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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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 Mucha (1860 ~ 1939)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화가.

세기말의 보헤미안.

아르누보의 태동기부터 쇠퇴기까지 수많은 작품과 디자인을 선보인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 화가이다.

모라비아의 이반지체에서 출생.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며,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다. 성가대로 뽑혀 브르노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으로 상경해 무대 배경을 그리는 등의 일을 하다 모리비아로 귀향해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카를 쿠헨 백작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으로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된다.

이후 파리로 가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리며 생활했는데, 우연한 계기로 유명 배우 사라 베르나르[1]의 연극인 지스몽다Gismonda의 광고용 포스터를 만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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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하나로 당대 최고의 배우와 6년 계약을 맺게 된다.

이후 각종 포스터와 사계 등의 작품을 제작했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난 이후로는 조각도 제작하였다. 이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서,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컨셉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 까지 출판할 정도였다. 본인은 밑천 다 퍼줄 테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태도였지만, 이를 통해 무하의 디자인이 더 알려지는 역효과를 초래해 더욱 요구가 쇄도했다고(...).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체코를 대표하는 애국자,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체코 독립에 있어 열성적이었으며, 독립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 화폐 디자인을 손수 하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슬라브 서사시>라는 이름의 연작을 제작했다. 이로 인해 1939년 프라하가 독일에 점령된 이후 불온인물로 찍혀 자주 검문받았고, 이로 인해 얻은 폐렴으로 사망하게 된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그는 프리메이슨 활동에 가담하여 나중에는 체코지부 그랜드마스터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의 후반부 화풍에 그 영향이 내비치기도 한다.

그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인물(주로 여성)과 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로 구성되며, 상업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석판화가 많다. [2] 이러한 특징은 초기의 연극 포스터부터 말기의 작품들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초기 아르누보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무하의 감각적인 화풍은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는 지나치게 민족적인 구형 예술이라며 프라하 미술계에서 무시당하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이후에는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부터 무하의 작품들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 현대에서 명성을 되찾았다. 도리어 현대에는 일반인에게는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추상, 행위예술 등)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좋다.

오덕계에서는 현대의 만화 그림체, 특히 미소녀 그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의 유명 순정 만화가인 아소 미코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도 무하 특유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오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아담 휴즈, 야마다 아키히로

관련 항목 : 아르누보
  1. 19세기를 풍미했던 대 배우로, 연기 뿐만 아니라 보불전쟁 시의 사회적 공헌으로도 유명하다. 햄릿 연기로 '여신 사라'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뢰종 도네르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사고로 인해 다리를 자르게 된 후에도 극작가들이 그녀를 위한 각본을 제작해 주었다.
  2. 후기에는 유화도 상당히 그렸다. 대표적으로 슬라브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