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들.
목차
1 衛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 | 상(商)은(殷) | |||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 | 주(周) | 서주(西周) | ||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 | 춘추(春秋) | |||
전국(戰國) | ||||
기원전 221 ~ 기원전 206 | 진(秦) 후초(後楚) |
중국 주나라 서주 시대부터 존재했던 나라다. 은나라 멸망시 태공망 여상(제나라의 시조), 소공 석(연나라의 시조) 등은 아예 은을 없애하고 했으나 무왕의 아우 주공 단(노나라의 시조)의 제안에 따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은에 봉한다. 이와 아울러 그 주변에 관나라, 채나라, 곽나라를 세우고 각각 무왕의 아우들이었던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봉했다.
이들의 목적은 무경을 감시하는 것이었기에 삼감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무왕 사후 섭정을 맡은 주공 단의 찬탈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삼감의 난'을 일으켰으나 주공 단은 이들을 3년만에 진압하여 주모자였던 무경과 관숙 선을 죽이고 채숙 도는 유배, 곽숙 처는 삭탈관직에 처했다. 이 때 은나라 수도 일대의 이름을 은에서 위로 바꾸고 강숙 봉(문왕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을 봉했다. 수도는 조가였다가 초구, 마지막에는 복양으로 옮겼다. 국성은 희씨이다. 은나라 제사는 주왕의 큰형이었던 미자 계(啓)[4]를 세워 송나라(宋)에 봉했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올랐고 기원전 771년 견융이 서주의 수도 호경을 침공했을 때 무공이 진(晉), 진(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의 시호를 썼다. 이때 무공은 주 왕실의 사도를 겸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만 해도 정(鄭), 송(宋)와 함께 큰 세력이었지만 후에 제나라(齊), 진나라(晉), 송나라(宋), 노나라(魯) 등의 압박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공자들 간의 자리 다툼으로 쇠퇴했는데[5] 장공이 즉위한 후 장공의 서자 주우가 자신의 이복동생 환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충신 석작 등의 수습[6]으로 환공의 또다른 이복 동생 선공을 세워서 내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공은 색골이라서 자신의 계모였던 위 장공의 첩 이강을 범하고 아들 급자(急子)를 낳았다.[7] 또 급자의 며느리으로 온 제나라 희공의 딸 선강을 스틸하고 수(壽)와 삭(朔)이라는 아들을 낳고 선강을 총애하자 선강과 삭은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도 수를 태자로 삼기 위해 원래 태자였던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선공은 급자를 다른 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리 도적들을 매수해 사신이라는 표시를 보면 죽이라고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수가 급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신의 상징인 백모(白毛)[8]를 가지고 먼저 떠났고 수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알고 통곡한 급자는 스스로 자신이 목표라는 것을 도적들에게 밝혔고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선공은 화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수의 동복동생인 삭이 뒤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혜공은 사악해서 평소 급자와 수를 모함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9] 이에 급자의 동생 검모는 우공자 직 등의 협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혜공의 외숙부뻘이었던 제나라 양공은 그를 지원해 검모를 몰아내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은 돌아와 우공자 직 등은 죽였지만 정작 검모는 주나라로 추방시키는 걸로 끝냈는데 그가 주왕의 부마였기 때문이었다.
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이 즉위하니 그가 의공이다. 의공은 학덕후질을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본인도 적족의 침공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의공의 신하 굉연(宏演)이 시신이나마 수습했으나, 칼로 엄청 썰려서 간(肝) 외에는 고깃덩어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굉연은 그 간을 향해 절을 한 뒤, 주공의 시신을 장사지낼 관과 기구가 없으나, 자신의 몸으로 관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배를 가른 다음 자신의 배 안에 간을 넣고 목숨을 끊었다. 이를 두고 부복납간(剖腹納肝)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라가 멸망할 뻔 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했고 수도를 폐허가 된 조가에서 초구로 옮겼다. 의공의 아들 개방은 제나라로 망명해서 나중에 제나라 간신이 되어 역아, 수조와 함께 환공을 악의 길로 빠뜨리고 뒤를 이은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소공을 즉위시키는 등 제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혜공-의공-개방 3대가 문제
위나라 입장을 보면 문제는 개방이 이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혜공의 후대가 남아 있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혜공과 정신나간 의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비운의 태자였던 급자의 후손을 찾았지만 급자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수의 아들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검모의 동생 소백 석의 장남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10] 하지만 대공은 몸이 약해 곧 죽었고 그의 아우 훼를 세우니 그가 문공이다. 문공은 우수한 임금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진력했고 이렇게 위나라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문화는 흥성하였지만 문공이 진(晉)나라 떠돌이 공자 중이를 푸대접했다가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군주가 되자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계속 몰락했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강국인 진(秦), 위(魏) 사이에 끼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위나라 출공과 장공(이름은 괴외) 부자(장공이 출공의 아버지)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괴외가 세자 시절 어머니 남자(南子)(...)[11]가 음탕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자 죽이려고 하다가 뽀록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괴외의 아버지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장공이 임금이 되었으나, 괴외가 다시 돌아와서 장공을 몰아내고 출공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장공이 군주가 되, 또 장공이 쫓겨나고 제나라와 진나라의 입김을 받아 출공이 되는 등 임금이 바뀌는 혼란이 반복되었다. 겨우 위나라 내부의 움직임으로 출공이 복위하여 안정되나 싶더니 출공이 자기를 불러다 임금으로 삼은 신하를 쫓아냈다가 역관광을 당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전국시대가 되자 위(魏)의 압박으로 위(衛)나라 성후는 스스로 칭호를 공에서 후로 한단계 낮췄다. 그러나 위(魏)나라는 마음대로 성후를 폐위시켜 버리고 그의 신하였던 자남 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12]을 군주로 세웠으니 그가 평후이다.
그 후에는 평후의 아들 사군 때는 작위가 아예 군(君)[13]으로 떨어지면서 완전히 위(魏)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위(魏)가 진(秦)에 관광당하기 시작하면서 위(衛)는 야왕(野王)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고을 하나로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사기 춘신군열전을 보면 '진(秦)이 위(衛)를 야왕으로 옮겼다(秦徙衛野王)는 기술이 나온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다른 나라들은 멸망시킨 뒤에 왕이나 그 외 제후들을 평민으로 만든 반면 위(衛)만큼은 멸망시킨 뒤에도 야왕으로 옮겨서 작위를 그대로 놔뒀다. 너무 작아서 야왕으로 옮겨 놓고 까먹었을지도[14] 아무튼 그래서 위(衛)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군현제라는 강력한 중앙집중 정책을 폈던 진(秦)나라에서 유일하게 봉건제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가 어떻게 존재감을 알아챘는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평민으로 만들어 버렸고 위는 기원전 209년 멸망했다. 그래도 춘추전국시대에 세워진 나라들을 통틀어 진(秦)을 빼고 제일 마지막으로 망한 나라다(...).
위(衛)나라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폐위된 군주는 시호가 없이 이름만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군주도 있다.
- 1. 강숙(康叔) 봉(封) 기원전 1040년? - ? : 주문왕의 9남이자 주무왕의 동복 동생으로 옛 은나라 지역에 봉했다.
- 2. 강백(康伯) 모(牟)
- 3. 고백(考伯)
- 4. 사백(嗣伯)
- 5. 첩백(疌伯) 또는 지백(摯伯)
- 6. 정백(靖伯)
- 7. 정백(貞伯) 또는 기백(箕伯) ? - 기원전 867년
- 8. 경후(頃侯) 기원전 866년 - 기원전 855년 - 건국 때부터 백작이었지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작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당나라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강고》에 강숙을 “맹후”라 부른 구절을 들어 원래 강숙은 후작이었고 또 제후의 맏이로서 '방백'이었기 때문에 이후 강숙의 후예들이 '백'을 칭한 것은 '방백'의 의미며 사기에 경후 때에 뇌물을 바쳐 후작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방백의 권위를 잃어 보통의 제후와 같은 칭호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 9. 희후(釐侯) 기원전 854년 - 기원전 813년
- 10. 공백(共伯) 여(餘) 기원전 813년
- 11. 무공(武公) 화(和)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 12. 장공(莊公) 양(揚)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35년
- 13. 환공(桓公) 완(完) 기원전 734년 - 기원전 719년
- 14. 주우(州吁)(폐위) 기원전 719년
- 15. 선공(宣公) 진(晉) 기원전 718년 - 기원전 700년
- 16. 혜공(惠公) 삭(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또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7년
- 17 검모(黔牟)(폐위)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8년 또는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7년
- 16-1. 혜공(복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또는 기원전 686년 - 기원전 669년
- 18. 의공(懿公) 적(赤)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19. 대공(戴公) 신(申) 기원전 660년
- 20. 문공(文公) 훼(燬)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35년
- 21. 성공(成公) 정(鄭)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00년
- 22. 숙무(叔武)(폐위) 기원전 632
- 23. 하(瑕)(폐위) 기원전 631년 ~ 기원전 630년
- 21-1 성공(복위) 기원전 630년 ~ 기원전 600년
- 24. 목공(穆公) 속(速)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89년
- 25. 정공(定公) 장(臧) 기원전 588년 - 기원전 577년
- 26. 헌공(獻公) 간(衎)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 주색잡기와 사냥만 밝히다가 반란이 일어나 폐위되었다. 사실 죽일 수도 있었으나, 호위무사 윤공타가 당시 최고의 활잡이인데다가 추격하는 장수 공선정이 그의 제자라서 화살촉을 뺴고 빈 화살만 쏘면서 놔주는 바람에 망명에 성공하였다.
- 27. 상공(殤公) 추(秋) 기원전 558년 - 기원전 547년 : 헌공 축출 후 귀족들이 내세운
바지사장임금으로 위헌공 복위 때 폐위되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불쌍했는지 그래도 시호는 줬다.. 단지 그 시호가 일찍 죽을 상 자여서 그렇지(...) - 26-1. 헌공(복위)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 27. 양공(襄公) 악(惡)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35년
- 28. 영공(靈公) 원(元) 기원전 534년 - 기원전 493년 : 보통 영이라는 시호는 사형을 당하거나 폐위된 군주에게 주로 주어지나, 평범한 폭군이 영을 시호로 받는 일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런 예이다.
- 30. 출공(出公) 첩(輒)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80년
- 31. 장공(莊公) 괴외(蒯聵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8년
- 32. 반사(斑師)(폐위) 기원전 478년
- 33. 기(起)(폐위) 기원전 477년
- 30-1. 출공(복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70년 또는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56년
- 34. 도공(悼公) 검(黔)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65년 또는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1년
- 35. 경공(敬公) 불(弗) 기원전 464년 - 기원전 432년 또는 기원전 450년 - 기원전 432년
- 36. 소공(昭公) 또는 소공(橈公) 규(糾)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6년
- 37. 회공(懷公) 미(亹)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 38. 신공(愼公) 퇴(頹)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83년 또는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 39. 성공(聲公) 또는 성공(聖公) 훈(訓) 기원전 382년 - 기원전 372년 또는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 40. 성후(成侯) 속(速) 기원전 371년 - 기원전 343년 또는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41. 평후(平侯)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35년 또는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5년
- 42. 사군(嗣君) 경(勁) 또는 효양후(孝襄侯) 기원전 334년 - 기원전 293년 또는 기원전 324년 - 기원전 283년
- 43. 회군(懷君)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54년 또는 기원전 282년 - 기원전 253년
- 44. 원군(元君)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41년 또는 기원전 253년 - 기원전 230년
- 45. 각(角)(폐위)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09년 또는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09년
2 魏
2.1 중국 고대의 국가 소국 위나라 魏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지금의 산서성 예성현 일대에 있었다. 기원전 661년에 진(晉)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2.2 중국 고대 전국시대의 국가 위나라 魏
중국의 역사 | ||||||
춘추전국시대 | → | 통일 진 | ||||
진 | → | 위 |
전국시대에 등장한 나라로 초창기의 수도는 안읍(安邑)이며 후기 수도는 대량(大梁).
본래 진(晉)나라의 일부였지만 진문공 때 공신인 위주[16]의 후손인 위씨가 조씨, 한씨 등과 함께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진(晉)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운 나라로 전국 7웅 중의 하나이며 춘추전국시대 때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전국시대 초기에는 자하, 오기, 서문표 등을 기용하여 서하 지방을 빼앗고 중산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전국시대 초기에 국력이 가장 강성하였다. 군사적으로도 오기가 훈련시킨 정예 중장보병 무졸(武卒)이 유명했다. [17]위혜왕 시대에 하서를 진(秦)에게 빼앗기면서 수도 안읍의 방어가 어려워져 대량(大梁)으로 천도한다. 이 때문에 이 나라를 양(梁)나라라고도 한다.
황하의 평야지대에 나라가 위치하여 인구가 많고 부국강병의 제반 조건들이 마련되었지만,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외침에 불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혜왕(양혜왕) 때 잇따른 패전으로 하서지역 등 방위에 필요한 지역들을 상실하였고 이로 인해 나라가 위축되었다. 진(秦)의 영원한 호구 이후의 왕위쟁탈전은 가뜩이나 어려운 위나라의 국력을 스스로 소모하는 꼴이 되었으며 결국 기원전 225년에 진(秦)에게 멸망한다.
2.2.1 역대군주
2.2.1.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
- 무자(武子) 주(犨) - 필만(畢萬)의 손자이자 망계(芒季)의 아들.
- 도자(悼子) 과(顆) - 무자의 아들. 결초보은 고사로 알려져 있다.
- 장자(莊子) 강(絳) - 무자의 아들.
- 헌자(獻子) 서(舒) - 소자의 아들.
- 간자(簡子) 취(取) - 헌자의 아들.
- 양자(襄子) 만다(曼多) - 간자의 아들.
- 환자(桓子) 구(駒) - ? ~ 기원전 425년. 양자의 아들.
2.2.1.2 삼진 분립 후
- 문후(文侯) 사(斯) - 기원전 425년 ~ 기원전 387년. 환자의 손자. 기원전 403년 제후가 되었다. 악양의 고사에 나온 왕이다.
- 무후(武侯) 격(擊) - 기원전 387년 ~ 기원전 371년. 문후의 아들.
- 혜왕(惠王) 앵(罃) -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19년. 무후의 아들. 양혜왕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61년 대량으로 천도하였고 기원전 344년 칭왕.
- 양왕(襄王) 사(嗣) -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96년. 혜왕의 아들.
- 소왕(昭王) 속(遬) - 기원전 296년 ~ 기원전 277년. 양왕의 아들.
- 안리왕(安釐王) 어(圉) -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43년. 소왕의 아들.
- 경민왕(景閔王) 증(增) - 기원전 243년 ~ 기원전 228년. 안리왕의 아들.
- 가(假)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5년. 경민왕의 아들. 진나라(秦)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이 함락당하여, 삼진(三晉) 가운데 마지막으로 멸국됨.
2.3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魏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서기 220년 후한 헌제에게 선양 받아 건국했고, 조방이 사마염에게 선양해 265년 멸망했다. 위(삼국시대) 항목 참조.
2.4 한족 염민(석민)이 세운 魏
350년 후조 출신 염민이 석지를 살해하고 업(鄴)에서 건국하였다. 국호는 위이며 구분하기 위해 염민의 성을 붙여 염위로 불린다. 그러나 건국 후 2년만에 전연의 공격으로 염민이 살해되고, 뒤를 이은 염지도 포로가 되면서 352년 멸망하였다. 역사가 짧아 16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원황제(元皇帝)[18] | 염륭(冉隆) | - | - | - |
- | 열조(烈祖) | 고황제(高皇帝)[19] | 염량(冉良) | - | - | - |
1대 | - | 무도천왕(武悼天王) | 염민(冉閔) | 영흥(永興) 350 ~ 352 | 350 ~ 352 | - |
2.5 탁발선비가 세운 魏
위라는 이름을 가진 역대 전근대 중국 왕조들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고 비중도 가장 큰 나라이다.
자세한 것은 북위, 동위, 서위 항목 참조.
2.6 오대십국 왕처직이 세운 魏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 ||||
907 ~ 1279 | 오대십국(五代十國) | 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 당항(黨項) | |
송(宋) ,대리국(大理國), | 북송(北宋) | 백고대하/서하(西夏) | ||
남송(南宋) | 안춘 구룬/대금(大金) | |||
1270 ~ 1368 |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 |||
1368 ~ 1644 | 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
오대십국의 소국(909~929)으로 북평(北平), 혹은 왕위(王魏)라고도 불리며, 십국에는 들지 않는다. 유력 절도사 의무절도사 세력으로, 의무절도사 왕처직이 909년 후량의 주전충으로부터 북평왕에 책봉되었다. 이후 양자인 왕도가 921년 왕위를 찬탈하고 위왕이라 선포하였다. 929년 후량의 명종이 왕안구를 보내 북평을 쳐 근거지인 정주성을 깨뜨리자, 왕도는 가솔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하여 의무절도사 세력은 소멸하였다.
3 묘청이 선포한 爲
묘청의 난 때 선포한 나라 이름. 정식 명칭은 대위국(大爲國)인데, 전통적으로 대○국은 ○나라라고도 하니 위(爲)나라라고도 부를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라 금방 망했어요.
상세한 내용은 묘청 문서를 참고.- ↑ 1.0 1.1 현대 한국어와 현대 표준중국어(관화)로는 위(衛)와 위(魏)의 발음이 구분되지 않지만, 광동어(Wai6와 Ngai6), 일본어(えい/Ei와 ぎ/Gi), 베트남어(Vệ와 Ngụy)로는 구분된다.
- ↑ 한자에는 이체자(異體字)가 굉장히 많다. 문헌을 뒤져보면 이것 말고도 다른 이체자들이 많이 존재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구자체를 쓰던 시절에 衞가 국가 표준이었다.
- ↑ 현대 표준중국어에서 성조까지 똑같아 한어병음으로는 도무지 구분할 방법이 없는 위(魏)와 위(衛)를 구분하기 위해, 종종 위(魏)를 Wei로 쓰고, 위(衛)를 Wey로 적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어병음으로 제대로 적을 때는 둘 다 Wèi라고 적는 게 맞지만 영어 등에서 한자 병기 없이 표기할 때는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Wey는 국어라마자라는 표준중국어(관화)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한어병음 Wèi에 대응되는 철자이다. 아마 위(魏)는 중국사에서 자주 나타나 자주 표기되므로 표준적인 Wei로 쓰고, 위(衛)는 춘추시대에만 끗발날렸고 전국시대에는 소국이었으며 이후에는 아예 왕조명으로 쓰이지 않아 표기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듣보잡일반적으로 안 쓰는 표기인 Wey로 쓰게 된 듯하다. 다만 춘추전국시대 이후 시대의 왕조에서 왕족이나 기타 공신들에게 명목상 분봉하는 영지 이름이 위(衛)나라일 경우에는 Wey로 안 적고 Wei로 적는 경우가 많다. - ↑ 사기에서는 '개(開)'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한경제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라 우왕의 아들 계, 노나라 민공 노민공도 이름을 '개'라고 기록했으며 전국시대 직전 위(魏), 조, 한 삼국이 지백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장맹담(張孟談)은 장맹동(同)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이 사마담(司馬談)이었기 때문이었다.
- ↑ 사실 무공도 자신의 형 공백을 죽이고 즉위했다.
- ↑ 석작은 주우를 죽이고 주우가 군주가 되는데 공을 세운 아들 석후도 죽였는데 이것은 '대의(나라)를 위해 친족도 죽인다'라는 뜻의 '대의멸친'의 유래가 되었다.
- ↑ 참고로 얼마나 급하게 낳았는지 이름이 급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 ↑ 얼룩소의 꼬리털로 만든다.
- ↑ 위선공의 재위 기간 19년을 고려해 보면 선공이 즉위한 후에 태어난 혜공은 즉위했을 때 미처 20세도 되지 못했다. 즉 10대에 이미 형들을 헐뜯고 다닌 것.
싹수가 노랗다 - ↑ 소백은 제양공의 주선 하에 계모였던 선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보았다.
- ↑ 남자(男子)가 아니다! 남자는 송나라 공녀로 '자'는 성을 의미한다. 남은 시호이며 결국 자성이다.
- ↑ 조상 공자 영은 영공의 서자로 문공의 7세손이다. 위에서 장공이 달아나 위나라에 세자가 없을 때 위영공과 남자에게서 모두 영공의 뒤를 이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받지 않고 출공을 세우도록 권하고 자신은 고사했다.
- ↑ 원칙적으로 오등작은 국(國: 제후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것인데 반해, 군(君)의 경우 가(家: '국'에 소속된 대부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작위 중 최고위이다. 따라서 위나라 군주의 칭호가 '군'이 됐다는 것은 '국' 취급을 못 받고, '국' 내부에 있는 '가'에 준하는 취급을 받게 됐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위나라를 위가(衛家)라고 불렀다는 건 아니고 대우가 가처럼 됐다는 뜻이다. 다만 이전에도 문헌에서 위군(衛君)으로 쓰는 경우들이 있긴 했다. 예를 들어 《논어》의 〈자로〉 3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衛君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君 자는 위나라 군주의 작위가 '군'이라는 게 아니고(당시에는 '공'이 정식 칭호였음) 일반적인 의미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었다. 근데 사군의 시대에는 위나라 '임금'의 작위가 정말로 '군'이 된 것이다(...). 당시 자로나 《논어》의 편집자는 당시 끗발날리던 '衛君'이 훗날 그대로 정식 칭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을 것이다.
- ↑ 위나라가 진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이래로 진나라 정계에 위나라 사람들이 진출하는 등 얼마 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가 통일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세운 상앙도 위나라 출신이고, 결정적으로 통일 당시 진나라의 권신이자 진시황의 생부로 의심 받아 온 여불위도 위나라 출신이다. 어쩌면 이런 사정들이 위나라 존속에 뭔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 ↑ 영어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조 부호를 제외한 Wei를 쓴다. 현대 중국어에서 성조까지 같은 위(衛)는 Wey로 써서 위(魏)와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세 설명은 衛 단락의 주석을 참고할 것.
- ↑ 위주의 할아버지 필만은 원래 희씨로 주문왕의 15남 고가 봉해진 곳으로 서융에게 망한 필(畢)나라의 후손이었다. 바로 위의 위(魏)나라를 진나라가 멸망시키고 위만에게 봉토로 하사해서 씨를 위씨로 고쳤다.
- ↑ 사기에서 무졸은 진나라 예사(銳士)에 버금가며 제나라, 조나라보다 우위라고 했다
- ↑ 염민 추존
- ↑ 염민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