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쓴 묘지명.
의빈 성씨가 죽은 해인 1786년(정조 10년)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두 번이나 차인 흑역사와 끝내 맺어진 러브스토리를 직접 기록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정조가 11살, 의빈이 10살 때인 1762년(임오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빈은 본래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 댁 청지기 성윤우의 딸로 1762년에 혜경궁 홍씨 처소 궁녀로 입궁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해 음력 2월 2일,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으며 윤5월 21일,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난다. 의빈이 정확히 몇 월에 입궁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임오화변 직후 혜경궁이 정조를 데리고 친정집에 가 있었을 때 데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혜경궁 홍씨는 어린 의빈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 지 의빈을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 어머니가 친히 기르는 궁녀였으니 정조와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4년 뒤인 1766년, 15살의 정조는 14살의 의빈에게 승은(왕이 궁녀와 합방하는 것)을 내리려 한다. 이 해 8월, 효의왕후(당시 세손빈)가 관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와 효의왕후의 초야도 이 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빈은 아직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맹세하고 정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시 궁녀였던 숙빈 임씨에게 승은을 내려 은언군을 낳은 일로 영조에게 심한 질책을 당했다고 한다. 만약 정조가 의빈에게 승은을 내려 아이를 얻었다면, 정조 역시 영조에게 질책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조가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 한 것은 다소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행히 의빈의 거절로 이 일은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적어도 어렸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다. 18살 때인 1769년에는 여동생 청선공주의 남편 홍은위 정재화, 별감들과 함께 술집, 기생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이를 염려하여 아버지 홍봉한에게 도움을 청했고, 홍봉한이 별감들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역시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됐다.
한편 의빈 성씨는 정조를 차고 나서도 궁녀 생활을 잘 했던 것 같다. 1773년,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한다.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하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776년, 25살의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서른이 가깝도록 아들은 커녕 딸도 얻지 못했다. 결국 계조모인 정순왕후(당시 왕대비)의 간택령에 따라 후궁을 간택한다. 정순왕후는 간택령에서 "정조가 궁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를 볼 때 정조가 의빈에게 거절당한 흑역사를 몰랐던 것 같다.
아무튼 이 때 간택된 첫 후궁이 원빈 홍씨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입궁한 지 1년도 안되어 후사없이 죽고, 두 번째로 간택된 후궁 화빈 윤씨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화빈 윤씨는 투기가 심해 따로 방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정조는 후궁을 둘이나 간택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무려 15년 만에 다시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또 거절당한다(...) 결국 의빈 성씨의 하인을 벌하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고 한다.
이후 의빈 성씨는 아들 문효세자와 딸 옹주를 낳으나 모두 앞세워보낸다. 그리고 자신 역시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정조는 의빈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지명, 묘표, 치제제문, 비문 등을 썼는데 비문에는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까지 적혀있어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그 절절한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은 약 200년 뒤인 2005년 로맨스소설 《비단속옷》,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2007년 드라마 《이산》, 2016년 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등에서 각색되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