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륵

오호십육국 시대 후조의 역대 황제
후조 건국초대 고조 명황제 석륵2대 해양왕 석홍
묘호고조(高祖)
시호명황제(明皇帝)
연호태화(太和, 328년 2월 ~ 330년 8월)
건평(建平, 330년 9월 ~ 333년)
석(石)
륵(勒)
세룡(世龍)
생몰기간274년 ~ 333년 8월 17일
재위기간319년 ~ 333년

석륵(石勒, 274년 ~ 333년, 재위: 319년 ~ 333년)
명나라 홍무제인 주원장이 역대 통일왕조의 초대 군주 중 최악의 흙수저였다면, 석륵은 역대 황제들 중에서 흙수저를 넘어 노예였던 사람이다.

1 개요

5호 16국 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이자 흉노족의 하위 부족인 갈족 출신으로 원래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독립하여 후조를 건국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제(明帝)이다.

2 출생과 성장

석륵은 상당군 출신으로 는 세룡(世龍)이고 원래 이름은 명배, 아명은 복륵(匐勒)이다. 갈족 소부락의 수령 석주갈주(石周曷硃)[1]의 아들로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기근이 들어 부족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석륵도 떠돌아 다니다가 서진(西晉) 병주자사 동영공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그러나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노예에서 해방되고 근방의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석륵은 목장 주인 급상과 함께 도적이 되었으며 팔왕의 난에 참여하여 용병으로도 활약하였다. 이때 급상은 석륵에게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다.

3 전공과 출세

용병으로 활약하다가 패배하고 군사력과 근거지를 상실하자, 석륵은 307년에 (漢)[2]유연에게 항복하였다. 유연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석륵은 독자적인 병력을 이끄는 군단의 수장으로 출세하였으며 유연이 사망한 후 유총의 휘하에서도 활약하였다. 석륵은 하북 및 하남 지역을 휩쓸고 다녔으며 310년에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하였다. 311년, 낙양 공략에 참가하여 도망치던 태위 왕연의 무리 10만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원래 왕연은 동해왕 사마월이 분사하자 대권을 이어받은 자로 죽은 동해왕의 장례를 지낸다는 핑계로 동해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낙양에 있던 사마월의 아들 등 황족, 대신, 부호, 백성, 낙양의 정병(...)[3] 등 10만여명이 따라붙는 바람에 사마월의 관을 앞에 세우고 동해로 갔다.

이를 알게 된 석륵은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사마월의 관을 호송하던 이 무리들을 추격하여 고현 영평성에서 따라잡아 군사들을 죽이고 기병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니 사마월의 아들을 포함해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다만 왕연, 양양왕 사마범, 임성왕 사마제, 무릉왕 사마담, 서하왕 사마희, 양회왕 사마희[4], 제왕 사마초, 이부상서 유망, 정위 제갈전, 예주 자사 유교, 태부장사 유애 등 황족과 관료 48명을 생포했다. 석륵은 장막에 이들을 앉혀놓고 다음과 같이 논죄했다.

석륵 : '그대들의 나라(서진)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왕연 : 황족들의 내분 때문입니다. 다만 저한테는 책임이 없습니다. 저는 원래 젊어서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었고 세상 일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장군께서 존호를 칭하시면 제가 호응하겠습니다.[5]
석륵 :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들어가서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였고[6] 지금도 중요한 관직을 맡고 있는데 어찌하여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망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왕연 : 사마충이요
석륵 : Aㅏ...

석륵은 왕연은 끌어내게 했고 이에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워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다만 양양왕 사마범은 겉모습과 정신이 엄숙하고 태연했으며 그들을 돌아보고 꾸짖었다. 이에 감탄한 석륵은 이들을 살려서 인재로 쓰려고 했지만 부장이었던 공장의 반대로 밤중에 사람을 시켜 흙담장을 무너뜨려서 48명을 모두 압사시켰다. 사마제는 죽기 전에 사마월의 관을 열어 시체를 불태우며 말했다.

사마제 : '천하를 망친 사람은 이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천하 사람들을 위해 보복하니 그 뼈를 불에 태워 천지에 알린다.'

다만 사마월의 부인이었던 배씨는 어딘가로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노비로 팔렸는데 탈출하여 장강을 건넜다. 그는 낭야왕 사마예[7]를 만나 건업을 지키도록 권했으며 사마예도 그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결국 사마예는 자신의 삼남 사마충을 사마월의 양자로 삼아 동해왕으로 봉하고 대를 잇게 했다.

이 후 그는 유요, 왕미, 호연안 등과 함께 결국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 사마치를 사로잡았다. 낙양 함락 이후에도 황하 이남에서 약탈전을 지속하였으며 석륵을 죽이고 군대를 탈취하려고 모의하던 왕미를 역관광하여 죽이고 오히려 그의 군대를 흡수하였다.
본래 한족 출신이었던 왕미는 출세하여 천하를 얻기 위해 흉노의 밑에서 싸웠던 것이고, 그 때문에 낙양이 사통팔달이며 역대 왕조들의 유서 깊은 수도인 것을 들어 낙양에 수도를 정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요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낙양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고, 왕미는 흉노놈은 어쩔 수 없다며 욕을 하였다.
왕미는 석륵을 죽이고 그 세를 흡수하여 천하를 도모할 계략을 세웠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석륵이 화친을 가장하여 접근 후 오히려 왕미를 참하였던 것이다.

석륵은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식견은 뛰어나고 인재를 모으는 것을 좋아하였다. 309년에는 하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등용한 장빈張賓은 석륵의 1등 참모로 활약하였다. 312년, 석륵은 수춘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마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장빈은 석륵에게 약탈전을 그만두고 기주 지역에 거점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석륵은 이를 따라 양국을 수도로 하여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316년에는 세력권 안으로 쳐들어온 병주의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일대를 차지하였다.

4 조나라를 세우다

318년에 한의 황제 유총이 사망한 후 외척 근준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 유찬과 유씨 황족이 대거 죽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반란군이 점거하였다. 석륵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한 유연의 조카 유요의 명을 받고 조공(趙公)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석륵의 군대에 패배한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수도 평양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유요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유요는 사신을 죽여버렸으며 석륵은 유요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세력이 되었다.

319년 11월, 석륵은 조나라를 건국한 후 스스로 조왕(趙王)에 즉위하였다. 장안의 유요도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하여 구분한다. 건국 이 후 석륵은 주변 지역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여 청주, 연주 등을 점령하였다.

324년부터 전조와 후조는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325년, 병주가 전조에게 항복하였으며 동진(東晉)의 사주도 유요에게 투항하여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이 포위되게 되었다. 석륵은 조카 석호를 구원군으로 보내어 전조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 전조의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다. 이로 인해 병주, 사주 일대를 후조가 모두 장악하였으며 화북의 동진 세력도 크게 위축되어 후조는 회수 이북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5 전조를 멸하다

328년,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하였다. 유요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며 석호는 크게 패배하여 낙양 일대를 유요가 포위하였다. 낙양 포위는 3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하였다. 유요는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여 석륵의 구원군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포위를 풀고 낙양 북서쪽 금용성에 포진하였다. 12월 5일,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공격하였으며 유요가 술에 취한 채로 지휘하였기 때문에 석륵은 크게 승리하고 달아나던 유요는 말에서 떨어져 포로로 잡혔다. 석륵은 유요를 잡아 수도 양국으로 압송한 다음 유요의 아들 유희에게 항복을 권하게 했지만 거절당하자 그를 처형하였으며 329년에는 유희가 반격을 개시했지만 승리했고 반격하여 상규로 도망쳐 있던 유희 등 전조의 잔당도 토벌하고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 2월에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였으며, 뒤이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333년, 석륵이 병으로 몸져 눕자,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7월에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산기슭에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하였다. 이전에 석륵은 자신의 어머니 왕씨를 산계곡에 몰래 묻은 다음 유목민의 장례인 '비장'으로 치렀으며, 석호는 평야에 가짜 고평릉을 만들어서 석륵 무덤도굴을 막으려는 노력을 했다.

석륵의 뒤는 차남이자 태자 석홍이 뒤를 이었으나 곧 석호에게 찬탈되고 살해당했다. 석륵이 살아 있을때 일부 신하들은 석호를 처리하게 했지만 석륵은 망설이면서 미루다가 끝내 처리하지 못했다. 영명한 군주였던 석륵이 말년에 한 실수 때문에 그 아들 석홍은 폐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그 뒤 석륵의 자손들은 제 명에 살지 못하거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나라의 기틀을 잘 세워놓고 갔지만 뒤를 이은 개병신 인간말종 석호가 이걸 다 망쳐놓아서 진순신 등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석륵의 정책을 유지했다면 오호십육국이 일찍 종결됐을 것이라는 주장. 당시만 놓고 보면 일리있는 말이지만, 결국 역사엔 '만약'이란 게 없는 법.

6 인물됨과 일화

6.1 위까의 원조?

그는 사실 까의 원조중 1명으로 고구려와 우문옥고의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의 대화 때 서광이 석륵에게 '폐하는 유방의 삼왕을 능가하니 헌원에 버금간다고 칭송하자...

짐이 만일 한고조와 같은 큰 인물을 만난다면 북면하여 신하의 자리에 서서 한신이나 팽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오. 광무제와 같은 인물을 만난다면 중원에서 말을 달려 겨루어 볼 것이오. 하지만 그 중원의 사슴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대장부가 일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사마중달 처럼 고아나 과부[8]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안할 것이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석륵이 단순히 조조와 사마의를 깠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오히려 그는 서진의 치하에서 노예로 고달픈 인생을 보냈고 서진 제국이 병폐로 멸망하는 비참한 모습도 봤으니, 그 막장 왕조 서진의 전 왕조 조위의 창건자 조조와 그 막장 왕조의 창건자 사마의를 당연히 나쁘게 생각할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글조차도 모르는 완전히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이었으니, 그의 사상은 당시 민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며, 백성들 사이에서 조조와 사마의를 싫어하고 한나라를 좋아하는 사상은 상당히 이른시기에 이미 정착했음이 드러난다.[9]

6.2 역사적인 식견

문맹이었지만 학자들이 역사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 남은 일화로는 유방항우가 쟁패하던 당시 역이기가 6국을 부활시키는 대목을 들을 때였다. 석륵이 "이렇게 하면 고조는 반드시 패한다. 그런데 어떻게 한고조가 이겼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장량이 간언해서 철회하는 장면을 듣고 "한고조에게는 장량이 있어서 막을 수 있었구나."라고 말했다고.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식견은 상당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6.3 창작물에서

전설판타지(…)이자 명목상 삼국지연의의 후속작 후삼국지에서 후반부 주인공으로 나온다.

조운의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조륵이었다가 나중에 자기 성을 석씨로 고쳐서 석륵이 된다. 왜 석씨가 되는고 하니 조운의 후손들이 진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조륵을 잃어버리고 갔는다. 미아 조륵이 막장 캐삭빵 사치대결로 유명한 당대의 거부 석숭의 형뻘 되는 사람의 양자가 되어 석륵이 되었다. 이 석숭이 작중에서든, 실제로든 8왕의 난의 주역 중 하나인 조왕 사마륜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양아버지 동생의 원수를 갚고자 서진과 대립하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유비의 후손이며 촉 멸망시 자결한 북지왕 유심의 아들로 설정된 유요[10]와 대결을 한다는 스토리. 물론 결과는 역사상대로 석륵이 유요를 제끼고 승리한다.
  1. 원래는 성씨가 없었지만 아들이 석씨가 된후 석씨로 정해졌다. 그는 석륵이 황제가 된후 세종 원황제로 추존되었다.
  2. 훗날의 전조
  3. 실제로 이 병력이 낙양에서 빠지는 바람에 낙양이 함락되는 원인이 된다.
  4. 서하왕 사마희와 동명이인.
  5. 즉, 석륵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고 자신이 밀어줄테니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6. 왕연은 당시 죽림칠현의 뒤를 이은 청담 세계의 영수였다.
  7. 동진을 건국한 시조 원제로 사마의의 6남 사마주의 장손
  8. 고아는 헌제와 위의 어린 황제들,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와 황후들을 말한다.
  9. '서진이 싫으면 사마의는 그렇다쳐도 조조는 왜 싫어하는가,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진나라 사마의는 천하의 개쌍놈인데?'라 할 수도 있는데, 그러는 조조가 그 아들 조비의 한나라 찬탈 기반을 마련했다. 앞에서 유방 빠임을 자임했으니, 조조라고 좋게 볼까? 더군다나, 조조가 창건한 위나라와 그를 계승한 진나라의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힘겨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야 "통일했으니 끝" 하고 말 일이지만
  10. 물론 전조 황제 유요는 유비와 관련이 없으며 유선의 아들 유요는 유심의 아들이 아니다. 애초에 유심의 처자는 유심이 자결하기 전에 모두 유심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