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이 라마 1세(1391~1474, 재위기간 1447~1474) 겔와 겐뒨둡
- 달라이 라마 2세(1475~1542, 재위기간 1492~1542)
- 간덴, 드레풍, 타쉴훈포 이 3곳 거대 사원[4]들의 주지를 지냈으며, 사후 드레풍 사원에 안장되었다.
- 달라이 라마 3세(1543~1588, 재위기간 1578~1588)
- 달라이 라마 4세(1588~1616, 재위기간 1601~1616)
- 몽골 알탄 칸의 증손자로 티베트인이 아닌 유일한 달라이 라마다. 사후 드레풍 사원에 안장되었다.
- 달라이 라마 5세(1617~1682, 재위기간 1642~1682) 아왕롭상갸초
- 분열된 티베트를 재통일하여 가장 위대한 달라이 라마로 추앙받고 있다. 비교적 정치적 성향이 강하고 업적을 많이 남겼으며, 포탈라궁의 건축을 지시했다. 사후 포탈라궁에 안장되었다. 티베트에서는 특별히 "겔와 응악빠 첸뽀(거룩하신 대(大) 5세)"라는 존칭으로 불린다.[5]
- 달라이 라마 6세(1683~1706, 재위기간 1697~1706) 챵잉갸초
- 감성적인 인물로 승려임에도 시와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6] 이에 승단에서 항의가 들어오자 아주 가볍게 승단을 나와버렸다. 낭만적인 시를 많이 지었으며 아직까지도 그 시는 티베트인들이 즐겨부르는 민요의 가사가 되어있다. 하지만 몽골에 납치당한 뒤 행방이 묘연해져 시신을 찾기 못했기에 달라이 라마 중에 유일하게 무덤이 없다.[7]
- 달라이 라마 7세(1708~1757, 재위기간 1720~1757) 겔상갸초
- 몽골인이 선출에 개입했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청의 도움을 받아 취임했다.
- 티베트 불교의 주요 의식인 '칼라차크라' 의식과 그에 관련된 경전 '칼라차크라 탄트라'에 관해 정통했고 또 체계화했다. 5대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위대한 달라이 라마로 존경받는다.[8] 사후 포탈라궁에 안장되었다.
- 달라이 라마 8세(1758~1804, 재위기간 1762~1804) 잠팔갸초
- 달라이 라마 9세(1806~1815, 재위기간 1810~1815) 룽톡갸초
- 달라이 라마 10세(1816~1837, 재위기간 1822~1837) 출트림갸초
- 달라이 라마 11세(1838~1856, 재위기간 1844~1856) 켄둡갸초
- 달라이 라마 12세(1857~1875, 재위기간 1873~1875) 트린리갸초
- 대부분 일찍 사망했다. 사후 모두 포탈라 궁에 안장되었다.
- 달라이 라마 13세(1876~1933, 재위기간 1895~1933) 툽텐갸초
- 달라이 라마 14세(1935~현재, 재위기간 1950~) 뗀진갸초
- 정식 이름은 "잠펠 아왕 롭상 예셰 뗀진 갸초"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한 1950년 이후 중국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으며, 1959년 3월 라싸의 대규모 폭동 때 인도로 망명한 뒤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다. 1989년 티베트의 독립을 비폭력과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1989년 판첸 라마 10세가 사망하자 새로운 환생자를 판첸 라마 11세로 임명했는데 그는 가족과 함께 중국 정부에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대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찾은 소년을 진짜 판첸 라마 11세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실상 판첸 라마의 직위마저 중국 정부가 차지하고 있는 상태다.
- 2011년 3월 정치지도직을 사임하며[10]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전담하던 역사가 일단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치적 후계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차기 지도자가 이어받게 된다. 물론 정치 지도자 직책에서 사임한 것하고는 별개로 대중국 투쟁은 계속하겠다고 밝혔지만, 티베트 안팎으로 여론이 분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2011년 8월, 총리가 선출되었다.
참고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티베트에서의 7년>이란 영화에 나오는 달라이 라마가 이 사람을 말하는거다. 다만 본인이 출연했단 얘기가 아니고 극중 달라이 라마 14세가 나온다. 정확히는 즉위하기 전의 달라이 라마다. 영화 후반부에 즉위한다. 작중에선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아 당시 라싸에 체류중이던 브레드를 궁으로 불러들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친해진다. 막판에 중국이 쳐들어오자 브레드는 외국으로 도망가야 된다며 그를 설득하지만, 중생들을 위해 남겠다고 선언. 어린 나이에 안됐다.
- ↑ Gelugpa. 우리나라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거하여 겔룩파라고 하지만 실제 발음은 "겔룩빠"이다. 이 때문에 겔룩파의 마지막 '파'가 한자 派로 오해받는 경우가 잦다. 여기서 티베트어 '빠(Pa)'는 티베트어로 '사람'이라는 단어로 겔룩파를 해석하면 "덕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티베트에는 총 4개의 큰 종단이 있는데 "겔룩빠(Gelurpa)", "닝마빠(Ningmapa)", "쌰꺄빠(Syakyapa)", 까규(또는 까귀)빠(Kaguypa)"가 그것이다.
- ↑ Tsongkhapa. 원어 발음은 쫑카빠이다. 쫑카빠란 '쫑카 지방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롭상탁빠(Lobsang Trakpa)'이다. 당시 중국 황실과 결탁하여 세속화, 부패한 승단에 반발하여 승려로서의 계율과 수행을 청정하게 하자는 운동을 시작하여 겔룩빠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티베트에서는 제2의 부처라고도 불리며 최고의 스승이라는 뜻인 '제 린포체'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 ↑ 안장이라고 하기 무엇한 게 티베트에서 역대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들은 사후 미이라 처리되어 탑에 모셔진다. 참고로 10대 판첸 라마의 미이라는 계속해서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다고.
- ↑ 겔룩파에는 3대 사원이라 하여 간덴, 드레풍, 세라 이 3곳의 사원이 있다. 라싸 3대 사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2대 달라이 라마 당시에는 세라사원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기에 세라사원 대신 타쉴훈포를 넣었다.
- ↑ 포탈라궁을 건설하던 도중에 입적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다시 티베트가 분열되고 외세가 침입할 것을 우려하여 포탈라궁이 완성되기 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숨기라고 섭정에게 유언했다. 이로 인해 섭정은 달라이 라마가 동굴에서 은둔 수행을 시작했다고 선포하여 16년이나 죽음이 숨겨졌다. 궁전 공사기간 중 섭정은 비밀리에 6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 교육시켰으나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듯… 6대 달라이 라마는 환속했다.
- ↑ 승복을 벗고 속인의 옷으로 변장하여 술집을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이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맥이 끊길 뻔했으나 몽골에 납치당하기 전에 남긴 시에 달라이 라마가 다시 태어날 장소를 언급해 놓아 7대 달라이 라마를 찾을 수 있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환속한 승려치고는 어느정도 수행의 단계가 높았던 듯하다.
- ↑ 티베트 역사에서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받은 달라이 라마는 5대, 7대, 14대 등 총 3명이다.
- ↑ 영국과 미국 등지에 유학생을 보내고 기술을 배우게 하였으며, 전기를 들여오고 우편사업을 시작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승단과 귀족들의 반발과 비협조로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입적했다. 사후 개혁파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 ↑ 사실 現 달라이 라마는 오래 전부터 정교분리를 주장해 왔다. 어찌 보면 시간문제였던 셈. 문제는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행동을 오랜 기간 동안 당연히 여겨 왔던 티베트인들의 심리적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