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 교향곡 '예나' C장조
(Sinfonie C-dur "Jenaer"/Symphony in C major 'Jena')
1 개요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베토벤이 작곡한 첫 번째 교향곡이라고 여겨져 많은 이들을 낚았던 작품. 그 때문에 클래식 계에서는 이 곡의 존재 자체가 흑역사로 손꼽히기도 한다.
2 발견
1909년에 독일의 음악학자인 프리츠 슈타인이 독일 동부 지방에 있는 예나라는 도시의 음악협회 문서수장고를 뒤지던 도중에 꽤 오래되어 보이는 고악보들을 많이 발견했는데, 그 중에 '루이 판 베토벤(Louis van Beethoven)' 이라는 이름이 기입된 교향곡의 악보가 있었다. 루이는 독일어 이름인 루트비히의 프랑스어 표기로, 실제로 베토벤도 생전에 루트비히와 루이 두 가지 이름을 비슷한 비율로 사용했다.
슈타인은 악보를 검토해 보고는, 베토벤 이외의 다른 사람 이름이 없고 작곡 스타일도 (아마 베토벤 초기의) 고전 양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 집중했다. 즉 베토벤이 본 시절 습작으로 작곡한 교향곡 악보가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예나로 흘러들어가 잠자고 있었던 것으로 간주했고, 발견 후 2년 뒤인 1911년에 독일 굴지의 음악출판사인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에서 베토벤 작곡의 '예나 교향곡' 이라고 공식 출판되었다.
이 발견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 곡에 1번을 새로 매기고 나머지 기존의 1~9번 교향곡 번호를 하나씩 뒤로 밀어서 재분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다만 이 곡이 1번보다 훨씬 보수적인 작풍이고, 습작으로 여겼던 슈타인의 주장이 호응을 얻어 공식적인 번호는 부여되지 않았다.[1]
그리고 음악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발견이었다고 하더라도, 곡 자체가 너무 심심하다는 비평이 많아 실제로 공연되는 빈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하다 못해 당대 베토벤 관현악 작품 지휘의 본좌들이었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의 지휘자들은 아예 아오안으로 여겨 다루지도 않았다.
3 진짜 작곡가는?
물론 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나 찬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작품이라면 왜 그와 평생 인연이 거의 없었던 예나에서 악보가 발견되었는지, 그리고 당시 베토벤의 편지 같은 기록에 이 곡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지를 들어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이 곡의 진정한 작곡가는 2차대전 후에 제대로 밝혀졌다. 1957년에 베토벤의 스승이기도 했던 하이든의 작품에 대한 사료 수집과 연구를 위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던 영국의 음악학자 H. C. 로빈스 랜던이 오스트리아의 소도시인 괴트바이크의 수도원 자료실에서 슈타인이 발견한 것과 똑같은 곡이 담긴 악보를 찾아냈다.
하지만 랜던이 발견한 악보에는 베토벤의 이름이 일체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프리드리히 비트라는 듣보잡 음악인이 작곡가로 올라와 있었다. 결국 슈타인이 주장한 베토벤의 최초 교향곡이라는 팩트는 완전히 개발살 났고, 그 동안 이 곡이 정말 베토벤 작품이라고 별 근거도 없이 주장하던 이들은 김칫국 애호가 인증을 하고 말았다(...).[2]
물론 베토벤은 실제로 그의 첫 교향곡이 된 1번을 완성하기 이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수십 곡의 교향곡을 완성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초고(스케치) 뭉치들을 남긴 바 있었다. 슈타인의 엇나간 추측도 이러한 근거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정작 베토벤이 그 초고들을 그냥 미완성 상태 그대로 방치하거나 파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랜던의 발견으로, 음악학자들이 확실한 사료의 탐색이나 연구 없이 '작곡 양식이 유사하다' 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식의 추측으로 정체불명의 작품들을 누구의 곡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리는 직관적인 연구 행태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그 때까지 생존하고 있던 슈타인도, 랜던의 발견과 공표 이듬해인 1958년에 쾰른에서 열린 국제 음악학 회의에서 '예나 교향곡의 문제에 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해 자신의 의견을 번복했다.
4 비트는 누구?
진짜 작곡가로 밝혀진 프리드리히 비트(Friedrich Witt)는 공교롭게도 베토벤과 같은 해인 1770년에 뷔르템베르크 지방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1836년에 죽기까지 주로 출생지인 독일 남부에서 첼로 연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당대의 많은 음악인들처럼 권력층이나 특권층에 예속되어 월급을 받으며 생활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작품들도 베토벤과 달리 기존의 고정 관념에 계속 도전하거나 일탈하는 진보적인 작풍을 보여주지 않고 있고, 오히려 고전 시대의 형식과 음악 어법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로 여겨지고 있다. 이 때문에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까지 차고 넘치던, 이미 검증된 보편적인 음악 언어로만 작품을 써서 안위를 꾀하는 작곡가들을 비꼬는 '비더마이어'[3] 음악인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 고전 시대에 활동하다 잊혀졌던 많은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시대연주의 득세와 함께 리바이벌되면서 이 곡을 단순히 '베토벤 작품으로 여겨졌던 2류 작품' 으로 비하하는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또한 이 곡이 비트 작품으로 밝혀지기는 했어도, 아직 작곡 시기 등의 추가 정보가 미흡한 상태라서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5 낚인 사람들
랜던의 발견 이전에 이 곡을 베토벤 작품으로 알고 공연과 녹음을 진행해 낚인 이들도 있는데, 1920년대 중반에 프리더 바이스만의 지휘로 오데온이라는 음반사에서 SP로 나온 이래 몇 종류의 음반들이 계속 나왔다. 1950년대 초반에 미국의 콘서트 홀이라는 음반사에서 발터 괴르 지휘의 네덜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이 곡을 녹음해 LP로 발매했으며, 1956년에는 독일의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프란츠 콘비츠니 지휘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연주로 녹음한 LP(카탈로그 넘버 17 077 LPE)도 발매되었다. 1년만 더 참았으면 됐을텐데
하지만 진짜 작곡자가 비트로 밝혀지면서 이들 음반도 마찬가지로 흑역사가 되었고, CD로 재발매되기까지 거의 60년 가까이 걸리게 되었다. 그나마 베토벤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던 시기에 가장 인지도 높은 지휘자와 악단이 연주한 도이체 그라모폰 음반은 이후 작곡가 정보를 수정해 CD로 재발매했지만, 괴르 지휘의 콘서트 홀 음반은 음반사가 망해버린 탓에 비공식 CD-R 발매본만 존재하고 있다. 나머지 음반들도 재복각이 전혀 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비트 작품으로 밝혀진 이후에도 이 곡의 공연과 녹음 횟수는 여전히 현시창인 수준인데, 그나마 고전 시대 교향곡에 관심을 갖고 재연하는 악단들이 종종 연주하고 있다. 2010년 8월에는 낙소스에서 파트릭 갈루아 지휘의 신포니아 핀란디아가 신보를 내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품이 베토벤 교향곡들 만큼이나 인지도가 높아질 지는 모르겠지만.
6 관련 항목
- 우크라이나 교향곡: 이 경우에는 예나 교향곡처럼 불충분한 연구나 단정짓기로 인해 빚어진 사례는 아니지만, 따져보면 좀 더 악질적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 있기도 하다.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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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나봐
- ↑ 비슷한 예로 로베르트 슈만의 초기 미완성 교향곡인 '츠비카우 교향곡' 이 있다. 다만 이 곡은 진짜 슈만 작품.
- ↑ 더군다나 고전 시대 작품들은 대부분 스타일이 평준화되어 있어서, 작곡가가 누구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작품들은 절대 다수가 진위 논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하다 못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작품 중에도 아직까지 타인의 작품 혹은 누군가가 멋대로 표절 혹은 도용해 만든 작품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곡들이 꽤 많다.
- ↑ 풀네임은 고틀리브 비더마이어(Gottlieb Biedermeier)로, 신을 사랑하는(Gottlieb) 고지식한 사람(Biedermeier)이라는 뜻의 가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