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

?width=120 (클럽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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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겸
(강원 FC)
남기일
(광주 FC)
손현준
(대구 FC)
김태완
(상주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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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FC 서울)
서정원
(수원 삼성 블루윙즈)
김도훈
(울산 현대)
이기형
(인천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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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래
(전남 드래곤즈)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조성환
(제주 유나이티드)
최순호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감독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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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감독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원 안의 사진은 선수 시절의 모습. 잘 보면 황선홍 감독 주변으로 조광래, 박성화, 홍명보의 얼굴도 보인다.

J리그 1999년 득점왕 시절 동영상

FC 서울 감독
황선홍 (黃善洪 / Hwang Sun-Hong)
생년월일1968년 7월 14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충청남도 예산군
가족관계아내, 슬하 2남 1녀[1]
신체 조건184cm, 80kg
포지션스트라이커
유스팀건국대학교 (1987~1990)
소속팀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아마추어 (1991)
부퍼탈 SV 보루시아 (1992)
포항 스틸러스 (1993~1998)
세레소 오사카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2002)
가시와 레이솔 (임대) (2000~2002)
전남 드래곤즈 (2002~2003)
지도자전남 드래곤즈 코치 (2003~2006)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08~2010)
포항 스틸러스 감독 (2011~2015)
FC 서울(2016.6~)
국가대표103경기 50골
부산 아이파크 역대 감독
박성화
(2007)
황선홍
(2008~2010)
안익수
(2011~2012)
포항 스틸러스 역대 감독
박창현(대행)
(2010)
황선홍
(2011~2015)
최진철
(2016~)
FC 서울 역대 감독
최용수
(2012~2016)[2]
황선홍
(2016~)[3]
-
2013년 K리그 클래식 감독상
최용수(FC 서울)황선홍(포항 스틸러스)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199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황선홍
FW
노상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김현석
MF
김판근
MF
아미르
DF
최영일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홍명보
DF
박경훈
GK
신의손

1 소개

황새.

한국 국가대표 정통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레전드.
한국인 최초이자 마지막 외국리그 득점왕
선수 시절에서는 K리그 포항 스틸러스(1993~1997), J리그 세레소 오사카(1998~1999) 등에서 활약했으며 선수생활 은퇴 후에는 해설자,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거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친정 팀인 포항 스틸러스에서 감독직을 수행했었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 2016년 6월 부터는 장쑤 쑤닝으로 떠난 최용수 감독의 뒤를 이어 FC 서울의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으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 별명은 황새[4]. 슬라이딩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이 유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 그리고 20세기 스포츠 역사상, 어쩌면 단군 이래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비운의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 라는 속설을 박살낸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났다.

등번호 18번. A매치 103경기 50골.(역대 득점 순위 2위, 1위는 차범근)
선수생활 25년, 대표팀 경력 14년.
그 가운데 대수술 3회, 부상기간이 3년.
02년 6월 4일. 월드컵 폴란드전 골. 이탈리아전에서 센츄리 클럽 가입
03년 2월 9일.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은퇴 선언.
07년 ~ 10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0.11.08 ~2015 포항 스틸러스 감독.
2016.6.23~ FC 서울 감독

90년 월드컵 지역예선 득점왕 6경기 7골
94년 아시안게임 득점왕 11골
94년 아시아축구연맹선정 득점왕 A매치 16골
95년 K리그 8게임 연속 득점[5]
99년 J리그 득점왕 24골 8어시스트
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슈 2골[6]

대한민국 최초 전대륙 상대 A매치 득점 성공.[7]

아래는 지도자로서의 업적

K리그 우승 1회 (2013)[8]
K리그 3위 3회 (2011, 2012, 2015)
대한축구협회FA컵 우승 2회 (2012, 2013)
대한축구협회FA컵 준우승 1회 (2010)
2013 K리그 클래식 감독상 수상

K리그에 40대 감독 열풍을 불러온 60년대 후반~70년대 중반 태생 감독들 중에선 최용수 감독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꾸려가고 있다.

2 선수 시절

황선홍/선수 경력 문서로.

3 지도자 시절

황선홍/지도자 경력 문서로.

4 지식채널e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 편

"나는 '한 골'이 절실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정말,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전 다시 한국에 가야합니다.
난...한국 가야 돼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식을 다 바꾸고 은퇴하려고요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 1999년 스포츠 전문 웹진 "후추닷컴" 일본 오사카 인터뷰 -

나는 모든 선수들에게 애착이 있지만
황선홍에게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는 팀의 베스트로서 항상 혼자 아픔을
뒤집어썼다.

프랑스에 5대 0으로 대패하던 날 그는
내 숙소에 찾아와 밤을 새워 울었다.

조금 더 일찍 좋은 팀에서 체력과
개인 스피드를 연습했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 거스 히딩크 -

골 하나가 너무나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여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 전 국가대표 황선홍 -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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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쌍팔년도 스포츠 만화 주인공 같은 수련을 한 적이 있다.(...)

아내인 정지원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이중 맏이이자 장녀인 황현진 양이 '이겨'라는 이름으로 걸그룹 예아(Ye-A)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아내와 함께 거세게 반대를 했는데 본인이 대중들에게 안좋게 노출되었던지라(위 문단 참조) 그런 상황에서 비난이나 악플을 견딜수 있을까 해서 걱정이 되어서였다고. 하지만 황현진 양이 "이 일을 해보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후회할 것 같다"고 말했고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9] 한편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 합격하여 1학기를 재학한 후 활동을 이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소속사(신후이엔터)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아 활동을 완전히 접은 듯 하다.

둘째이자 장남인 황재훈 군은 아버지를 따라 축구선수가 되었고 선수생활을 했었지만 안타깝게도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을 입고 황선홍 본인이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 본인이 당해봤던 부상이라 재활과정 등을 잘 아는지라 그만두게 했다고.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편부 가정에서 성장했다(아버지 작고). 형제로는 형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는데 공교롭게도 형의 이름이 황선수 씨다.황 선수의 형 황선수 / 황선수의 아우 황 선수 사업을 하고 있고 민간봉사단체를 운영하기도 해서 다음 인물검색에도 등재되어 있는 분. 황선홍의 결혼 당시 웨딩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결혼식을 거의 도맡아 준비해 줬다고. 여동생 황선경 씨는 가정주부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공식 게임인 2002년 피파 월드컵에서는 팀 내 유일하게 7성 능력치를 가지고 있던 선수. 7성 선수들은 뛸때 잔상이 생긴다거나 태클이 진공청소기라거나 하는 특수능력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황선홍은 슈팅이 7성이었다. 슈팅이 7성이면 이 게임은 불꽃슛이 나간다(...) 덕택에 전원수비로 틀어막다가 황선홍으로 하프라인 조금 더 가서 슈팅 때리는 플레이 때문에 해당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은 다크호스로 꼽히기도.
  1. 큰딸 황현진은 2014년 아이돌그룹 예아에 데뷔했다
  2. 2016년 6월 22일 사임
  3. 2016년 6월 27일 취임
  4. 성이 황씨라서 황새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가난하던 어린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를 체워 뒤뚱거리던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황새라고 별명을 붙인 슬픈 사연이 있다.
  5. 김도훈이 타이 기록을 세우긴 했으나,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여담으로 이 때 황선홍은 연속골에 실패한 9번째 경기까지 계속해서 같은 축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징크스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축구화는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6. 이때 호주전에서 넣은 골이 컨페더레이션스컵 역대 최고의 골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1] 참고로 어시스트한 선수는 박지성
  7. 1988.12.6 일본(아시아), 1989.8.13 미국(북아메리카), 1990.2.4 노르웨이(유럽), 1994.2.26 콜롬비아(남아메리카), 1994.5.3 카메룬(아프리카)를 상대로 득점. 그리고 2001.6.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오세아니아)에게 득점하여, 전대륙 상대 대한민국 최초 득점에 성공. 참고로 박주영(2011), 이동국(2014)도 전 대륙 상대 득점자다.
  8. 같은 해에 FA컵 우승까지 이루면서 K리그 최초의 더블우승(리그 우승 +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것도 외국인 용병 하나 없이 국내 선수만으로 이룩한 업적
  9. 덧붙여 황선홍은 딸의 활동에 일체 비호및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만약 포항 프런트가 포항 홈경기에 자신의 딸이 소속된 걸그룹을 초청한다 해도 본인이 불허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