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민

오호십육국시대 염위의 역대 황제
건국초대 무도천왕 염민멸망

1 개요

염민(冉閔, ? ~ 352년, 재위:350년 ~ 352년)은 염위(冉魏)의 유일한 황제로 묘호는 없고 시호는 무도천왕(武悼天王)이다.

염민은 한족 출신으로 염양(冉良)의 아들인데[1] 는 영증(永曾),아명은 극노(棘奴)다. 311년에 석륵이 진우를 점령하였을 때 염민을 얻었는데 조카 석호에게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후조가 성립된 후 무장으로 각지에서 활약하였으며 338년, 전연(前燕) 정벌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349년, 관중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석민을 비롯한 제장이 출진해 있는 동안 석호가 사망하였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 중이던 석민 등은 하내 지역에서 석준(石遵)과 조우하여 황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석준은 반정이 성공하면 석민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반정을 일으켜 석세를 폐위하였다. 그러나 석준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석민은 아무 반항이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였다. 그러나 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옹립하였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 인근만 유지하였다. 옛 수도 양국에서는 석지(石祗)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때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석민은 갈족을 비롯한 여러 호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학살하였다. 특히 갈족은 석호의 자손을 비롯해 남녀노소 20여만명이 죽어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으며 개중에는 외모가 갈족과 비슷하여 억울하게 죽은 이도 있었다.

350년 정월, 석민은 국호를 위(魏)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고 윤정월에는 마침내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였으며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바꾸었다.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 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전연과 동진이 침입해 오고 저족 부홍(苻洪)이 전진(前秦)을 건국하였다.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351년에 전연과 강족 요익중(姚弋仲)이 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하였다.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하였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을 함락할 수 있었다. 양국을 함락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염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고 보급이 부족하여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전하였다. 이를 틈타 전연은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민을 공격하였으며 염민은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용성으로 호송된 염민은 참수당했고 전연의 열조 경소제 모용준(慕容俊)은 염민에게 무도천왕이라 시호를 내렸다.

염민은 이전에 후조를 멸하고 갈족에게 성적으로 학대받고 있던 한족 소녀 5만여명을 구했는데 이들은 양국에 머물러 있었지만 염위가 망할 때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전연 군대에게 모두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들은 전연 선비족들의 성노예가 되어 버렸다. 안습.

염민이 처형되자 태자 염지(冉智)가 업에서 농성하였다. 염지는 동진(東晉)의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전국옥새를 동진에 보냈지만 구원군은 제때 오지 않았고(...) 곧 부하의 배반으로 업이 함락되고 포로가 되었다. 염지마저 354년 처형당하면서 염위는 완전히 멸망했다.

2 군사적 능력

후조의 황제인 갈족 석륵한족인 염민을 조카 석호의 양자로 들일만큼 어릴때부터 용맹과 지략이 모두 뛰어났다. 351년 염민은 후조를 멸망시켰는데 전조나 후조 모두 전쟁으로 막장이 된 상태였다, 염민은 군량이 부족해 근처를 돌며 군량을 약탈할 지경이었는데, 전연의 황제 모용외는 명장 모용각을 보내서 염민을 상대하게 했다. 불꽃튀는 접전 끝에 10차례 싸워서 10번을 모두 염민이 이겼으나, 이미 전체적 상황은 전연으로 많이 기운 터여서 모용각은 숲으로 염민을 유인해 사로잡았다. 이때 염민은 혼자서 300명을 도륙하는 무용을 뽐냈으나 상황을 뒤엎진 못했다.
출처 : pgr21의 Love&Hate님의 글

이 밖의 군공은 여기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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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먼치킨... 다만 쿠데타를 일으켜 왕조를 세운 것이 후대 왕조에게 밉보였는지 그의 용맹과 지략의 뛰어남은 묻혀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염민같은 인물을 칭송하거나 언급해서 유명하게 하면 자신들의 왕조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1. 염양(299년?~ 328년)은 염융의 아들로 전조후조에게 멸망할 당시 전사했는데 염첨(冉瞻)이라고도 한다. 그는 아들이 황제가 되자 열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마찬가지로 염민의 할아버지 염융은 원황제로 추존되었다. 하지만 염위가 워낙 일찍 망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