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일본 총리 | ||||
24대 | → | 임시겸임 / 25대 | → | 26대 |
가토 다카아키 | 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나카 기이치 | ||
27대 | → | 28대 | → | 29대 |
하마구치 오사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이누카이 츠요시 | ||
若槻(わかつき) 禮次郞(れいじろう)
1866년 3월 21일 ~ 1949년 11월 20일[1]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관료. 제 15대, 17대 재무 장관을 지냈고, 이후 제 25대, 28대 총리를 역임했다. 입헌 민정당[2] 출신이다. 1차 내각(25대)은 1926년 1월 30일 ~ 1927년 4월 20일까지였고, 2차 내각(28대)은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까지 유지되었다.
2 소개
이즈모노쿠니(出雲国) 마쓰에(松江)[3]에서 태어났다. 당시 시마네현을 다스리고 있던 마쓰에번 소속이었는데, 많은 일본 근대화시기 정치인들처럼 좋지 않은 무사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지금의 도쿄대학인 도쿄제국대학 테크를 타서 대장성에까지 간 사람 중 한 명이다. 전간기 일본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경제관료이자 정치가이며, 몇 안되는 평화주의자로서 유명하다.
3 1차 내각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고 히로히토 친왕이 즉위함에 따라 다이쇼에서 쇼와로 연호를 개원하는 것이다.
1927년 3월 1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와타나베 은행이 실제 파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재무장관 카타오카 나오하루가 도쿄 와타나베 은행이 드디어 파산을 했습니다. 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1차대전 이후 무역량의 감소, 관동대지진의 여파 등 불안정했던 당시 경제 상황과 맞물려 경제 불안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쇼와 금융공황이 발생하였다.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당시 일본은행을 위한 구제금융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이것이 위헌이라는 추밀원의 판단으로 인해 정책 수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 이로 인해 내각 총사퇴를 하게 된다.
이후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수석대표로 참여해서 각국 군비 축소를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 국내의 군부 및 우익 세력에게 단단히 찍히게 된다.
4 2차 내각
1931년 다시 총리대신 직에 올랐으나, 그해 9월 18일 일어난 류타오후 사건을 계기로 만주사변이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 국내의 강경파는 불경기에 대한 돌파 수단으로 만주 및 몽골에 대한 침략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는데, 와카쓰키는 이에 거세게 반발하였다.[4] 의회를 무시하고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군부, 특히 육군[5]은 노골적인 항명을 하였으며, 심지어 내각의 일원이었던 내무대신 아다치 겐조가 "거국일치"를 주장하기에 이르자 내각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깨닫고 사퇴하게 된다.[6]
5 이후
침략 시대와 2차 세계대전 시대를 거쳐 계속 반전 운동을 해 왔으나, 영향력이 미미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끝낸 이후는 중신 회의의 일원이 되어 쇼와 덴노의 측근으로 지냈으며,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시기에 와서는 도조 히데키의 경제 파탄을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1945년에는 일본의 패망이 짙어질때, 당시 스즈키 간타로 총리에게 일본의 항복을 건의하였으며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도쿄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전쟁의 시대를 막지는 못했지만 평화주의자로서 전후 그의 식견은 재평가를 받았다.