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왕세자 | ||||||
장조 이선 | ← | 문효태자 이순 | → | 문조 이영 | ||
의소태자 이정 | ||||||
정조 이산 |
세자명 | 문효세자 |
이름 | 이순 |
출생 | 1782년(정조 6년, 임인년) 음력 9월 7일 인시(새벽 3-5시), 창덕궁 연화당 |
사망 | 1786년(정조 10년, 병오년) 음력 5월 11일, 창경궁 별당 |
본관 | 전주 이씨 |
부모 | 정조-의빈 성씨 |
동생 | 옹주, 셋째(복중 사망) |
1 생애
음력 : 1782년 9월 7일 ~ 1786년 5월 11일 (향년 5세)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1]
정조가 15년을 기다려 얻은 첫 아들
정조와 의빈 성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순이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만 1세)에 세자가 됐지만 가장 단명했다.[2]
효장세자(영조의 장남)-의소세손(장조의 장남)-문효세자(정조의 장남)에 이르기까지 3대 째 장남이 모두 자식도 없이 단명했다. 효명세자와 헌종 역시 20대에 요절하면서 정조의 대는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정조는 1786년(정조 10년)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3]의 연이은 죽음에 상심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흉지임을 알고 1789년(정조 13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했다. 이장 후 얻은 아들이 차남 순조이다.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창덕궁 연화당에서 태어났다. 정조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서른이 다 되어 가도록 왕비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고, 때문에 후궁 원빈 홍씨와 화빈윤씨를 간택하기도 했으나 그들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문효세자의 탄생에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는 원래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 가문 시종의 딸이었고,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일하다 정조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었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문효세자는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양육은 생모 의빈 성씨가 맡았다고 되어있다.
1784년(정조 8년) 윤달 3월 20일, 동복 여동생인 옹주가 태어나나 이 옹주는 두 달도 안 된 음력 5월 12일에 죽었다.
3살(만 22개월) 때인 1784년 7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정조의 둘째아들 순조가 11세 때인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에서야 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해 매우 이른 일이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중희당을 지을 정도로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가 31세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인데다, 15년을 기다려 취한 사랑하는 여인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2 죽음
그러나 1786년(정조 10년) 5월 11일, 5세(만 3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훙서하였다. 무덤의 이름은 효창원으로 서울 용산구 효창동(당시 고양군 율목동)에 있었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14일, 생모 의빈 성씨가 죽자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 옆에 묻어주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서울지명사전
이 두 무덤이 있던 자리는 현재 효창공원(효창운동장)자리이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은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강제이장되었다. 때문에 모자가 나란히 묻히게 한 정조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자 옆에 묻혀있고, 의빈 성씨의 무덤은 2km 거리의 후궁묘역에 묻혀있다.
정조는 이후 자신의 처소를 창덕궁에서 창경궁 영춘헌으로 옮겼다. 창덕궁에는 죽은 아들 문효세자의 처소인 중희당, 그리고 죽은 후궁 의빈 성씨의 처소인 연화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효세자의 사당은 '문희묘'인데, 원래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 근처에 지으려 했으나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4] 생모 의빈 성씨가 졸하자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궁(의빈 성씨의 사당)과 함께 지었다. 그러나 순종 때인 1908년, 재정을 아끼기 위해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신위를 땅에 묻었다.
연암 박지원이 진향문을 지었다. 정조 대의 문신 이성원의 개인 문집 《조은집》에 <문효세자만장>이 수록되어 있다. 《조은집》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문효세자가 무사히 보위에 올랐다면 수렴청정을 피하고 곧바로 친정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인 19세(만 18세)였다. 이복동생 순조가 너무 어린 나이(11세, 만 10세)에 보위에 올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 뒤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반남 박씨(순조의 외가), 안동 김씨(순조의 처가) 등의 세도정치가 이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일화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 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의빈은 울면서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받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 그리고 죽기를 맹세하고 내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이를 느끼고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동안 후궁을 선발했다. 그러다 다시 의빈에게 임명했으나 또 사양했다. 그래서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렸다. 의빈은 그 후에야 명을 따랐다. 그리고 저녁 달을 맞아 임신했고, 1782년 음력 9월에 왕세자를 낳았다. 이 해에 소용(정3품)으로 봉해졌고 곧 아들의 귀함 덕분에 의빈으로 품계가 올랐다.)[5]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문효세자의 탄생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4 가계
- 고조부 : 숙종
- 고조모 : 숙빈 최씨
- 증조부 : 영조
- 증조모 : 영빈 이씨
- 조부 : 사도세자
- 조모 : 혜경궁 홍씨
- 외조부 : 증찬성 성윤우 (홍봉한의 시종)
- 외조모 : 증정경부인 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