판 기사에 욕이란 욕은 다 먹었고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16]까지 받았지만 정작 감독을 교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들이 없어지면서 유야무야하게 넘어갔다. 만약 여기서 완전히 바꾸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크게 이상은 없겠지만.. 그런것도 없이 나온걸 생각한다면 이 경기를 단순한 축구 참사로 보기에는 어려울 듯 싶다.
5 결론
대패를 겪은 후 축구협회는 1997년 1월 7일, 박종환 감독의 후임으로 차범근 감독을 새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새로 선임된 차범근 감독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참가해 보란듯이 대표팀을 8전 6승1무1패 승점 19점 19득점 7실점 골득실+12 라는 엄청난 성적을 내게 만들며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본선 진출 확정과 더불어서 나타난 16강행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분위기 덕에 이란전 대패는 완전히 묻혀지는 수준으로 가나 했지만...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멕시코와 네덜란드에게 각각 1-3, 0-5[17]로 패배한데 이어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 전에서 1-1 무승부 한 것으로 마무리 되면서 또다시 16강 진출의 꿈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대회 기간에 나온 네덜란드전 대패는 묻혀질려 했던 이란전 대패를 다시 끄집어내는 영향을 주었고 부활해서 승천할 기세 지금까지도 축구 팬들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잊지 못하는 최악의 경기로 기록되게 되었다. 동영상만 봐도 혀를 끌끌찰 지경인데 당시 심정은 오죽했을까... ㄷㄷㄷ[18]
물론.. 18년 뒤에 펼쳐진 또 하나의 흑역사가 탄생되면서 잠시 잊혀졌지만 말이다..
한편, 논란의 중심이 된 박종환 감독은 후에 성남 FC의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성적은 부진의 끝을 달리다가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선수들을 폭행하다가 개망신을 당하면서 자진사임을 빙자한 행동으로 불명예 퇴진을 당한다.
6 여담
이란은 이 대승을 자랑스러워하며 한국전에서 이란 관중들이 6:2 라고 당당하게 약올리는 걸개를 자주 건다. 이란 기자들도 이런 말을 하다가 한국 기자에게 늬들은 한국에게 0-5로 진 적도 있는데 뭘? 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고 하다가 1958년 일이라는 대답에 대체 언제적 일이기에 그걸 아직도 들이대느냐? 라고 하다가 그럼 1988년 아시안컵 예선이나 1994 미국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에게 0-3으로 진건? 라는 한국 기자 말에는 잠깐 멍때리다가 그래도 우리가 나중에 1골더 넣었다는 듯 정신승리를 이야기했다. 더불어 이 이야기를 주고받던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 8강전에서는 한국이 1-0으로 이겼었다.
이후 이란과 한국은 1~2골차 승패를 주고 받거나 비기면서 2016년까지 역대성적 9승 7무 12패를 기록하며 이란이 더 앞서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 한국이 1승 4패를 기록하고 있다.(5경기 모두 1-0으로 경기를 끝냈다).
7 관련 항목
- ↑ 대패를 당한 경기 기준에서는 마르세유의 치욕과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알제리전 2-4 패배와 함께 거론되는 경기
- ↑ 12월 4일에 킥오프
- ↑ 12월 7일에 킥오프
- ↑ 2골
- ↑ 2위까지 진출권 획득, 3위인 시리아는 탈락
- ↑ 5득점 5실점
- ↑ 이때 이라크는 2년전 일본의 첫 월드컵 진출을 가로 막을 정도로 의외로 무서운 팀이었다. 자세한건 도하의 기적 참고
- ↑ 여기서 이라크가 왜 2승1패 인데도 조3위를 차지했냐 라는 의문이 드는데 그도 그럴것이 이라크는 이란-사우디아라비아-태국과 함께 죽음의 B조에 속한 팀이었고 3전전패로 광탈한 태국을 제외한 나머지 두팀과 함께 2승1패, 실점도 똑같이 3실점을 기록하며 만만치 않은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7득점을 한것에 비해 이라크는 딱 1골이 모자른 6득점을 기록해 조 3위로 내려 앉게 되었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진출권을 놓고 막판까지 경쟁하게 되었다.
조 운이 지지리 없는 것 뿐이지 실제로는 무난한 8강행 - ↑ 그도 그럴것이 지금이야 선수들의 기량을 필두로 다양한 전술 운영과 시스템 확충 등이 나타나는 모습이지만 90년대 당시 한국 축구의 지도자들은 선수들이 체력과 정신력이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체력 훈련에 소홀히 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 예선에서 한수 아래의 팀들을 꺾고 올라온 우리로써는 상대적으로 실력과 체격면에서 월등한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등의 팀들에게 밀리게 되었고 이러한 양상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줄곧 이어진 추세였다. 물론 박종환 감독이야 말로 국내에서도 녹록치 않은 지도력을 뽐내준 것은 인정되지만 세계 축구 흐름과 비교한다면 어렴풋이 비교가 되는 지도력을 보였으니 뭐라 할말이 없다는 점은 어쩔수 없는 사실인 듯 하다.
- ↑ 1968년, 1972년, 1976년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최강팀, 지난 대회였던 1992년 대회에서는 조별예선 탈락
- ↑ PK골
- ↑ 지금은 청소년 월드컵으로 바뀜
- ↑ 이때 허정무는 포항 제철 감독직을 하다가 대표팀 감독직을 하게 되었다
라고 쓰고 납치라고 읽는다 - ↑ 자세한 기록 확인은 '대표팀의 역대 감독과 수석코치' 자료 참고
- ↑ 진짜 정신차리고 전임감독제 했더라면 2002년 월드컵때 경험한 첫승은 물론 2010년 월드컵에서 느낀 원정 첫 16강도 앞당겨 졌을지도 모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정신 차렸다는 기준에서 말한거니 그저 씁쓸할 따름...
- ↑ 또다른 문제점으로는 선수들의 승리 수당과 출전수당이 지나치게 적다는 의견이었는데 당시 보도에 따르면 선수들은 고작 3만 3천원의 수당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기사
- ↑ 마르세유의 치욕
- ↑ 일부 썰에서는 이란인과 축구 얘기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이야기라 할 정도라는데.. 맞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그 기분은 마치 이탈리아 인이 2002년 한일월드컵 우리나라와의 16강전 이야기를 듣는 꼴과 비슷한 것이니 어느정도인지는 대충은 파악 될 것이다.
물론 이것도 경험해봐야 아는 법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