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内一豊(やまうち かずとよ 또는 やまのうち かずとよ[1])
짜리몽땅
목차
1 소개
1545년 혹은 1546년 ~ 1605년 11월 1일.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아내의 내조 덕분에 출세한 남편으로 잘 알려져있다. 토사번 야마우치 가문의 초대 당주.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중신이었던 야마우치 모리토요의 삼남.
2 히데요시 이전
오와리 국(尾張国)의 하구리 군 쿠로다에 있는 야마우치 가문의 성이었던 구로다 성에서 출상했다. 야마우치 가문은 대대로 이와쿠라 오다 가문을 섬기는 중신이었다. 카즈토요의 아버지인 모리토요는 그 가문의 중신격 되는 인물이었으나, 이와쿠라 오다 일족이 동족인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적했기 때문에 카즈토요의 가문 역시 이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카즈토요의 형인 주로는 1557년에 구로다성에 있다가 습격당해 전사당하였고, 1559년에는 모시던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거성이었던 이와쿠라 성이 함락당했기 때문에, 모리토요도 죽음을 맞게 된다. 이렇게 카즈토요는 아버지도, 형도 잃은 채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카즈토요 본인은 처음에 가리야스카 성의 성주인 아자이 신파치로 등을 섬겼으나, 1568년 경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키노시타 히데요시의 요리키[2]가 되었다.
3 히데요시 휘하
1570년 9월에 있었던 아네가와 전투에서 첫 출진을 시작하여, 1573년 8월 아사쿠라 가문과의 도네사카의 전투에서도 참가해 얼굴에 중상을 입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적장 미타자키 칸에몬을 죽이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찌질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다. 이 때 카즈토요의 뺨에 박혔다고 전해지는 화살은 이 때 화살을 뽑았던 가신인 고토 타메키요의 자손이 대대로 물려받게 되었다.[3]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한부인인 치요와의 결혼은 1573년 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내조에 대한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즈치성 완공 후에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열었는데, 명마가 있음에도 너무 비싸서 다들 아쉬워하는 가운데 양부모가 남겨준 금을 쓰지 않고 두었다가 이 때 말을 사서 카즈토요가 돋보이게 해 줬다고 한다. 이런 내조로 오히려 남편보다 유명해서 카즈토요의 별명은 치요의 남편[4][5] (...)
한편,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카즈토요는 오우미 국에서 400석[6]을 받게 된다. 이 때, 히데요시가 자신 직속의 가신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인지[7]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게 된다. 이후 1577년에는 하리마 국을 중심으로 약 2000석을 영유하게 된다. 그 후에도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에도 참여해, 하리마의 미키 성을 둘러싼 합전이나 이나바의 돗토리 성을 함락시키는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목숨을 잃은 뒤에도 카즈토요는 계속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1583년에 벌어진 시즈카타케 전투에서도 역시 공적을 세웠으며, 다음 해 12월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위하기 위한 지성 건축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가 되어 1585년에는 다카하마 성, 나가하마 성 등의 성주가 되어 2만 석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텐쇼 대지진으로 인해 외동딸이었던 요네히메를 잃게 된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종 5위인 쓰시마노카미에 임명받는다. 또한, 1590년에 있었던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하여 야마나카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도토미 국의 카게가와성과 5만 1000석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8]
임진왜란 때에는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격이었기 때문에 출병을 면할 수 있었으나, 군선을 제조하는 데나 후시미 성의 보수 등을 담당하였다. 1595년,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처형되게 되었으나 카즈토요가 모반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할복은 면할 수 있었다. 이 때, 8000석을 다시 가증받게 된다.줄 잘못타서 짤리고 민형사 고소당할 뻔 했는데 오히려 월급 인상받은?
4 히데요시 사후
1600년 고다이로 중 한 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정벌에 나섰다. 그 후, 이시다 미츠나리가 반 도쿠가와의 기치를 들게 되자 곧바로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9]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전투 전의 물밑작업공적을 인정받아 시코쿠의 토사 국 9만 8천석[10] 받고 옮겨 살게 된다. 그러나 전 영주였던 쵸소카베 모리치카 가문을 섬겼던 가신들에게 강한 반발을 받아, 카즈토요는 암살당할 것이 두려워 5명 정도의 카게무샤와 행동을 같이하여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토사 번의 무사들은 죠시(上士)와 카시(下士)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죠시는 상급무사, 카시는 하급무사로 카즈토요를 따라 토사에 들어온 후다이 가신들은 죠시, 구 쵸소카베 가문 출신의 가신들은 카시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두 계급 모두 무사였이지만 계급 차이가 심해 카시들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막말 시기 활동했던 토사번사 들인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죠시(上士), 토사근왕당(土佐勤王党)을 이끌었던 타케치 한페이타, 삿쵸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 한페이타의 명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오카다 이조 등은 카시(下士)였다.
식중독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가다랑어를 회로 먹지 말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일종의 꼼수로 가다랑어를 겉껍질만 살짝 굽고는 "날것이 아니라 구운거니 괜찮음!"이라고 우기며 생생한 속살을 회로 먹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쓰오 타다키(가다랑어 겉구이)가 되었다.
부인 치요와의 사이에는 친자식으로는 아들없이 고명딸 요네가 있었으나, 텐쇼 대지진때 죽었고 나중에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여 키우다가 카즈토요의 명으로 집을 나와 출가를 했다(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야마우치 가문 가신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가신에게 시집간 양녀도 한명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야마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친동생인 야마우치 야스토요의 장남 야마우치 타다요시를 데려와 양자로 삼고 가독을 잇게 했다.
5 대중문화에서
5.1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야마우치 카즈토요
2006년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사실 페이크 주인공이라 카더라. 진 주인공은 당연히 부인인 치요
일본 사극[11]답게 주인공인 카즈토요에 대한 미화가 심하게 나온다. 수백석을 받는 하시바의 가신이면서 하시바보다 더 오다가 내 순위가 높은 대다이묘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개인적으로 만난다던가, 야마자키 전투 이후 도주한 아케치를 찾아서 최후를 보았지만 그 수급을 잘라가지 않았다던가[12],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편으로 붙는 부분이라던가. 오다가에 임관한 것도 오케하자마 전투(1560년) 때로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사관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
역설적으로 미화가 주인공에 집중된 덕분에 주변인물에 대한 미화는 거의 없으며[13] 덕분에 전국시대 후반의 줄거리를 배우는데에는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개괄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5.2 신장의 야망시리즈
대대로 어떤 시리즈에서든지 대접이 그리 좋지 않은 편, 아내 빨로 출세했다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능력치도, 전법도 모두 눈물나는(...) 수준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통무지정 어떤 능력치도 아내보다 높은 게 없다... 게다가 얼굴도 굉장히 많이 우려먹는다
5.3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암살단원으로 등장한다.- ↑ 전자는 야마우치 카즈토요, 후자는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 읽는데 후자는 현재 잘 쓰이지 않는 표기법이다. 야마우치 카즈토요와 그의 부인 치요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선 드라마 제작진이 카즈토요 후손들에게 성인 山内를 어떻게 읽어야 될지 문의했는데, 후손 측은 제작진 편할대로 하라고 해서 드라마에선 야마우치라 나온다.
- ↑ 다이묘들을 도와 그들을 호위하거나 명령을 수행하는 무사 집단이었다.
- ↑ 현재 고치 현 아키 시의 역사 민속 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상태이다.
- ↑ 보통 아내를 xx의 처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선 정반대인 셈이다
- ↑ 그런데, 바로 아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카즈토요는 1577년에 2000석의 봉록을 받게되는데, 각종 기록에 나오는 그 기마열병식이 열린 연도는 1581으로 되어있다. 즉 아즈치의 기마열병식 때라면 딱히 치요가 자신의 돈을 쓰지 않아도 황금 10냥의 말이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봉록을 받고 있었다는게 되는 상황. 이 때문에 사실은 그 이전에 다른 기마열병식이 있었고, 당시에는 아직 봉록이 낮았던 시기였던지라 치요의 행동이 칭송받았던게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 ↑ 이 당시, 동료였던 아사노 나가마사등은 100석 정도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이 받고 있는 셈이다.
- ↑ 일례로 히데요시의 가신처럼 여겨지는 타케나카 한베에도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아니고 요리키 였다.
- ↑ 도토미 국은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지방이었고, 오다와라 정벌로 뺏은 간토 8국을 이에야스에게 주면서 히데요시가 몰수해서 자신의 직신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이전 이에야스의 영지였다가 히데요시의 직신들에게 배분된 5국은 새로 이에야스의 영지가 된 간토 8국과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 사이에 있었는데, 여기에 직신을 배치한 것은 이에야스를 감시하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이 여기에 배치된 직신들은 히데요시 사후 다 이에야스에게 배신하는데(...) 이는 여기에 배치된 직신들이 히데츠구의 숙로로도 일했기 때문에 숙청의 위기를 겪는 등의 사건으로 히데요시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져서라고 추정된다.
- ↑ 이 사이에, 자신의 거성인 카게가와 성을 바치겠노라고 이에야스에게 말해서 오히려 환심을 샀다(...)
- ↑ 원래는 쵸소카베 가문의 영토였으며 이후 검지에서 20만석으로 확인되고 막말에는 40만석까지 석고가 늘어난다.
- ↑ 한극 사극도 미화가 심하지만 일본 사극은 주인공에 대한 미화가 심하다.
- ↑ 이걸 챙겼으면 수천석 가봉 감인데 정으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 ↑ 혼노지의 변 이전의 히데요시가 조금 사람 좋게 나온다. 학살당할 위기에 처한 민간인을 구해준다던가. 하지만 이후의 뻘짓이 생략없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